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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승주 Dec 26. 2021

은희와 그의 시대

<벌새> (2018, 김보라) 비평적 리뷰

<벌새>는 아무도 열어주러 오지 않는 문 너머로 다급하게 엄마를 외쳐 부르는 소녀의 모습을 핸드헬드로 찍으며 시작한다. 초인종을 몇 번 눌러보던 소녀는 이내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는데, 여전히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소녀의 외침과 두드림은 점차 다급해진다. 이후 소녀의 시선을 카메라가 따라가며 사실 이곳은 소녀가 사는 1002호가 아니라 그 아랫집 902호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이어 소녀는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 진짜 자기 집으로 향한다. 그렇게 윗층에 도착해 정상적인 자기 집 문을 두드리자 그토록 절실하게 절규하듯 외쳐 부르던 엄마는 너무나 간단히 문을 열고 나타난다. 그리고 엄마는 지극히 일상적인 태도로, 소녀를 거의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소녀가 심부름한 것을 받아 안으로 들어간다.

 왜 이 장면이 굳이 인트로로 쓰였을까? 소녀(은희)의 어수룩한 면모를 보여주려고? 그런 생각은 아니었을 게다. 공부를 못한다는 속성을 제외하면 영화 전반에 걸쳐 은희가 어수룩한 아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은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 장면의 어떤 작위성을 지적함으로써 앞선 질문에 대한 더 적절한 대답으로 나아가 보자. 그러고 보면 이 오프닝 씬은 분명 작위적이다. 알고 보니 자기 집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러면 ‘902호’에선 왜 사람이 아무도 나오지 않았던 것인가? 마침 그 시간에 집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랬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어린 소녀가 복도에서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며 엄마를 외쳐 부르는데 어떻게 그 옆집에서라도 누군가 궁금함을 느껴 나와보지 않을 수 있었는가? (복도식 아파트인 은희의 집에는 한 층에 최소 7세대에서 8세대 이상이 사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작위성은 이 씬을 다소 환상 비슷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아울러 우리에게 이 장면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메시지의 압축적 전달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삽입되었음을 말해주는 듯 하다. 그렇다면 이 인트로를 세세한 컷과 미장센으로 나누어 분석하기보다는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세 개의 꼭짓점으로 통약해보는 것이 어떨까. 그러니까, 비정상-비일상 영역에서 은희의 절실한 문 두들김, 침묵으로 일관하는 일련의 입구들, 그리고 모든 위기감을 일상적 행동들의 막힘없는 연쇄를 통해 무화시켜버리는 정상성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해보겠다.


정체성


 <벌새>의 주인공 은희는 이제 막 중학교 2학년이 된, 만화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다. 영화 속에는 은희를 규정하는 어떤 정체성적 이름들이 있다. 그 가운데 초반부에서 우리의 귀를 가장 뚜렷이 잡아끄는 것은 “날라리"라는 이름이다. 인트로 직후 영화는 은희가 수업 시간에 수업은 안 듣고 몰래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 이어 선생님이 은희에게 영어 지문을 읽어보라고 시키는 모습, 은희가 더듬거리며 잘 읽지 못하고 이에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모습, 그런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잠든 은희를 보며 "야, 쟤 또 잔다. 저런 애들은 공부도 못하고 나중에 대학도 못 갈 거야."라며 수군거리는 모습 등을 보여준다. 은희는 (교칙으로 금지된) 남학생(김지완)과의 연애는 물론 스킨십도 거침없이 하며, 때론 클럽도 가고 담배도 피우는 듯하다. 이상의 행적들로 인해 은희는 담임이 학기 초 실시한 날라리 색출 설문에서 이름이 적히게 되고 만다.

