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5. 20
왜 과제나 업무는 카페에서 돈을 쓰면서 해야 제대로 시작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미 그렇게 버릇이 들어버렸나 봐.
그래도 오늘은 카페에서 글을 쓰는 게 별로 돈 아깝지가 않아. 날씨가 엄청 좋거든. 최근 이틀 동안은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구름이 뭉게뭉게 떠있는 거 말고는 하늘색이 선명한 파란색이야. 난 오히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보다는 폭신해 보이는 구름이 좀 떠다니는 게 더 보기 좋더라. 아침으로 엄마가 만들어 준 반건조(?) 고구마를 먹었어. 말하자면 고구마 말랭이 같은 건데, 내가 고구마나 옥수수, 감자 같은 구황작물에 환장하는 거 너도 알지? 원래 오늘은 집에서 넷플릭스 '셀링 선셋'을 보면서 여유롭게 교환일기를 쓰려고 했거든. 그래서 살짝 촉촉하면서도 고소하고 달달한 반건조 고구마를 배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집어 먹으면서 '셀링 선셋'을 보다가, 문득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봤어. 사실 그대로 꼼짝 않고 집에 있을라치면 기꺼이 그럴 수 있었어. 아침에 일어나서 청소하고 씻은 거 빼고는 딱히 한 일도 없었고, 배 위에 반건조 고구마도 있겠다, 게다가 내가 기대 누워 있는 폭신한 소파베드의 아래쪽엔 우리 집 막내 고양이 뭉치가 웬일로 평화롭게 누워 자고 있었거든.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었지. 그런데 그렇게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너무 파란 거야. 만약 내가 오늘 이 상태로 집 안에만 있는다면 이 파란 하늘과 적당히 따뜻한 햇살이 우리 집 창문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보일지 전혀 알 수가 없겠구나 싶었어. 노을이 질 때쯤 되어서야 '아, 참 아까운 날을 버렸구나' 하면서 아쉬워하기나 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까 도저히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없었던 것 같아. 바로 벌떡 일어나서 대충 옷을 꿰어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노트북만 챙겨서······.
바로 이렇게 카페 의자에 앉아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고 있어. 이 카페는 위치도 괜찮고 의자도 푹신해서 편하긴 한데, 공용 와이파이가 불량이고 노랫소리가 너무 크네. 그거 말고는 만족하고 있어.
내가 휴학을 결정한 이유는 갑작스럽게 맡게 된 과 부학생회장이라는 직책과 격변하는 내 주변 상황으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서기 위함이었어. 좋든 싫든 처리해야 하는 일들에 이리저리 치여 헝클어진 마음으로는 더 이상 내 미래를 위한 공부를 진행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어. 부모님이나 친척들한테는 토익, 컴활 같은 자격증을 따야 한다고 적당히 둘러댔지만, 사실 그건 학교 다니면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거였어. 그게 아니라, 나는 내가 앞으로 걸어 나갈 노선을 확실히 하고 싶었어. 창업을 할 건지, 창작자가 될 건지, 회사에 취직할 건지부터 시작해서, 전공을 살릴 건지 말 건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난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그런 걸 확실히 하기 전에는 마음 잡고 학교 공부를 할 수 없을 것 같았어.
물론 여차저차 시작하게 된 휴학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지. 너도 잘 알다시피 말이야. 연애 문제로 자존감이 끝도 없이 낮아져서 내 가치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고, 학교 다닐 때와 비교해서 현저히 불어난 내 몸을 보면서 히스테리가 생기기도 했고, 도저히 답이 안 보이는 내 인생이 어떤 식으로든 이제는 좀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어. 대체 나는 왜 이리도 스스로를 끝도 없이 괴롭히는 걸까, 그런 생각은 나를 계속 옥죄었고 무얼 하든 나를 쫓아다니면서 내 말도 안 되는 행동에 대한 핑계로 작용하기도 했지. 그래도, 그럼에도 너랑 함께 하는 일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물론 선택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지만 내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좋아. 이제 휴학한 지 반년이 다 되어 간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어쨌든 깎이고 깎이면서 나름대로 내 형태를 갖추고 있는 느낌이네. 앞서 말한 것처럼 많은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계속 너와 팟캐스트를 하고 있었고, 계속 책을 읽었고, 끊기고 이어지는 관계들에 최선을 다했어. 내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니까, 나만의 비전이 생기기 시작한 데다가, 그 비전을 가지고 커리어를 쌓아가고 싶다는 욕심까지 생겼어. 전신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면서 살쪘다고 우울해하기만 하던 그때와 비교하면 얼마나 달라졌는지.
다시 복학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어. 배우고 싶은 것들도 많고, 얼른 나와 비슷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해보고 싶어. 그 사람들에게 '나 쓸만한 사람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기 위해서 나를 위한 투자도 해야겠다 싶고. 방 안에 있다가 내 삶이 이대로 반복, 반복, 반복만 되풀이할 것 같은 느낌에 그대로 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던 게 엊그제 같은데. 물론 아직도 '너 장래희망이 뭐냐'라고 물으면 절대 대답하지 못하겠어. 그냥 "나는 이런 가치를 좇으면서 살고 싶어요"라고 말할 순 있겠지.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그 과정에 너를 포함한, 내가 정말로 아끼는 사람들이 항상 함께 했으면 좋겠어. 오늘은 짧게 쓰려고 했는데 역시 말이 많아졌네.
음······ 그러니까, 너를 가치를 지닌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말에 상처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처럼 너도, 아니 어쩌면 나보다도 더, 너는 너만의 반짝이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나는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