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타치오, 꼭 알아야 하나요

by 중앙동 물방개

몇 해 전 맥주 아카데미를 다녔다. 1시간 정도 이론을 배운 후 그날 배운 맥주 종류를 브랜드별로 테이스팅하면서 향과 맛 등에 대해 메모하는 수업이 있었다. 보통 6종을 150ml씩 마시는데, 구하기 어렵거나 고가인 맥주가 많고 마시다 보면 취하기도 쉬워서 한 모금 마실 때마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한다.


맥주의 맛과 향을 메모할 때 대중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있다. 곡물, 초콜릿, 캐러멜, 엿, 꽃향기 등이다. 대부분 주어진 보기를 참고해 적는데 어쩐지 그렇게만 하면 나중에 볼 때 이 맥주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았다. – 그 수업은 씨서론(Ciecerone)이라는 맥주 자격증을 준비하는 반으로 추후 맥주를 테이스팅하는 2차 시험도 대비한다 – 하여 맥주의 향과 맛, 입안의 느낌을 최대한 집중해서 상상하며 적었다. 노트를 찾아보니 “설거지 세제 향이 난다” “나무 아래서 안 익은 과일을 따 먹은 것 같다” 이런 문장이 적혀있다. 수강생들이랑 한 모금을 마시곤 감상을 나누는데 내가 적은 것을 보고 “OO씨는 거의 대장금이네요. 저런 향까지도 캐치하고..”라고 말했다. 할 말이 없어 멋쩍게 웃었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한 장금이만이 내 마음을 이해하리라.


맥주 노트는 맥주를 마시기 전의 외관부터 코로 들어오는 향, 입안과 혀로 느끼는 풍미, 마우스필(mouth feel) 등을 모두 세세하게 기록할 수 있다. 허나 이런 것은 대개 첫맛에서 좌우된다. 한번 맛을 보고 바로 이를 닦지 않는 이상, 새로운 맛에 대한 감각은 무뎌진다. 놓쳐버린 첫맛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뿐더러 연거푸 맛을 본다 해도 첫맛에서 적지 못한 것을 더 적으리란 보장도 없다. 따라서 첫 모금을 가장 준비된 상태로 마셔야 하고, 그 한 모금에 모든 오감을 동원해야 한다. 아주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기 위해 범죄 현장을 방문하는 국립과학수사원의 연구원처럼 말이다.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코로 향을 보낸다. 어떤 향이 나면 눈을 감고 이와 비슷한 냄새가 났던 과거의 순간을 떠올린다. 모든 맛과 냄새가 항상 기억을 소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첫 모금을 마신 뒤 내 기억 도서관의 사서가 되어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것을 찾아 헤매곤 했다.


예전에 바리스타 수업을 들을 때는 수업 시작 전 커피를 마셨다. 선생님이 가져온 원두를 드립으로 내린 후 수강생들과 나눠마시며 감상을 나눈다. 그때 선생님이 “이 원두는 ‘블러디 오렌지’ 가 테이스팅 노트에 쓰여 있어요. 여러분, 근데 블러디 오렌지가 어떤 건지 잘 모르시죠? 한국엔 거의 키우지 않으니까 당연해요. 근데 이 커피콩이 자란 곳은 블러디오렌지를 같이 키웠대요." 커피콩은 함께 자란 과실의 영향을 받아 나중에 씻기고 볶아도 그 향을 간직한다고 했다. 그곳이 있던 사람들 모두 블러디 오렌지를 몰랐고 내가 느꼈던 맛도 오렌지나 감귤 정도였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것에 한해서만 느낌을 쌓을 수 있다.


다시, 맥주 아카데미. 어느 날 한 수강생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이 맥주는 피스타치오 맛이 난다고 적혀 있는데 저는 피스타치오가 무슨 맛인지 너트향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이걸 꼭 알아야 하나요?”


사실 블러디오렌지든 피스타치오든 모를 수 있고 몰라도 사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다. 다만 우리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시험에 정답을 적기 위해서는 그것을 경험해 보는 게 도움된다. 좋아하는 맥주와 커피를 마시면서 과거의 기억을 자주 소환했다. 좋아하는 것을 더 잘 알기 위해선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오감을 동원해 먹어보고 마셔보고 맡아봐야 한다. 블러디오렌지를 몰라도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살면서 더 많은 것을 적을 수 있도록 나만의 보기를 만들고 싶다. 누군가가 준 예시가 아니라 내 삶에 찌든 때처럼 있는 기억이라도 좋으니 거기에서 풍기는 냄새를 적길 원한다.




*오늘의 맥주: 찐한 맥주. 이름이 별로다. 놀라운 건 디자인도 별로라는 것. 마트에 갔다가 안 마셔본 맥주라 사긴 했지만, 이름이랑 전혀 부합하지 않는 맥주다. 굳이 상단에 리얼라거라고 표기했는데 여긴 모든 게 다 말하는 것과 상반된다. 이런 싱거운 맥주를 다신 마시고 싶지 않지만, 세상 어딘가엔 이런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싱겁다. 독일 맥주 중 베를리너 킨들이라고 있는데 그것의 아주 저렴한 보급형, 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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