 이 이야기를 담임으로부터 전해 들은 엄마는 은희가 파스를 붙여주는 동안 한탄조로 "날라리가 되면 안 된다" 이야기한다. 흥미롭게도 이어 엄마는 "날라리” 대신 "여대생"이 되라고 말한다. 엄마를 비롯한 영화 속 사람들의 언어 속에서 "여대생"과 "날라리"는 도무지 한 개인의 삶 속에서 공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누군가가 "날라리"인 동시에 "여대생"일 수는 없다. 


 복잡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이 점부터 생각해보자. 은희는 정말 담임과 친구들이 규정하는 것처럼 "날라리"일까? 그러니까 우리는 은희를 “날라리” 캐릭터로 놓고 영화를 봐 나가면 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쉬이 단정해 버리기엔 우선 영화가 은희의 일탈적 행동들을 조명하는 방식과 뉘앙스가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일단 은희가 지완과 "공부도 안 하고" "연애질"을 하는 장면마다 깔리는 그 순진하고 명랑한 음악부터가 그렇다. 또 클럽에 가고 담배를 피우는 장면도 지완이 바람피우는 모습을 목격했다든지,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한다든지, 하는 ‘불가피한’ 이유로 인해 그렇게 떠밀린 듯 연출된다. 은희에게 "날라리가 되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엄마 역시 은희가 정말로 "날라리"라거나 혹은 그 정도로 성격에 문제가 있는 아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단 그저 담임선생에게 그런 소리를 듣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이 더 담겨있는 듯하다.

 사실 "날라리"를 규정하는 담임의 정의부터가 상당히 의아하다. “담배 피우는 것들", "공부 안 하고 연애하는 것들", 심지어는 "노래방 가는 것들" 정도가 정말로 "여대생"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이른바 "날라리"의 충분조건이란 말인가? 더욱 기이해지는 지점은 담임이 아이들에게 설문을 위한 종이를 나눠 주며 반드시 날라리의 이름을 일괄적으로 2명씩 적어내라고 하는 부분이다. 학기 초로 보이는 시간적 배경에서 미루어 짐작컨데 담임의 이러한 지시는 언제 어느 반에서든 "날라리"가 반드시 2명은 있다’는 말인 것처럼 들린다. 정말 담임의 생각처럼 어느 반에나 날라리가 2명씩은 있다면, 그것은 예외적 존재인 날라리가 반에 들어온 것인가 아니면 반이라는 공간이 날라리를 2명 정도 반드시 만들어내는 것인가? 이 ‘날라리 역설’은 20세기의 문화철학자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2015)를 떠오르게 한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1퍼센트를 희생양으로 삼는 전체 빼기 하나의 과정을 통해 나머지 99퍼센트가 안정을 이루는 희생양 제의에 관해 이야기했다. 혹여 문제시되는 그 1퍼센트가 99퍼센트의 공격을 견디다 못해 어느 날 제 존재를 철수해 버리더라도 아무 문제없다. 남은 이들은 또다시 그 안에서 1%를 찾아내 공격함으로써 그들을 제외한 평화를 이룩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소 궤변처럼 보이는 이러한 생각의 연쇄는 은희의 "날라리"라는 정체성이 실은 시대와 공간의 욕망으로부터 덮어씌워진 정체성임을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즉 "날라리"는 담임의 구령에 맞춰 모두가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를 외치던 바로 그 시대와 그 공간이 만들어낸 정체성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사실 <벌새>는 여기저기에서 끊임없이 사회구조의 문제를 건드린다. 그런데 <벌새>의 또 다른 특징은 이른바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그 구조적 문제의 책임소재를 가리기 대단히 난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당장 은희의 집만 봐도 그렇다. 언뜻 대단히 억압적인 환경인 것 같고, 또 은희가 표현했듯 "콩가루" 집안인 것 같이 보이기도 하나, 영화의 초반에 가족 모두가 새벽같이 나와 함께 떡을 만들어 팔고 이후 집에서 그날의 매상을 다 같이 세는 모습은 사업이라는 형태를 중심으로 한 가족의 생활 연대를 보여준다. 이 장면은 이 가족을 그저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이고,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고통받는 가족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한 생각도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가령 아빠(정인기)는 공부를 안 하고 놀러 다니는 딸 수희를 야단치며 "나가 뒈져 멍청한 년아"라고 하고(거칠 다기보단 다소 답답해하는 어조로) 아내의 오빠가 어딘가 깊은 고민을 안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불쑥 찾아와 뜻 모를 말을 늘어놓다 돌아갈 때도 아내에게 "당신 오빠 이제 정신 나갔어, 지금 몇 신데..."라는 폭언을 늘어놓기는 하나 어찌 됐건 이들에게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 적은 없다. 가정 내에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오빠 대훈인데, 아빠는 대훈이 은희를 때리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하자 대훈을 거칠게 밀치며 "무슨 짓이냐"라고 대훈을 야단치기도 했다.

