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물 주기 [녹마]

2020. 05.12

by 잠긴 생각들

네가 들으면 놀라겠지만, 나 오늘 집 근처 마트에 가서 토마토랑 달걀, 양파를 샀어. 내일 아침으로 토마토 스크램블 에그가 먹고 싶어서. 사실 아침이 될지, 저녁이 될지는 알 수 없어. 항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플랙시 베지테리안으로 살고 있다가, 내일부터는 진짜 락토 오보부터라도 시작해보자 싶어서도 있고, 내가 최근에 본 미드에서 아침식사로 대충 휘휘 저은 스크램블 에그를 먹는 장면을 너무 많이 본 탓도 있어. 그게 그렇게 맛있어 보이더라. 검색창에 '토마토 스크램블 에그'를 검색하니까 역시나 백종원 선생님의 레시피가 제일 상단에 떴어. 이른바 '백종원 레시피'에는 액젓이랑 대파가 필요했지. 그런데 요리와는 담쌓고 사는 나는 집에 액젓이라는 걸 키울 리가 없고, 대파는 뭔가 커다래서 집에 모셔놓기가 부담스러웠어. 결국 과감히 백종원 레시피를 포기하고, 어쨌든 '파'는 '파'니까, 양파로 대신했다. 나는 요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스크램블 에그를 할 때도 지난한 숙고의 과정이 필요한데 너라면 어땠을까? 아마 냉장고의 남은 달걀을 보고는 대충 스크램블 에그라도 해 먹자, 하면서 간단하게 시작할 수 있겠지. 그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 이러다가는 정말 몇 년 안에 당뇨라도 오는 거 아닐까 싶어서 무섭기도 해.




최근에 내 생일이었잖아. 그 날 정말 예상치도 못한 친구한테 메시지가 왔어. 너한테도 말한 적이 있었던, 3년 전에 연락이 끊긴 내 초등학교 동창인 주라 (가명) 한테 말이야. 내용인즉슨, '생일 축하하고, 이번 주 토요일에 같이 밥이라도 먹자'는 거였어. 게다가 선물까지 보내줬더라. 나한테 주라는…… 아무렇게나 엉켜버린 목걸이 같은 존재였어. 어쩌다 그렇게 엉켜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올려보니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뭉쳐져 있어서 서랍 한 구석에 방치해두고 있었던.


3년 전 주라의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을 즈음을 기억해. 아니, 사실 주라가 나한테 서운하다고 메시지를 보냈을 때 내가 느꼈던 짜증스러움을 기억해. 나는 자신에게 신경을 써달라는 주라의 호소를 무시해버렸던 거야.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어. 주라의 생일에 내가 '생일 축하한다 ㅋㅋㅋ'라고 메시지 하나를 띡 보냈을 때, 그러고 나서 같은 날 생일이었던 고등학교 동창에게는 SNS로 장문의 생일 축하 글을 써주었을 때 주라가 느꼈던 서운함을. 주라와의 약속을 바로 전날 아무렇지 않게 취소해버리는 나의 무례함을 혼자 감내해야 했을 주라의 마음을. 그렇게 나와 주라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게 됐고, 나는 그 이유를 몰랐어.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 같아. 나의 고질적인 회피 성향이 어김없이 발동했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내 행동을 솔직하게 돌아보게 됐을 때, 나는 주라에게 미안해서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어. 주라는 나와는 정말 다른 아이였고, 그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울 때도 많았지만 힘든 중학교 시절을 살만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친구이기도 했거든. 한때는 내가 학교 시험이 끝나고, 크리스마스에, 그리고 새해 첫날에 언제나 함께 하고 싶은 친구이기도 했고. 주라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어.


오랜만에 만난 주라는 거의 변한 게 없더라. 목소리가 큰 것도, 가슴께까지 오는 긴 생머리도, 까무잡잡한 피부도. 민망하면 말이 많아지는 것까지. 치킨을 안주 삼아서 생맥주를 마시면서 그간 뭐하고 지냈는지 얘기했어. 심지어는 언제부터 페미니즘을 접했는지도 얘기했으니까 별의별 말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지. (주라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페미니스트로 살고 있더라고.) 그리고 우리 우정의 공백에 대해서 얘기했을 때는, 난 정말로 나 자신이 부끄럽고 주라에게 미안해서 할 말이 없었어. 주라는 정말 많이 울었대. 내가 쫓아오면 주라가 도망가는 꿈도 많이 꿨대. 꿈도 꾸지 않고 울지도 않은 내가 싫었어. 화해를 하면서 주라와 테이블 위로 악수를 했는데, 내 손은 지나치게 차가웠고 주라의 손은 지나치게 따뜻했어. 따뜻함에 지나친 게 있나? 아무튼. 우리는 이만큼이나 다른 사람이야. 심지어는 MBTI도 정반대지. '그래서 그렇게 많이 싸웠나 봐' 하면서 깔깔 웃었어.


한 달 전부터 우리 집에 화분이 몇 개 생겼거든? 식물 가꾸는 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부모님이 선물해준 거라서 아무 생각 없이 두고 가꾸기 시작했어. 어떤 애는 한 달 주기로 물을 줘야 하고, 어떤 애는 얼마나 말라있는지 잘 살펴보고 자주 물을 줘야 해. 어찌 됐든 썩진 않을까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 타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을 수는 없어도, 잘 가꾸고 싶다면 그만큼 노력을 해야 해. 너랑 나처럼 다정함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쿨한' 관계라 할지라도 말이야. 나는 지금까지 올 사람은 오고 갈 사람은 간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았지만, 그건 그저 소중한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은 방어적인 마음이 아니었을까? 주라는 나를 이해한다고 해줬어. 자기도 나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었대. 나는 익숙하게 옆에 있어주는 사람의 소중함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 오늘은 부모님한테 먼저 안부 전화를 하려고 해. 아빠가 하는 술타령이 너무나도 지겨워도. 자신과의 관계에도 물을 주고 잘 가꿔줘야지, 그래야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