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수 선수와 맥주를 마시다

by 중앙동 물방개

그땐 당연한 줄 알았다. 양키 스타디움에서 뉴욕 양키스와 텍사스 레인저스의 경기를 보게 되었고, 마침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활동하는 추신수 선수가 나왔다.


양키 스타디움은 생애 두 번째로 간 야구장이었는데, 첫 야구장도 캐나다의 한 야구장이어서 구장이라면 응당 이런 모습을 띄는 줄 알았다. 야구에 별로 관심도 없다 보니 양키 스타디움의 명성은커녕 추신수 선수가 미국에 있는지도 그날 알았다. 이런 사람이 왜 양키 스타디움에 왔는지 묻는다면, 양키 스타디움엔 어떤 맥주를 팔고 그 맛은 어떨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이유는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다.


먼저 스타디움 샵에서 데릭 지터의 등 번호 2번이 마킹된 스냅백을 하나 사서 눌러썼다(데릭 지터는 그해 은퇴를 앞두고 있었고 맨해튼 한복판에 나이키 모델로 광고가 크게 걸려 있었다) 그날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까지 데릭 지터라는 사람이 지구에 있다는 것도 몰랐지만, 홈 팬들에게 지독한 슈퍼 히어로라는 것쯤은 샵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경기장 입장 후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맥주 향기가 풍기는 곳으로 직진, 여러 개 늘어선 탭을 가만히 살핀 후 구스 IPA를 주문했다. 스텔라 아르투와와 버드 아이스도 있었으나 그들은 나와 함께 갈 수 없었고 손에 들린 맥주는 거대한 미국 땅덩이마냥 과연 컸다. 뉴욕 양키스 팬들이 부러운 이유는 단 하나, 이 구스 아일랜드 맥주를 마시면서 경기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쌉쌀한 홉의 향이 뭉근하게 느껴지는 구스 맥주를 마시면서 경기장을 보니 더 황홀했다. 구스 아일랜드는 시카고를 기반으로 한 소규모 브루어리로 시작했는데 미국 전역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양키 스타디움에 진입할 정도면 이미 충분히 인정받은 셈이다. 홈런볼 밖에 몰랐던 나의 야구사전에 그날 구스IPA와 데릭 지터가 추가됐다.


경기가 시작되고 조금 지났을 무렵, 전광판에 추신수 선수의 얼굴이 나타났다. 부산과 한국이란 단어에 괜스레 반색했다. 비록 지터 모자를 쓰고 양키스 팬에 둘러싸여 작은 섬처럼 있지만 "추신수 선수 화이팅!"을 외쳐주었다. 물론 무탈하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므로 양옆에 있는 사람들만 들릴 듯한 음량이어서 그에게 전혀 가 닿진 않겠지만 외친 건 사실이니까.


2014년 7월 24일 경기는 뉴욕 양키스가 승리를 가져갔다. 이제는 안다. 팀에 소속된 선수가 모든 경기에 나오지 않을 수 있고, 2주간의 단기 미국 여행 중 뉴욕에 머무르는 매우 짧은 일정 속에서 양키 스타디움에 경기가 있으며 상대 팀이 텍사스 레인저스일 확률, 더 나아가 그 경기에 추신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는 것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님을. 우연을 가장한 행운이 복리처럼 겹쳐야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한국에서 프로로 활약하다 적당한 시기 메이저리그 진출은 많은 야구 선수의 꿈이다. 그렇기에 그날의 경기 또한 추신수 선수에게 꽤 중요한 순간이었으리라.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던 자리에서 진지하게 임하고 그런 자리의 관중으로 함께 한다는 사실은 비록 그의 인생에서 나는 기억에 남지 않는 행인2 같은 존재겠지만 내겐 빛나는 순간으로 남아있다. 그러니 7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보통 건배할 때 나(또는 우리)의 건강을 기원하지만, 그날 양키 스타디움에선 추신수 선수의 등판을 보며 그의 건강한 미국 생활을 위해 기꺼이 맥주를 들어 올렸다.


사족. 나는 모 야구팀의 6년근 팬이 되었다. 과자 홈런볼 패키지에서 홈런을 처맞고 웃는 포수가 우리 팀 포수가 아니기를 바라고 경기장에서는 우리팀 투수의 스트라이크를 안 잡아주면 언성을 높이기도 하는 잔망스럽고 성실한 팬이다. 서울에서는 한국시리즈가 아닌 이상 언제나 원정 석이 텅텅 비어 내 목소리가 구장에 쩌렁쩌렁 울리는 경험도 하고 독립군 같은 생활을 청산하려 가끔 KTX를 타고 내려가기도 한다. 전국 야구장을 전전하며 알게 된 진리는 잠실이든 고척이든 어딜 가도 맥주는 한결같이 맛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의 맥주. 미스터리브루어리의 BLACK N BLACK(블랙 앤 블랙) 초콜릿&시나몬. 한정판으로 나왔길래 예약하고 바로 캐닝된 맥주를 받았다. 따를 때부터 느낌이 다르다. 진득하고 검은 초콜릿 시럽을 따르는 느낌. 거품도 탄산도 없다. 진한 다크초콜렛의 맛이 입안을 가득 적시고 코로 계피의 향이 부드럽게 들어온다. 피니시에서 느껴지는 알코올 향이 그제야 맥주를 마시고 있음을 깨닫는다. ABV 12%, 가격(14,000원) 또한 도수만큼 사악하다. 한 모금 한 모금이 귀해 아껴 마시고 마지막 잔해가 아쉬워 탈탈 털어 입에 넣는다. 달다고 훌렁훌렁 마시다간 큰일 나니 조심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