 더욱이 아내의 오빠가 죽었을 때 장례식장 가는 길에서 그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아내를 쳐다보던 애처로운 시선, 은희가 목에 난 혹을 제거하기 위해 수술을 해야 함을 알았을 때 그가 애통해하며 소리 내 울던 모습 등을 생각하면 그는 사실 대단히 인간적인 사람인 것 같다. "3동 7층에 사는 여자"가 "우리" 집의 고춧가루와 들기름에 대해서 어쩌고저쩌고 했을 때도 그렇다. 그때 그가 "썅년"등의 욕설까지 섞어가며 "우리 집 고춧가루는 대한민국 최고의 고춧가루"라고 언성을 높였던 장면은 (그것이 대훈이 은희를 때린 장면 뒤에 배치되지만 않았다면) 가족의 사업을 공격한데 대한 그 나름의 격렬한 변호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후 아버지의 눈물을 통해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서 은희도 영지에게 우리 집 떡은 "최고급 쌀"을 쓴다며 비슷한 자랑을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보기 시작하니 영화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구조에 대한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성수대교 붕괴 사건에 대해서조차 누군가는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벌새>에서 숙희는 성수대교의 붕괴라는 '구조적 재난'으로 인해 죽을뻔한 위기에 처했지만, 버스를 늦게 탄 탓에 목숨을 건졌다. 여기서 흥미롭게도 영화는 은희가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티브이를 통해 접하자마자 다급히 아빠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을 어떠한 부연 설명도 없이 제시함으로써 관객들이 영화 극 초반부에 나왔던, 아빠가 숙희를 야단치며 "대치동에 살면서 공부를 못해서, 고등학교 떨어져서 강북에 있는 학교나 다니고"라고 말했던 그 장면을 향해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도록 만든다. 이 초반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의 중간에 은희네 가족의 사는 곳이라든지 숙희가 다니는 학교 등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제시되지 않는 만큼 영화는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이미 상당히 흐릿해졌을 그 짧은 장면에 대한 기억을 애써 되살리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명백히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동된 적극적 의식을 가지고서 누군가는 심지어 ‘말마따나 숙희가 대치동 같은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강남의 학교에 다녔으면 애초에 그런 위험에 휘말릴 일도 없었겠다’라는 당혹스러운 생각조차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봐도 될까? 영화는 어떤 찝찝함을 남긴다. 기억을 다시 더듬어보자. 그러고 보니 대훈이 은희를 때리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했을 때 아빠가 대훈을 밀치며 내뱉은 정확한 말은 "어딜 감히 아빠 앞에서 동생을 때려"였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빠가 보지 않는 곳에선 때려도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강북의 학교에서 공부한다는 사실이 성수대교 붕괴 같은 사고의 희생자가 되는 것에 아주 약간의 정당성이라도 부여해주는가?


