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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Yi Oct 21. 2018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본 영화들

SIWFF 2018 TICKET BOOK

긴 리뷰는 남기지 못하더라도 영화를 막 보고 나왔을 때 첫인상을 적어놓은 단평들은 틈틈이 노트나 다른 SNS에 기록해두고 있었는데, 그 기록들마저 흩어지고 기억이 휘발되어 버리는 것 같아 여기에 정리해놓기로 한다. 우선 올해 주요 영화제에서 봤던 영화들에 대한 리뷰부터 모아서 포스팅해두기로.


<늪>, <얼굴들 장소들>, <젠더너츠>, <브레드위너>, <모랄>, <스위티>, <역사수업>, <자유연기>(단편), <애니멀>까지 아홉 편의 첫인상.




2018/6/1

 _ The Swamp

루크레시아 마르텔, 2001

상당히 병리적으로(pathologically) 보이는 사건들과 관계들(에 대한 암시)을 마치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을 비추듯이 나른한 톤으로 담아내고 있는 무서운 영화였다. 제목에 걸맞게 음습함의 끝이었고 빨리 영화에서 벗어나고 싶은 동시에, 대체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겠는 전개가 계속 궁금하기도 했다. 분명 모두에게서 무언가가 망가지고 있는데(실제로 깨지고 부서지고 다치기도 한다) 다들 그에 대해 무기력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몸과 마음에서도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사회상이 어디까지가 사실적인 부분이고 어디까지가 과장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는데 당시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의 사회경제적 분위기에 대해 알아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찌 됐거나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이 대천재라는 건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영상자료원에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놓쳤던 감독의 최신작 <자마>를 못 본 것이 새삼 너무 아쉽게 느껴졌던..




2018/6/2

얼굴들 장소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_ Faces Places

아녜스 바르다 & JR, 2017

이번 영화제에서 본 최고의 걸작. 생의 감각을 기록하는 예술의 가장 원초적이고 직관적인 아름다움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쓸데없는 부연과 주석 없이 삶 그 자체를 크게 확대해서 출력해 스크린에 붙여놓은 것 같은 영화.

거장 바르다 감독의 전작들을 미리 공부하고 보겠다는 다짐은 역시나 지켜지지 못했는데, 이 다큐의 직관적이고 명료한 편집만으로도 그가 세상과 예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았다(물론 영화 자체가 본인이 직접 출연한 다큐 형식이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그리고 그가 왜 하필 JR이라는 예술가와의 협업을 결심했는지도 짐작해볼 만했다. 그의 천진한 직관과 JR의 명료한 작업 방식은, 단지 스크린으로 옮겨진 거대한 벽화들이 시네마라는 형식과 잘 어울린다는 것 이상으로 조화로운 협업이었다. 

국내판 포스터를 처음 보았을 땐 (흔히 그렇듯이) 수입사가 좀 오버해서 발랄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는데 괜한 오해였고, 상상 이상으로 생기 넘치는 영화였다. 그런데 동시에 내내 짙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아흔에 가까운 바르다의 몸과 움직임을 지켜보게 되고, 또 그 스스로가 자꾸 자신의 노쇠함과 가까운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상기시킨다. 하지만 다시 위로를 받는 것도 영화를 통해서다. 영화의 초반부터 장난스럽게 심어둔 맥거핀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관객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것이다. 형식은 물론이고 서사적으로도 이토록 놀라운 완결성을 지닌 다큐멘터리라니.

고화소의 사진을 거대하게 출력하는 작업을 하는 포토그래퍼와 노안이 심해져 흐릿하게 보여도 괜찮다고 하는 영화감독. 높은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오르는 JR의 뒤를 천천히 따라 올라가던 바르다가 지쳐서 쉬고 있는데, JR이 다시 아래로 뛰어내려와서 여기서 봐도 (높은 곳에 위치한 자신들의 작품이) 아름답지 않냐고 묻는 장면에서 왈칵 울음이 터질 뻔했다. 살아서 이런 아름다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2018/6/3

젠더너츠 _ Gendernauts

모니카 트로이트, 1999

영단어 astronaut(우주비행사)에서 따온 독특한 제목은 '젠더 여행가' 정도로 해석해볼 수 있겠다. 영화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차례로 서로를 소개해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덕분에 적지 않은 수의 그들 모두와 금세 친숙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일 줄 알았는데 아주 친절하고 관대한 어떤 커뮤니티에게 환대받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는 다큐멘터리였다.

