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를 떠나 세상을 놀이터로

영화 <이사>와 <친밀함>, 정체성의 근원으로 돌아가다

by 노규오 noirora

영화 <이사>를 보고,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나와 마주했다. 아직 품에 안지 못한 조각들, 애써 눈을 돌려온 기억들이 다시 빛을 비췄다. 소녀 렌이 환한 시선으로 가족을 바라보며, 관계와 일상의 파동 속에서 끝내 자신을 선택하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던 순간들.



마지막 시퀀스에서의 기이하고도 차디찬 밝음, 그녀는 허리춤까지 바닷물에 잠긴 채, 난파된 것 같은 황량한 섬을 뒤로하고, 어느 고독 속 수평선 너머로 손을 흔들며, 밤새도록 방긋 웃는 얼굴로 축복을 건네는 의식 같은 장면은 처절하면서도 묘한 저림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의지의 발걸음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는 모습 같았고, 내 어린 날의 발자국과 포개어지듯 스쳐갔다.



난 해남 섬 땅끝마을에서 온 부부의 장녀, 반복된 이사 와 잦은 이별, 깊었던 애정 때문에 더 크게 다가왔던 상실감들. 나는 마치 둥지를 떠나 또 다른 둥지를 찾는 새처럼, 온 세상을 놀이터이자 배움터로 삼으려 했다.


그 길 위에서, ‘옳다’고 말하는 곳에서는 위선과 억압의 공기가 숨을 막았고, ‘아니다’라고 말하는 곳에서는 오히려 숨통이 트였다. 그곳에는 자기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결국 균형이었다.


나라는 사람의 무게 추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내 주변 누군가는 다친다. 나는 늘 그것을 의식하며 삶의 방향성을 조율해왔다.



상황이 어려워져도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유형이든 무형이든 나만의 베이스캠프가 필요하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그래서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기록하고, 흐름을 타면서도 의식적으로 중심을 붙잡으려 애썼다.



아빠는 늘 그러셨다.


“그래도 꿈을, 언젠가 올 사랑을 믿어라.”


그 말은 어둑한 시기마다 나를 계속해서 걷게 해주었다. 그것은 선택지가 없을 때에도 새로운 선택지를 만들게 했고, 없는 곳에서 있는 것을 찾아내고자 하는 소명과 같은 의지였다.



그 의지는 창작의 근원이 되었다.


아키라 구로사와 감독의 말처럼 “과거를 기억해야만 미래를 그릴 수 있다.”



돌아보면 그렇다. 이미 지나온 발자취에 답이 있다. 생각보다 많은 것은 반복된다. 그래서 나는 늘 등을 돌린 채 과거를 응시하며, 내가 지금 이곳에 왜 있는지를 반복적으로 되묻고 뒷걸음질로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 같았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친밀함>을 보았다. 네 시간 반 긴 러닝타임 속 인물들의 장면과 대사, 감정선에 몰입해 끝까지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무대 위와 무대 밖에서 얽히며 관계를 직조한다. 카메라의 시선 속에서 현실과 연극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흐름은 파도처럼 이어진다.



그 속에서 오래 머물렀던 장면은, 변하게 하려는 갈망과 변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맞부딪히는 긴장감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바꾸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고, 끝내 바꾸지 않으려 했던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보이지 않았던 삶의 큰 방향성들이 서로 달랐지만, 함께하고자 해서 일어났던 것이었으며, 그렇게 그때의 시간 속에 울타리처럼 새겨져 남은 것 아닐까.



동굴 속에서 모스부호를 익히듯 지내온 시간이 있었다. 그러다 서서히 빛을 보고 산들바람을 느끼며 온기가 충전이 되면, 다시 촉촉한 시선으로 감정을 바라보게 되었다. 온 힘을 다해 모든 것들로부터 치열하게 느끼고 사랑하고 바라보고 포화상태가 되면, 또다시 우주로 떠났다가 그것들을 비워내고 사유로 채워내며, 함께하고자 돌아올것이라며,,


2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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