언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보자. 은희 아빠라는 개인이 그 시대적 한계를 고려했을 때 상대적으로 무척 인간적인 사람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마음을, 그리고 개인의 마음 간의 소통을 가로막고 왜곡하는 것은 구조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구조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다시 한번 자세히 보자. 영지가 마지막으로 건넨 편지와 선물에 대한 은희의 답례는 구조적 재난이었던 성수대교 붕괴로 인해 끝내 전해지지 못했다. 어쩌면 필사적으로 마지막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던 것일지 모르는 외삼촌의 마음은 매부(은희 아빠), 동생(은희 엄마), 그리고 그 자식들(은희, 숙희 등)과 나누기에 적절한, 가장 의례적이고 가장 ‘정상적인’ 언어들 안에서 하염없이 맴돌았다. "우리 숙자가 머리가 참 좋았거든", "그냥 곧 숙자 생일도 다가오고, 들러봤어." (은희에게)"니가 몇 살이지?" 이윽고 그가 은희네 집에서 나가자 그다음의 꽤 긴 정지 컷에서 화면은 그가 나간 현관문을 정중앙에 두고 엄마와 아빠는 왼쪽의 부엌과 거실로, 은희와 아이들은 오른쪽에 있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타이틀 직후의 학교 복도 장면에서 담임이 아이들을 줄 세우곤 거듭 외쳤던 것과 '우연치고는 너무나 유사하게' 각자 "왼쪽"과 "오른쪽"의 자기 자리를 분별해 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은희 외삼촌)가 막 나간 현관은 조명의 센서 시스템에 의해 켜진 빛을 얼마간 유지하다 이내 암전한다. 이 장면을 영화는 꽤 오래 보여준다.


 외삼촌의 잘 봉합된 ‘정상적' 언어들을 누구든 순간적으로 깨고 들어갈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누구든 외삼촌이 그 ‘정상적’ 언어를 타고 미끄러져 빠른 속도로 사라져 버리려는 것을 중간에 붙잡을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러나 ‘정상성’의 틈새로 불쑥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여기서 <벌새>의 주인공 은희가 특별해지는 것 같다. 은희는 그 어려운 일을 간혹 해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스스로의 힘으로, 또 많은 경우 영지 등을 만난 성장의 결과로 말이다.


 은희의 혹을 진찰해준 의사는 큰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특별히 큰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고 단지 “큰 병원에 가야 더 정확히 진찰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그저 은희에게 제공된 ‘잘 봉합된’ 설명이다. 또 은희의 조직검사는 "왜 이제야 왔"느냐는 의사 자신의 말로 미루어 보건대 최대한 빨리 진행되어야 하는 것임이 분명함에도 "문서화된 부모의 동의"가 없다는 이유로 다음 주로 미루어진다. 그러나 이때 은희는 의사의 잘 봉합된 설명을 그냥 듣고 넘기지 않고, 그럼 지금 엄마한테 한번 전화해보시면 안 되냐며 불쑥 끼어든다. 그리고 그 결과로 (중학생에게는 다소 무서운 일일 수 있는) 생살을 째는 조직검사를 바로 얻어낸다. 


 그러나 그런 은희조차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있다. 은희가 그것을 표현할 언어 자체를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럴 때 은희는 대개 침묵을 택한다. 가령 대훈이 자신을 때렸던 사건은 두 가지 방식으로 공적 언어화되는데, 첫째는 은희가 식탁에서 먼저 꺼낸 "김대훈이 저 때렸어요."라는 말이고 두 번째는 이 말을 듣고 엄마가 내뱉은 "그러니까 너네들 싸우지 좀 마"라는 말이다. 사실 이 둘은 모두 대훈이 은희를 구타한 사건에 대한 적절한 표현일 수 없다. 은희의 말도, 엄마의 말도 모두 ‘싸웠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의 본질은 은희가 대훈의 구타에 대해 ‘싸우지 못했음’에 있으며 이 뉘앙스는 이후 옥상에서 지숙이 은희에게 “니네 오빤 주로 어떻게 때리냐”라고 했던 말속에서만 정확히 표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은희는 아직 가족의 식탁이라는 공적인 영역에서 이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알지 못하고 그렇기에 침묵을 택해야만 했다. 