모니카 트로이트 감독 회고전 상영이었던 터라 감독님이 참석하신 GV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샌프란시스코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서 먼저 그에게 다큐멘터리의 제작을 요청하여 시작된 프로젝트라고 한다. 또 영화의 20주년을 맞아 <젠더너츠>의 후속 다큐멘터리 제작을 구상 중이시라는 반가운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하나 같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출연진들의 현재가 무척이나 궁금하다.




2018/6/3

브레드위너 _ The Breadwinner

노라 투메이, 2017

시놉을 보고 어느 정도 각오하고 보러 가긴 했지만, 아프가니스탄 현지의 적나라한 실상이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적인 완충제에도 불구하고 너무 강하게 다가와서 힘들었다. 주인공 파르바나의 지난한 여정과, 액자식으로 삽입된 소년의 이야기, 그리고 전쟁 장면까지 교차되며 겹쳐지는 후반부의 연출이 굉장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영화적 울림의 강도가 영화 외적인 현실의 끔찍함에 기인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이야기의 힘만을 놓고 보았을 땐 제작사 카툰 살룬의 전작 <바다의 노래>보다 약한 느낌이긴 했다. 원작은 어떨지 궁금하다.




2018/6/3

모랄 _ Morals

마리로우 디아즈-아바야, 1982

크게 기대하진 않았고 시간도 좀 늦어서 볼까 말까 하다 봤는데 무엇보다 일단 보는 즐거움이 있는 재미있는 영화였다. 필리핀 영화는 (아마도) 처음이었는데 이 영화가 특출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유머라던가 여러 가지가 무척 세련돼서 놀랐다. 특히 완벽하게 대중 영화의 문법으로 쓰인 유쾌한 작품이 아주 페미니스틱한 주제까지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80년대 필리핀에서는 이런 상업영화가 나왔었는데, 2010년대 충무로에서 내용이나 구도 상으로 비교해볼 만한 작품으로 떠오르는 상업영화는 <써ㄴ.. 라는 것이.. (한숨)

인물들의 서사도 전형성을 계속 비껴가는 게 좋았다. 예컨대 가수로서의 성공을 꿈꾸는 캐시는 특출 난 재능을 지녔다거나 ‘선한’ 노력만으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신성화된 캐릭터가 아니라서 매력적이었다. 주인공들 뿐만 아니라 그 윗 세대 여성들의 삶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대목들도 인상적이었다. 조이의 어머니 매기와 마리테스의 시어머니 같은 인물들이 뚜렷하게 대조를 이룬다. 외에도 악역이든 사소한 역할이든 주변 캐릭터들의 설정에까지 다양한 여성들의 서사를 삽입한 감독의 세심함이 느껴졌다(줄임말을 즐겨 쓰던 좀 놀 줄 아는 매니저 언니 캐릭터가 자꾸 생각나..).

아쉬웠던 옥에 티를 꼽자면 중간에 성폭력 장면이 필요 이상으로 길게 나온 것. 전시하는 듯한 시선의 연출은 아니긴 했지만 왜 굳이 길게 보여주는 선택을 했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주인공들 중 마리테스 캐릭터의 다소 온건한 결말도 못내 아쉬웠다. 그렇더라도 ‘페미니스트 필름 클래식’이라는 프로그램 명에 더없이 걸맞은 멋진 여성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2018/6/6

스위티 _ Sweetie

제인 캠피온, 1989

정말 좋았다. 인간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에 대한 호러 영화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계속해서 어긋나고 고통받는 인물들을 비추는데, 우스꽝스러워 보이면서도 동시에 보고 있는 관객들을 계속 어떤 시험에 빠뜨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다 보고 나왔을 때 밀려드는 서늘한 슬픔.

