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과의 약속을 별로 만들지 않는다. 하루에 부여된 에너지의 총량이 100이라 하면 8시간의 일을 마친 뒤에 남아있는 에너지는 20, 휴대폰 배터리처럼 빨간 불이 들어와 보는 것만으로 초조해진다. 이럴 땐 그저 일에서 로그아웃하고 집까지 순간이동이 절실하다. 간혹 좋아하는 이들과 안부를 묻다가 모임이 성사되면 그 자리만큼은 최선을 다한다. 요즘 같은 때는 아무리 할 말이 많아도 밤 10시가 최대라서 이런 통금시간이 나쁘지 않다. 우리가 언제 헤어질지 아는 것, 집에 도착해도 아직 하루가 몇 시간 남아있다.
가끔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 왜인지 헛헛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딱, 맥주 한 캔만 더 마시면 좋을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벌써 어느 편의점에 들러 무슨 맥주를 살지 시뮬레이션하기 시작한다. 역에서 집까지 가는 길에 2개의 편의점과 집 주변에 2곳이 더 있다. 그때마다 다르긴 하지만, 신제품 중에 아직 못 마셔본 맥주가 떠오르면 그걸 파는 곳에 가고 아니면 집 근처로 간다. 4캔이 기본이라 무거움은 짧게 느낄수록 좋다. 그렇게 4캔을 가방에 쑤셔 넣곤 집에 돌아와 씻자마자 맥주 한 캔과 컵을 꺼낸다.
딸깍, 언제 들어도 호쾌한 소리. 왜 그토록 한 캔이 간절했는지 돌이켜 보자. 오늘 만남에서 축인 맥주의 양이 충분하지 않았나. 그럴지도 모른다. 평균 두 잔의 파인트를 마시는데, 상대의 속도에 맞추다 보면 한 잔으로 그치기도 한다. 절대적인 청자의 역할에 복무했든가 아니면 너무 피곤해서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든지. 아무튼 그 자리가 피곤함만 퇴적층처럼 겹겹이 쌓아줬을 뿐 흥미롭지 않았을 때 마무리 맥주가 필요하다. 가장 적확하고 빈번한 이유는 그 만남에서 상대에게 어떠한 이유로 내 입장을 온전히 전달하지 않았거나 뭔가 만족스러웠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겉돌거나 인사 후 뒤돌아서는 순간, 오늘 이후로 우리가 다시 볼 일은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할 때. 기대한 느낌을 더는 받지 못하는 관계, 서로에게 더 다가서지 않고 안전한 선 뒤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관계, 어떤 소득도 없이 끝나버리는 두어 시간. 그렇게 뚫려버린 마음을 조금이나마 채우기 위해 3차로 자신과 맥주를 마신다.
그렇다고 쓸쓸하거나 처량하진 않다. 오늘 실언하진 않았나, 만난 사람이 했던 말 중에 괜찮은 얘긴 있었나 곱씹어볼 수 있다. 외려 마시다 보면 무지근한 마음이 적당히 가벼워지기도 한다. 여러 번 봐야 괜찮은 사람 말고, 그냥 처음부터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게 좋다. 이런 사람과 저녁 시간을 보내면 마무리 맥주가 필요치 않다. 선발투수가 경이로울 정도로 잘하면 마무리 투수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