 유리와 은희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은희와 유리는 손을 잡고 걸어가다 지완을 마주치고, 지완은 "친구랑 이야기 끝날 때까지 놀이터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유리는 "친구 아닌데요"라 말하고 지완은 곧바로 "아 후배구나"라고 자신의 말을 정정한다. 그러나 "친구"도, "후배"도 은희에게 유리가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설명해주지 못하는 말이다. 그러나 은희는 그것이 아닌 어떤 말을 알지 못하기에 또다시 침묵할 수밖에 없다. 유리가 은희의 병문안을 온 병실에서도 이 상황은 똑같이 재현된다. 


 정상적인 언어 안에 쉬이 머무르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들의 안에는 그 낙차에서 발생하는 균열들이 차곡차곡 축적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축적된 것은 어떻게 실체화할까. 단순히 분노라는 형태로 실체화되기는 오히려 어려운 게 아닐까. 분노는 적어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무어라 규정하거나 형상화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일어날 수 있는 감정인 게 아닐까. 그 균열들은 오히려 감정 이전의 상태로 남아 ‘이상한' 사람들의 몸을 아프게 하거나, 혹은 극도로 달아오르게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은희는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라는 구령을 복창시키던 담임에 대한 짜증에 친구와 함께 방방을 뛰며 “다 지랄같애!”라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웃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성수대교가 무너진 뒤 식탁에서 소리 내 우는 대훈의 모습을 어찌할 바 모르겠는 눈빛으로 지켜보고서 거실에서 뽕짝 버전의 <여러분>을 들으며 춤을 추었던 것이리라. (택배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연 은희의 표정을 보면 이때의 감정이 그래도 분노에 조금 더 가깝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은희의 아버지도 정상성(가정)의 맥락에서 일탈한 행동(카바레?)을 할 때 바로 그 노래에 맞추어 비슷한 춤을 추지 않았던가.


정상이라는 이름의 일상


 <벌새>에서 나에게 지극히 한국적으로 느껴진 장면들을 몇 개 꼽아보고 싶다. 첫 번째는 형형색색의 빛과 신시사이저 음악으로 가득 찬 클럽에서 정신없이 춤추는 은희를 향해 다가온 후배들이 (그들처럼 앳된 중학생에 불과한 은희에게)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허리 숙여 ’안녕하세요'라 인사하는 장면. 두 번째는 병원에 가는 딸이 가방에 만화책을 담는 것은 자연스러워도 거실 찬장에 들어있는 양장본 고전문학을 가져가는 것은 이상하다는 듯 아빠가 "그건 왜"하고 묻는 장면. 이 장면은 마치 그건 가구인데 왜 꺼내냐는 듯한 뉘앙스가 담겨있어 재미있다. 세 번째는 병실에서 김일성의 사망을 알리는 뉴스 보도가 나오자 TV를 보던 환자들이 전쟁이 나는 게 아닐까 걱정하면서 "어머 난 김일성은 안 죽을 줄 알았지", "만세를 불러야 돼 어떻게 해야 돼."같은 말을 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로 은희의 엄마와 아빠가 숙희의 문제를 놓고 말 그대로 ‘피 튀기는’ 부부싸움을 한 다음 날 아침, 태연히 함께 텔레비전을 보며 웃는 장면.


 이 네 번째 장면은 또한 <벌새>가 실제 삶의 언어라고 하는 것을 얼마나 정확하게 옮겨내고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밤늦게 나가 돌아다니던 숙희를 발견한 아빠가 이게 다 제대로 신경을 안 쓴 당신 때문이라며 엄마를 탓하는데 이에 엄마도 지지 않고 당신이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느냐며 가게를 내팽개치고 어디를 다니는지 다 알고 있다고 몰아붙인다. 이때 성질을 못 이긴 아빠가 엄마를 위협하자 엄마는 전등을 들어 아빠를 내려친다. 아빠의 팔에 피가 흥건하게 난다. 이때 은희 아빠의 눈에 어린 '당혹스러운 표정', 그러나 당혹스럽기는 은희 엄마도 마찬가지다. 비교적 빨리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판단한 은희 엄마의 입에서는 연이어 세 마디 말이 내뱉어지는데 그것은 1. "니네 발 조심해" 2. "방에 들어가" 3. "빨리 응급실 가요"다.


