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형의 죽음으로 고향(맨체스터 바이 더 씨)을 찾은 리(Lee)는 과거의 상처와 마주하게 된다. 그 일은 고향에서 일어났고 상처를 공유한 사람들도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상실로 인한 상처, 또 다른 상실로 인해 다시 떠오르는 과거의 상처. 그러니 고향엔 온통 상실과 상처뿐이다. 리는 예상치 못한 순간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다. 이말인 즉, 우리도 타인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의도와 상관없이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리의 전처 랜디가 그랬듯, 본인의 상처가 너무 크고 아픈 나머지 타인에게 격한 말로 몰아붙이거나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말하면서도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개중에는 극복이 어려운 상처도 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나. 배꼽이나 손가락처럼 내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 극복하고 이겨낼 필요 없이 단단한 상자에 넣어 기억 저편 어딘가에 숨겨둔다. 먼지가 쌓여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리’는 친절과는 거리가 멀고 관계 지향적인 사람도 아니다. 혼자 일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본다. 일은 잘 하지만 업무로 마주하는 사람들과도 필요 이상으로 많은 얘길 나누지도 않는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형의 장례식장에 온 사람들은 그에게 이상한 눈길을 보낸다. 반면 ‘리’의 조카 ‘패트릭’은 정반대다.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 많이 다르다. 패트릭은 학교에서 하키 선수로 활동하고 방과 후엔 밴드를 한다. 모두 누군가와 함께여야만 할 수 있다. 부고를 들은 날도 친구들을 불러 슬픔을 함께 나눈다. 여자 친구(들)도 많다. 리의 성격이 원래 그랬는지 과거의 상처로 인해 변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카메라는 조카 패트릭의 일상을 담아내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데 이는 리의 성격을 더 극대화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작은 모터보트 위의 세 사람을 비추며 시작한다. 패트릭과 리가 의견충돌하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역(패트릭은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 살고 싶고 리는 보스턴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모터보트다. 모터보트 이름이 의미심장해서 유심히 보았는데 의미는 영화 맨 마지막에 알 수 있다. 패트릭이 고집을 부린 배는 추억의 산물이자 아버지의 유품이다. 또 바다 마을에서 나고 자란 패트릭에겐 유년시절을 상징하는 무엇이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한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그의 유품을 간직하거나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 이 또한 상실을 극복하면서도 망각을 방지하는 길이다. 패트릭이 여자친구(밴드 보컬) 집에서 수학 숙제(?)할 때 무심코 밟는 게 인형의 집이다. 이또한 밴드 여자친구의 할머니가 물려주신 것이다.
살면서 어떤 형태로든 상처가 생기기 마련이다. 몸에 난 상처는 잘 관리하면 빨리 아물기도 하지만 몸 안에 생긴 상처는 그렇지 않다. 다들 마음 속 상처를 하나씩 안고 있음에도 살아갈 수 있는 건 뇌가 망각 장치를 충실히 작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도 여전히 남아있는 상처가 있다. 기억 저편 아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상처를 넣어둔 채, 일상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해질 때가 되었는데 어느 날 문득 누군가 그 상처를 헤집어 놓는다. 헤집고 꺼내는 건 타인인데 아파하고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는 건 내 몫이다. 아프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에게 화를 낼 수도 없다.
함께 본 이는 ‘로스트 인 더스트’를 떠올렸고 나는 ‘데몰리션’이 생각났다. 리는 내가 바란 슬픔을 분출하지 않았다. 학창시절 미간에 자리한 여드름처럼 꽉 찬 상태로 강하게 터지길 바랐건만 그러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지 모른다. 마른 땅에 나뭇가지가 들어갈 정도로 물렁해진 봄이 오면 그 상처가 다시 기억 저편 상자 안에 들어가 있길 그리고 또 바쁘게 누군가의 배수관을 고치며 살길 바란다. 상처를 간직한 우리 모두가 그렇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