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리지 않은 매듭을 당당히 걸고서 [아루쿠마]

2020. 05. 13

by 잠긴 생각들

너의 스타트로 드디어 우리 교환일기의 첫발을 딛게 되었네. 좋은 스타트로 시작해줘서 고맙단 말을 먼저 건네. 이제 첫걸음일 뿐이지만 벌써부터 이 교환일기를 주고받자고 제안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사실은 내일이나 모레쯤 생각을 더 정리한 후에 글을 쓸까 고민했어. 그래도 역시 어떤 글이든 처음 접했을 때의 감정이 가장 강렬하다는 생각에 글의 첫인상이 휘발되기 전에 조금은 두서없고 빠른 답변을 보내.


내가 최근 읽은 책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임경선 작가와 서점 주인 겸 작가 겸 뮤지션인 요조의 교환일기지. 글의 형식이 일기이기 때문일까?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재미(?)에 정말 후루룩 읽어버렸어. 책장을 덮자마자 너에게 ‘우리도 교환일기 써보자’는 제안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 나답지 않게 별 걱정 고민도 없이 먼저 해보자고 제안했지. 너와 있을 때 내가 자주 그런다고 생각해.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머릿속에서 몇 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쳐 고민했을 일도 너한테는 가볍게 툭 뱉어보게 돼. 그러고는 돌아보면 어느새 그걸 함께 하고 있어. 우리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잠긴 생각들'도 같은 맥락에서 표면적으로는 네가 먼저 제안한 것이지만, 사실상 너를 팟캐스트의 세계로 끌어온 내가 제안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네. 지금은 (현재 기준) 108명의 구독자들과 함께 하는 어엿한 팟캐스터로 나아가는 중이고 말이야.


출근길 버스에 올라 너의 글을 읽으면서 주라와 네가 테이블 위로 손을 맞잡는 장면을 떠올리고 왠지 눈물이 핑 돌았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감정적인 사람이잖아. 주라와의 학창 시절 추억, 정반대의 두 성격이 복잡하게 얽힌 갈등, 그리고 결국 몇 년이 흐르고 난 뒤 두 사람이 다시 손을 맞잡는 과정을 읽으며 따라오다 보니 어딘가 마음 찡해지는 단편 소설을 읽는 것 같았어. 주라와의 일 외에도 요즘 네가 너 자신과의 관계, 자주 함께 하는 주변인들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보여. 네 말대로 특히 관계에 있어서 방어적인 네가 그들을 소중히 여기려 노력하겠다 결심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나 최근에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했잖아. 그래서 요즘 다이어트를 뿌리로 해서 가지를 뻗어나가는 고민들을 많이 하고 있어. 탈코르셋을 완전히 하지 못하는 나에게 실망하고, 오히려 그런 완벽주의와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에게 또 실망하고... 생수 페트병을 버리면서 완벽한 분리수거를 위해서는 라벨과 뚜껑 페트 몸체와 거기 끼여있는 링까지도 분리해서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상기돼. 야채를 많이 먹으려고 노력할 때면 인간으로 인해 고기로 태어난 동물들에 대해 생각해. 페미니즘도 비거니즘도 환경운동도 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운동들이잖아.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관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의 완벽주의 성향은 나를 더 힘들게 해.


페미니즘을 시작으로 여러 사상에 대해 알아보고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언제나 생각이 많은 나조차도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지식이 뇌 안을 헤집고 들어와 어지럽히는 게 낯설고 어려워. 그럴 땐 마치 네가 주라와의 관계를 비유했던 단어처럼 나 스스로가 ‘엉켜버린 목걸이’가 되는 거지. 나는 이 목걸이를 미치도록 풀어내고 싶어 용을 쓰다가도 내가 해내기엔 어렵다는 생각에 주저하길 반복해. 결국 현재 나는 풀고 싶은 만큼의 매듭만 풀어낸 다음에, 아무리 해봐도 풀어낼 엄두가 나지 않는 매듭은 일단 그대로 두겠다고 다짐해. 완벽하지 않은 이 목걸이를 목에 걸고 당당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거리를 나서고 싶어. 누군가는 그 목걸이에 대해 평가하려 하고 나를 비난하려 들지도 모르지. 그건 틀렸다고. 그래도 나는 자유롭고 싶어. 내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길고 길게 환경과 약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고 싶어. 네가 전에 전해줬던 말처럼, 젊은 날의 패기로만 남기지 않고 천천히 아주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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