영화의 말미에 이게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걸 암시하는 자막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체 어떻게 이런 영화를 스스로 찍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이나 프로덕션 디자인, 의상이 정말 아름답기도 했다. 영화가 끝나고 이것저것 찾아보는데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것도 놀라웠고 1989년 영화라는 것은 더더욱 놀라웠다. 

공교롭게 20주년 앵콜전에서 상영한 이경미 감독님의 데뷔작 <미쓰 홍당무>(재관람)와 이 영화를 연달아 보게 되었는데, 이 여성 작가들은 자조가 섞인 인물을 만들면서 자신의 가장 끔찍하고 추악한 어떤 부분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방점을 찍기도 했다는 점에서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 머릿속에 떠오른 몇몇 남성 작가들은 자신이 투영된 캐릭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숭고한 부분과 변명거리들을 어떻게든 남겨두려 애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8/6/6

역사수업 _ History Lessons

바바라 해머, 2000

훨씬 관념적인 영상 작업일 것이라 예상하고 각오를 하고 보러 들어갔는데 너무 폭소 대잔치였고 정말 좋았다. 역사 속에서 레즈비언 또는 여성들의 단체를 다룬 온갖 (빻은) 영상 소스들에다가, 여러 방식으로 가사를 비틀어 수정한 노래나 영화 대사 패러디, 포르노 영상 등을 삽입해서 맥락을 완전히 전복시켜버리고 처절하게 비웃는다(철저하게 아니고 진짜 처절하게). 이 영화는 더 이상 뭘 더 설명하거나 풀이하는 것이 무의미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직접 보고 경험할 수밖에 없는 영화이고 스크린으로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2018/6/7

자유연기

김도영, 2018

폐막작으로 보게 된 아시아단편경쟁 작품상 수상작. 사실 장편경쟁 수상작 쪽을 기대하며 폐막식에 간 것이었는데 개인적으로 훨씬 마음이 간 작품은 이쪽이었다. 독박 육아를 하고 있는 경력 단절 배우의 일상을 아주 안정적이고 밀도 있는 연출로 쭉 보여주다가 후반부에 강렬하게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채 영화가 끝난다. 영화의 제목과 전개 양상에서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결말이었지만 그 울림의 강도가 작지 않았다. 김도영 감독의 이름과 함께 주연을 맡은 강말금 배우의 이름도 꼭 기억해두어야겠다.


덧,

9월에 들려온 반가운 소식,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연출을 김도영 감독님이 맡게 되셨다고 한다. 정말 더할 나위 없는 조합.




2018/6/7

애니멀 _ L'animale

카타리나 뮉슈타인, 2018

역시 폐막작으로 보게 된 국제장편경쟁 작품상 수상작. 어떤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느껴졌고 주인공 마티의 캐릭터가 정말 매력적이었지만, 후반부에 이야기들을 봉합하는 방식에서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아직 전혀 괜찮지 않은 사람에게 성급히 괜찮다고 토닥이는 느낌. 초중반부까지 마티는 아주 신선한 캐릭터로 다가왔는데 다소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로맨스 서사가 진행될수록 캐릭터까지 평범해져 버리는 것 같았다. 주인공들의 갈등 해소 과정도 좀 갑작스러웠다. 서브플롯의 파울 쪽의 서사는 더더욱 전형적인 느낌이었다. 

아쉬운 점들만 먼저 나열해버렸는데 물론 좋았던 부분도 많았다. 제일 좋았던 건 역시 마티가 시원하게 바이크를 타는 장면들에서 느껴지는 쾌감. 그 장면들만으로도 스크린으로 봐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감독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이 느껴지는 디테일도 많았는데, 제목에 걸맞게 다양한 동물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시켜 극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방식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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