 당혹과 일상은 사실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개인이 사유와 행동을 편안하게 넘나들 수 있는 영역을 의미하는 게 일상이라면 이 편안한 영역을 넘어서는 상황의 육박에 개인이 느끼는 충격감이 바로 당혹이기 때문이다. 부부싸움 도중 은희 엄마가 은희 아빠의 팔에 전등을 내리치고 나서 둘의 얼굴에 어렸던 그 당혹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으리라. 또 다른 당혹은 지숙과 은희가 문구점에서 물건을 훔치다 걸린 장면에서 나타난다. 이때 가게 주인의 추궁에 두려워진 지숙이 은희네 집의 가게를 불어버린 것은 명백히 충동적인 것이었고 이 두 중학생은 그런 충동적 발화를 해석할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으리라. 상처 받은 은희를 뿌리치고 도망치던 지숙이 내뱉은 “너 미친 거 아니야”라는 말 역시 그래서 당혹의 표현이다. 


 당혹에 사로잡혀 있는 행위자들은 자신의 행위를 해석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쩌면 시간이 필요한 건 그 행위자들 뿐만이 아닐 수 있다. 사실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모든 예외적 사건들은 우리에게 이를 해석할 시간을 내도록 강제한다. 성수대교의 붕괴라는 예외적 사건이 그러했듯. 우리는 때로 이러한 예외적 행위를 일부러 저지름으로써 타인들에게 해석의 시간을 내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성격이 나쁘다는 부모들의 질책에 은희가 괴성을 지르며 절규했듯. 


그리고 은희에 대하여


 그리고 은희에 대하여 생각해볼까. 은희의 성장에 대하여. 외삼촌이 죽었을 때 은희는 소중한 사람을 상실한 엄마의 마음을 얼마나 공감할 수 있었을까. 아마 관념적 이해를 넘어서는 수준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 순간에 은희는 지완이 자신에게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것에 더 신경이 쓰여, 지완에게 음성 메시지를 통해 ‘며칠 전에 찾아왔던 외삼촌이 오늘 돌아가셨다는 것’을 하나의 이야깃거리처럼 전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후 은희는 지완으로 인한 실연의 아픔도 맛보고서, 엄마의 아픔에 약간 더 다가가게 된 것 같다. 집에 돌아온 은희가 누워있는 엄마의 헤진 양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것을 보니 말이다. 이후 은희는 숙희가 죽을뻔한 일도 겪고, 대훈의 어떤 슬픔도 옆에서 지켜보고, 이어 지완과 완전히 결별도 하면서, 후반부에서는 엄마에게 ‘엄마는 외삼촌이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을 정도로 엄마의 마음에 더 공감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자신의 상실감을 토대로, 어머니의 더 큰 상실에 접근하게 된 은희의 성장이다.


