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잔하자”는 말을 언제 마지막으로 했을까. 익숙하지 않은 말이다. “맥주 좋아하세요?” 나 “시간 될 때 맥주 한잔해요.” 라는 말은 할 수 있을 듯하다. 대학생 때는 전연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몇 시간씩 있었다. 수업에 도움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친한 친구가 하나라도 있으면 기댈 구석도 있으며 돈이 많이 들지도 않았으니.
그런 자리엔 충실한 보디가드처럼 피쳐 맥주가 따라온다. 대형 맥주 회사의 로고가 그려진 반투명 2000cc 맥주 통, 간혹 지인들은 과연 2,000cc가 맞는지 의문을 품었는데 확인해 본 이는 아직 없다. 피쳐 맥주와 가까이 있는 사람이 기울인 각자의 잔에 가득 따라준다. 모두의 잔이 채워지면 “짠~~~~” 이란 외침과 함께 벌컥벌컥 두어 모금을 마신 후 내려놓는다. 장소나 마시는 사람이 달라져도 피쳐가 등장하면 판화마냥 풍경이 대개 비슷해진다. 시간표나 학점, 연애 따위 얘기를 했던가. 같은 테이블에 친한 이가 없는 것보다 친해지고 싶은 이가 없는 게 더 낭패였다. 내 자리는 뭔가 침묵이 흐르는데 타 테이블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와 조바심과 어색함이 안개같이 자욱해질 때
눈앞에 놓인 맥주를 홀짝 마신다. 맥주를 좋아해서도 맛있어서도 아니다. 피쳐맥주의 맛은 논하는 게 아니다. 이런 때의 생맥주는 몸 어딘가에 숨어있던 활달함을 끌어 올려 참여 의식을 고취하고 마주한 이에 대한 경계와 예의의 장벽에서 벽돌을 몇 개 빼내는 역할을 한다.
옛날에 쪼끼쪼끼라는 체인 맥줏집이 있었다. 1999년에 생겨 1년 만에 200호점까지 열 정도로 성행했는데 지금 검색해보니 경기나 서울 외곽 쪽에만 조금 남아있다. 파란색 간판에 쪼끼쪼끼라는 상호의 모음 ‘ㅗ’자가 웃는 입처럼 곡선을 그린 게 특징이다. 조금 촌스럽긴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기억나는 걸 보면 각인될만한 촌스러움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보다 내 시선을 이끈 건 이곳에서만 마실 수 있는 특이한 맥주였다. 커피 맥주, 복분자 맥주 같은 요상한 색을 띤 맥주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시럽을 탔겠구나 싶지만, 그땐 흔치 않았고 왕성한 호기심이 언제나 한 발짝 앞서 주문을 불렀다. 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맛이 맞으리라.
당시 맥주 한잔을 앞에 두고 얘기한 사람은 모두 어떠한 형태로든 중요한 사람이겠지만 20대 때는 언니와 맥주를 마시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대학교 2학년 때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위한 노잣돈 마련으로 아침에 수업을 몰아 듣고 오후엔 극장에서 8시간을 일했기 때문에 해가 떠 있는 시간에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극장은 일주일에 한번 쉬었는데 휴무를 앞둔 밤 언니와 동네 쪼끼쪼끼에 가서 이상한 맥주들을 마시곤 했다. 늦은 시각에도 걱정 없이 함께 걸어서 귀가할 수 있고 어떤 말을 해도 상관없으며 타인에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언니였다. 따로 나와서 살면서 이전처럼 함께 집 앞에서 마실 기회가 줄어서인지 20대 때 맥주를 떠올리면 그때의 언니와 내 모습이 선연하게 그려진다.
맥주의 맛이나 선택지를 생각하자면 수제 맥주가 왕성한 인기를 끌고 있는 지금이 좋지만, 맛도 없고 그저 꽝꽝 언 맥주잔 따위가 유일한 자랑거리인 허름한 맥줏집이 그 시절 가장 편안한 시간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국내 좋은 수제맥줏집을 많이 다녀보았지만 인스타그래머블한 곳은 있을지언정 어쩐지 푸근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오늘의 맥주. 굿맨브루어리의 서울라거. 일전의 한 수제맥주집(브루펍은 아닌 펍)에서 생맥으로 마셔본 적이 있다. 얼마전 무인양품에 갔더니 병맥주로 판매하고 있어서 구입했다. 330ml, 4.5%. 약간의 신맛이 느껴지는데 원래 이 맥주가 이런 것인지 모르겠다. 늘 500ml 캔을 마시다가 330ml를 따라 마시니 일본 맥주를 마시는 기분이 든다. 약간의 달콤함과 고소한 맛이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무난하고 마시기 편한 라거다. 음식을 먹을 때 함께 마시기 좋을 것 같지만 약간 심심한 느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