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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금비 Oct 02. 2023

이제 내비게이션은 끄기로 했다.

프롤로그

삶에는 정답이 없다.
따라가야 하는 정해진 길도 없다.
모두가 아는 이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제는 확실하게 알게 됐다.

그 후 난 정해진 경로를 알리는
그 내비게이션을 과감히 꺼버린다.





“하시는 일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에 항상 내 눈동자는 갈 길을 잃는다.


‘혹시 내가 뭘 잘못 물어봤나’ 하는 상대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내 머릿속에는 다양한 생각이 스친다.

대부분은 상대가 가장 흥미로워할 것 같은 타이틀부터 조심스럽게 꺼내보는데, 한번 시작돼버린 내 소개는 짧게 끝난 적이 없다. 끝날 법도 됐는데 줄줄이 계속해서 나오는 나의 직업명들을 머쓱하게 내뱉으면서도 동시에 ‘저 사람은 과연 이 모든 걸 궁금해하긴 할까’ 하는 걱정을 한다.


그렇지만 전부 언급하지 않으면 뭔가 빠진 것 같은걸.


내 소개를 모두 들은 상대는 대부분 비슷한 반응들을 보인다.

‘멋지다, 그게 가능하냐, 못하는 게 뭐냐’ 등 경탄 어린 칭찬의 말을 하기도 하고,

가끔은 ‘어휴~ 잠은 주무세요? 뭐가 그렇게 욕심이 많아요’ 등 듣기 머쓱한 말을 내뱉기도 한다.


‘한 명이 여러 개의 직업을 갖는 사람’을 뜻하는 <N잡러>는 이미 보편적인 용어가 된 요즘이지만, 내 주위 사람들은 아직도 N잡러가 신기한가 보다.


특히 이런 자리에서 구구절절 자기소개는 더더욱 힘이 든다.(이미지 출처: Unsplash)


[브랜드 컨설턴트], [명상 지도 강사], [알아차림 코치], [디지털마케팅 강사], [영어강사], [뮤지컬 강사], [연극/뮤지컬 배우], [디지털 성범죄 예방 교육 강사]...


최근 6개월 동안 나를 나타냈던 타이틀이다. 이렇게 나열해 보니 뭐가 많아 보이기는 하다.


이 사회는 대체로 '직업'을 기준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정의하다 보니 마치 이것만 봐선 나는 ‘뭘 많이 하는 모호한 사람’이기 십상이다. 남들도 나도, 그 모호함이 불편해 자꾸 나 자신을 하나로 정의 내리려고 하는 그 과정이 매우 고달팠다.


저 타이틀 중 대부분은 내가 간절하게 하고 싶어서 시작을 한 건 없다. 그냥 주변에서 준 기회를 내 역량 것 최선을 다해 즐겁게 하다 보니 어느새 각각의 일들을 N년 동안 지속하게 된 것뿐이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내가 간절히 원해서 뭐가 된다기보다는,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소소한 기회들 속에서 삶의 방향이 휙휙 틀어지는 것 같다. 그때그때 찾아온 기회들을 잡기로 결정한 후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가다 눈을 떠보니 6개의 직업이 생겨버린 것처럼.

최소한 내 인생은 그렇다.


이렇게만 들으면 내가 어떤 노력도 없이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실 노력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매일이 열심이었고, 최선을 다하는 태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단지 과거의 노력은 이게 내 천직일지도 모른다는 ‘집착’과 어떡해서든 정답에 다가가기 위한 ‘애씀’이었다면, 지금의 노력은 이게 아니어도 된다는 여유 속의 ‘시도’와 얻게 된 자격 안에서 유익하고 유용한 가치를 전달하기 위한 ‘추구’ 및 ‘최선’으로 노력의 결이 바뀐 것뿐이랄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나날들. (이미지 출처: Unsplash)

꽤나 오랫동안 내 삶에는 하나의 경로가 뚜렷하게 정해져 있을 거라 믿었었다. 각양각색 모든 사람들도 그들만의 목적지를 향해 잘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나만의 길도 분명 어딘가에 존재할 거라고.


문제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쭉 빠진 대로를 수월하게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반면에, 나는 그 흔한 샛길 하나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갯속에서 한 발자국도 못 디디는 순간의 연속을 겪는다는 것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이렇게 관심사도, 해낼 수 있는 역량도 다양하니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그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낙관적인 사실이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빠른 길, 혹은 효과적인 길을 딱 하나로 정의 내리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안갯속에서 사방팔방 나다니다가 원점으로 오기 일쑤였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 따라가야 하는 정해진 길도 없다.

모두가 아는 이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제는 확실하게 알게 됐다.

그 후 난 정해진 경로를 알리는 그 내비게이션을 과감히 꺼버린다.


바라는 목표점에 ‘최소 거리’나 ‘최적 경로’라는 게 있다 할지라도, 그건 한 특정 인물만이 지나쳐온 그의 과거 길일뿐이다. 단 한 명도 그의 길을 똑같이 따라갈 수도 없으며, 그건 허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불변할 것 같았던 하나의 목표점도 언제나 바뀔 수 있다는 점도 수용한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기까지의 여정을 써 내려가 보기로 한다.

정해진 여정 말고 나만의 경로 (이미지 출처: Unsplash)


하고 싶은 게 많아 정작 하고 싶은 게 없어지는 혼란을 겪던 때, 빠른 경로에만 집착하다 보니 정작 목표점은 잃고 허상의 길목에서 안주하던 때, 사회가 잘 닦아 놓은 경로를 벗어나 결국은 이탈하여 나만의 길을 만들었던 때, 그리고 그 새로운 길을 어떻게 만들어볼까 하며 두근대는 여유 속에서 글을 쓰는 현재에 오기까지.


그저 ‘나’이기에 그릴 수 있었던 나만의 경로를 안내하려고 한다. 이것 또한 누구도 똑같이 밟을 수 없는 길이지만, 잠시 드라이브하듯 안내된 도로를 한번 주행해 보시라.


내비게이션에 등록되지 않은 수많은 여정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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