 시대적 불운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럽게도 은희의 성장을 조력하는 존재들이 여럿 있다. 나는 우선 은희를 배려하는 영화의 시선을 간단히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은희가 자기 목에 만져지는 혹을 다른 사람들에게 봐달라고 부탁할 때, 이 다른 이들이 은희의 목을 만지는 세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 내 눈에 띄었다. 첫 번째로 은희의 목을 만진 것은 지완이었다. 그는 꼼꼼하게 살피고 만지지만, 여기에는 부득불 약간의 성적인 뉘앙스가 덧붙여지는 것 같고 이 느낌은 이후 은희가 지완을 데려가 키스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데서 확증된다. 지완이 은희의 목을 만지면서도 거기서 혹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 역시 이와 관련이 있을 테다. 그다음으로 은희의 목을 만지는 것은 엄마인데, 엄마는 지완보다 훨씬 짧은 시간을 잠깐 만져보고 바로 이상한 징후를 느낀다는 점에서 더욱 대비가 된다. 마지막으로 은희의 목을 만지는 것은 의사다. 이때 카메라는 진료실 구석 먼 곳에서 위치해 사실상 은희의 모습은 중간의 게시판으로 인해 거의 가려진다. 나에게는 이것이 의사가 은희를 진찰하는 동안 은희의 목이 만져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하려는 섬세한 영화적 배려로 읽혔다. (의사에게 큰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말을 듣고 돌아가는 길에, 은희는 저 멀리서 엄마가 위쪽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은희는 엄마를 거듭 부르지만 엄마는 들리지 않는지 더욱더 멀리 가버리는데, 이 장면은 자연히 은희가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엄마를 불렀던 인트로와 오버랩된다. 어쩌면 가장 먼저 은희의 곁을 떠나게 되는 건 엄마일지도 모른다. 가장 피로하고, 가장 힘든 위치에 있는 사람들. 영지가 그러했듯이.)


 물론 영화에서 은희의 가장 큰 조력자는 영지다. 밤늦게 학원에 불쑥 찾아온 은희와 함께 은희의 등굣길을 걷는 영지. 그러고 보니 은희의 등굣길에 걸려있는 재개발 생존권 투쟁 현수막은 지금껏 계속해서 관객의 시선에 노출되어왔다. 집을 빼앗기게 된 그들에 비해, 이러한 집이라도 있는 은희는 행복한 것일까. 그러나 영지는 ‘함부로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마’라며,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데, 영지가 은희를 이끌어주는 듯한 이 장면은 둘이 함께 천변을 걸어가는 시퀀스에 이어 아름다운 추억으로 형상화된다.


 은희가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한 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영지는 한 번 더 찾아오는데, 이 장면에서 영지는 결정적으로 은희를 이끌어준다. 거기서 영지는 은희가 어쩌면 심각한 장애를 안겨줄지도 몰랐던 이 혹을 발견하고, 다행스럽게도 이 혹으로부터 겨우 벗어날 수 있었던 이 사건은 지금껏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그 일상성이라는 것을 의심해볼 계기라는 듯이, 일종의 예방주사라는 듯이 은희에게 “이제 맞지 마”라는 말을 건넨다. 그리곤 은희에게 앞으론 어떤 경우에도 맞서 싸우겠다는 다짐을 받아낸다. 영지와 은희의 밤 산책 못지않게 아름다운 이 장면에서 은희는 분명 어떤 성장을 이룬 듯하다. 병실 사람들의 따듯한 격려를 받고 떠나는 은희를 반주해주던 배경음악은 은희가 홀로 귀가해 텅 빈 집의 베란다를 응시하는 장면과 함께 희미한 장 7도 소리로 맺어진다. 은희는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집을 바라보게 된 것 같다. 


 은희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던 숙희가 자신의 당혹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가진 뒤 말없이 한문 학원에 돌아왔을 때, 영지는 토라진 아이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것은 <잘린 손가락>이라는 민중가요였는데, 고통도 애환도 많은 삶이라는 것 그 자체를 노래하는 그 맥락이 은희와 숙희에게 전달이 될 리는 만무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것은 분명 은희가 숙희로부터 받은 상처를 바라보는 무게감에 값하는 것이기는 했으리라. 영지는 그것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한 걸음 떨어진 채로 봤을 때 은희와 숙희라는 두 꼬마 단짝의 토라짐에 그 무거운 음악을 배경처럼 깔아주는 광경이 아무래도 우스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지는 이내 노래를 멈추고 웃어버리는데, 이 웃음은 한편 마지막 컷에서 영지 없이 앞으로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은희의 눈빛의 무게감을 덜어주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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