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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처럼

<소원>

by 노랑자

어릴 적 빌었던 소원은 막연한 것들이었다. "내년엔 남자친구 생기게 해 주세요". "서울대 가게 해주세요", "영웅재중 오빠랑 만나게 해 주세요" 같은, 나의 힘만으로 이루기 부족(?) 한 것들이 소위 나의 소원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이젠 제법 머리가 굵어져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목표'로, 가당치 않은 것은 '희망사항'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성인이 된 오늘날 여전히 소원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힘만으로 해결이 될 턱이 없지만 그럼에도 바라는 것이 있다면 각박한 사회가 좀 더 따뜻해지길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체운동 후 119를 부른 한 헬창의 이야기부터 지역주민의 이기주의가 교사와 공무원의 자살로 이어졌던 사건들, 나아가 이젠 분기에 한 번은 헤드라인으로 만나는 층간소음 이웃 살해사건 등. 한 해 한 해 지날 때마다 빈도와 강도가 강해진다.


어릴 때와 비교하면 사회의 연결고리가 많이 약해졌다. 더욱 밀집되어 살아가면서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졌다. 서로의 경계에 콘크리트 담장을 쌓고 넘어오면 칼로 베어버리는 세상이 되었다. 흔쾌히 지나가던 어르신의 짐을 들어드리기 왠지 꺼려지고, 누군가 흘린 지갑을 경찰서에 인계하는 것도 고소당할까 두렵다. 예전엔 내 전화번호쯤이야 누군가 알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젠 보이스피싱을 두려워하게 된다. 사회의 연결고리가 의심으로, 관심은 경계로 바뀌었다.


나의 소원은 사회와 이웃 간의 연결고리가 조금은 더 따뜻해지는 것이다. 김장김치와 떡, 과일을 주고받는 사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때 서로를 알아보고 가벼운 목례가 어색하지 않은 사이, 서로의 존재를 긍정으로 인식하는 사이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이들어 독거노인이 되더라도 나의 시신이 너무 오래 외롭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초등학교 땐, 한 달에 한번 돌아가며 서로의 집에서 반상회를 열었다. 어머니들 간 기싸움이 종종 있기도 했지만, 이웃 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고, 고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덕분에 엄마가 외출을 할 땐 우리를 돌봐줄 이웃이 있었고, 1층에서 "OO야 놀자~!!"라고 소리질러도 이해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이웃 네트워크는 단지를 넘어 한 통학구역 내에서 통했고, 학교에서도 깍두기로 다름을 존중했던 것 같다. (길동이 엄마가 춘향이 엄마와 절친이라 함부로 했다간 부모님 싸움으로 번질 수 있음을 의식했던 것 아닐까) 이젠 그런 행사를 하지 않으니 서로 더욱 남이 되었고, 고로 작은 침범에도 더 작은 눈금의 잣대를 들이댄다.


너무 도덕 교과서에서 볼 법한 소원이라 머쓱하지만, 경계를 조금 더 느슨하게 하고 지내도 되었던 과거가 그립다. 사회는 점점 각박해져 갈지언정, 나라도 나의 이웃들과 뚝배기처럼 오래오래 따뜻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우리의 마음을 뚝배기에 담아 오래도록 따뜻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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