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16세기

루마니아 시기쇼아라 '호텔 시기쇼아라(Hotel Sighisoara)'

by 중앙동 물방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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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은 파헤치기를 권하고 나는 마다하지 않는다. 드라큘라 전설을 조사하다 루마니아의 ‘시기쇼아라’에 닿았다. 간혹 지역명을 그대로 쓰는 호텔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시기쇼아라 호텔’이다. 이런 호텔에 머물면 혜화동 왕돈까스 집에서 제일 첫 번째 쓰여 있는 메뉴인 왕돈까스를 먹는 느낌이다(뭘 먹을지 모르겠다면 가게 이름을 딴 음식을 주문할 것)


그간 많은 요새(성곽)를 다녔는데 어째서 머릿속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그려지지 않았는가. 호텔은 요새, 타워 등 주요 관광지와 매우 가까이 있다는 말만 철석같이 믿었다. 걸어서 15분이라는 것만 보고 해발 고도 380m를 올라야 한다는 건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택시 타고가자는 그의 말에 반기를 들며 내처 씩씩하게 나아갔지만 20kg의 캐리어를 끌고 언덕을 오르는 동안 5분 전 자신과 치열하게 싸웠고 그에게 평생에 걸쳐 미안할 거리가 생겼다. 예수 뒤에서 온갖 짐을 들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맨 뒷줄의 어린 사제만이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밤 9시 정도 되었을 뿐인데 시내는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가로등이 켜있고 영업하는 식당은 거의 없었다. 호텔 내 식당을 이용하려니 체크인을 해준 아저씨가 안내해준다. 우리같은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웬만한 손님들은 오지 않을 것 같다.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 이런 곳에 식당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할 게 당연하다. 예상대로 식당엔 애오라지 우리 둘뿐이었다. 좀 전까지 누군가 여기서 밥을 먹었는지 치우지 않은 그릇이 공룡 뼈처럼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돌연 위로가 되었다. 그때 퇴근하려다 갑자기 자켓만 걸치고 불려나온 (것 같이 보이는) 한 남자가 메뉴판을 들고 나타났다. 용케도 멀리 안 가고 근처에 있었구먼. 그나저나 이 많은 요리를 다 만들 수 있는 건가 슬며시 의문이 들었다. 요리사가 정말 있는지 다른 곳에서 사서 와도 잘 모를것 같다. 다행히 요리는 괜찮았지만, 문제는 웨이터가 거스름돈이 없었다. 거스름돈을 팁으로 가지려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타의로 팁을 건네고 한 끼를 무던하게 해결했다.


매일 밤 대용량 파일을 보내야했는데 와이파이는 병든 아이처럼 약하기만 했고 수맥사 마냥 노트북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불 꺼진 복도의 허름한 소파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렸다. 지나가던 투숙객이 이 모습을 본다면 대단한 종군기자로 착각해 이름이라도 물어볼 만했는데 그런 오해를 해줄 만한 어떤 이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기쇼아라 호텔에 있으면 16세기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든다. 고색창연한 외관과 오래된 건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동굴 같은 로비 등 호텔 자체가 하나의 역사유적이자 박물관 같다. 방은 또 어찌나 넓은지 여백의 미를 사모한 조선 시대 화가들이 장기 투숙했을성싶다(어차피 그분들은 와이파이를 쓰지 않았을 테니까 모든 게 만족스러웠을 테죠) 아침 식사도 제법 실팍했다. 호텔이 유일하게 박작거리는 순간이 아침 먹을 때였다. 어젯밤 혼자서 와이파이와 악전고투를 할 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실은 각자 자기 방에서 와이파이가 솟아나는 지점을 찾아다녔다는 걸 안다고요. 그들을 붙잡고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 호텔과 도시에 관해 100분 토론이라도 하고 싶었다.


시기쇼아라 호텔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 지역과 잘 어울린다. 가끔 어떤 호텔은 주위의 풍경을 의식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설계해 도시 미관을 해치고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한때 거대한 영토를 거느린 영주가 은퇴한 뒤 어디선가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와이파이는 ADSL로 달아놓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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