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진귀한 경험이 되어버렸지만
장거리 비행 시 자리에 앉으면 이륙 후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흐르길 희망한다. 좌석 표시등이 꺼지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은색 카트를 잡은 승무원이 내 쪽을 향하여 서 있으면 그때부터 심장이 빠르게 요동친다.
맥주의 본국 독일에 가기 전, 성지순례 하는 신자의 마음으로 한 달 동안 독일어를 진지하게 공부했다. 지금 그 첫 관문이 열리는 중이다. 무슨 음료를 마시겠냐고 영어로 묻는 승무원에게 미소를 띤 채, “Bier, bitte”라고 또렷이 말하니 승무원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진다. 이어 준비한 “Danke schön”으로 2연타를 날렸다. 그에게서 경쾌한 “bitte schön”이 돌아왔다.
언어는 한 나라의 정신 가장 깊은 곳에 연결되어 있다. 여행은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고 언어는 그 세계의 문을 잘 열 수 있는 열쇠이자 방문자가 지참하는 작은 선물이다. 한국에 온 외국인이 서툰 한국어로 길을 물을 때 더 잘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같은 지점이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실례합니다’ 와 ‘맥주 주세요’ 이 네 가지는 그 나라 언어로 꼭 외우고 자주 사용한다. 레스토랑에선 현지인처럼 자연스럽고 정중하게 맥주를 주문하고 싶다 보니 20여 개의 언어로 된 ‘맥주’라는 단어를 알게 됐다. 발음이 어렵다면 단어가 어떻게 생겼는지라도 외우면 된다. 메뉴판에서 유사한 상형문자를 손가락으로 짚으면 되므로.
다시 독일로 가는 비행기로 돌아가서 기내 멀티미디어로 영화를 보려는데 바르슈타이너(Warsteiner) 광고가 나왔다. 바르슈타이너는 18세기에 만들어진 역사가 오래된 독일 맥주로, 루프트한자와 계약을 맺어 전 노선에서 이 맥주를 제공한다. 광고로 먼저 “목이 마르지 않습니까?” 하고 물은 뒤 승무원이 카트를 끌고 와 무얼 마시겠냐고 물어보는 이 적확한 타이밍이란. 머릿속엔 맥주가 가득 차 있고 승무원은 바르슈타이너를 내민다. 그렇게 우리는 상공 35,000피트에서 위(胃)가 바르슈타이너로 가득 채워지고 두어 번의 화장실을 다녀오면 베를린 공항에 다다른다. 마치 위(胃)와 방광에 “이제 이런 친구들을 일주일간 자주 보게 될 거야. 놀라지 마” 하고 다정한 선전포고를 하듯이.
더블린에 갈 때는 브리티시 에어웨이(British Airways)의 프리미엄 이코노미를 예약했는데 항공사의 오버 부킹인지 비즈니스 클래스로 업그레이드가 되었다. 기내 메뉴를 받고 어김없이 맥주 라인업을 가장 먼저 확인했다. St. Austell tribute pale ale, 브루독, 하이네켄이었다. 처음 보는 세인트오스텔의 페일에일을 주문했다. 과일 향이 풍부하고 몰트와 캐러멜 맛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고소한 에일이었다. 기내에서 높은 기압 때문에 미각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는다고 해도 매우 잘 만든 맥주였다. 사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는 주 이유 중 하나가 펍 투어였는데 기내에서부터 여행의 목적을 잘 설정했노라 격려받는 것 같았다.
식사까지 모두 마친 뒤 한 번 더 그 맥주를 마시고자 했으나 승무원이 아쉬운 표정을 했다. 프리미엄 이코노미나 비즈니스석을 타도 내가 원하는 메뉴가 뭐든 제공되리라 안심하지 말자. 아까 못 마신 맥주 지금 먹어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나중에 승무원을 부르면 없다. 내가 마시고 싶은 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예전의 나는 먹을 게 여러 개 있으면 가장 맛있는 것을 최후에 먹곤 했다. 덜 좋아하는 것을 먼저 먹으며 가장 좋아하는 것을 먹을 때 느낄 기쁨을 상상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무른 자리도 아름답듯 맛있는 것이 남아있던 자리 또한 맛있을 테니 그 맛을 오래도록 입안 가득 채우려고 말이다. 요즘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제일 먼저 먹는다. 일단 배부름을 꽤 빨리 감지하고 배가 부른 게 느껴지면 급히 식욕을 잃는다. 미각이 가장 예민하게 맛을 감지하는 순간도 처음이라 최애를 가장 먼저 먹는다. 내게는 ‘다음’이 없는 경우도 있으니까 좋아하는 것을 미루다간 기내엔 하이네켄만 남아있을 수도 있다. 현재의 기쁨을 유예하지 말자.
그나저나 언제 다시 우린 하늘에서 맥주를 마실 수 있을까.
* 오늘의 맥주: 현대카드가 제주맥주와 같이 협업해 만든 Our Ale. 세션에일이다. 상큼한 귤향이 먼저 코에 닿고 홉 향이 강하지 않다. 적당한 탄산으로 가볍게 마시기 좋다. 제주산 보리를 사용한 것도 제주맥주여서다. 도수 4.4% 그나저나 현대카드가 왜 이렇게 캔을 디자인했을까. 음용을 부르는 디자인은 아닌 것 같아 아쉽지만 맥주는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