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관계는 어느 지점에 있는 걸까? [녹마]

20. 09. 07

by 잠긴 생각들

태풍은 끊임없이 오고 가고 있고, 그 와중에 낮은 점점 짧아지고 어두운 밤은 무섭도록 빨리 찾아오고 있어. 나는 긴 장마 탓에 제대로 된 불타는 여름을 겪은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벌써 초가을이라니, 약간 억울하기도 하다. 코로나 2.5 단계 시국 때문에 우린 팟캐스트를 녹음할 때 빼곤 거의 만나지 못하고 있지. 그래도 가끔씩 주고받는 맥락 없는 카톡 대화 속에서라도 네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어서 다행이야. 게다가 이렇게 교환일기도 꾸준히 쓰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 D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코로나 19 확진자가 나오면서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무서워진 나는 고향 집으로 도피했어. 너도 알다시피 내 고향 집은 읍 단위의 시골이기 때문에 D 보다 인구 밀도도 훨씬 낮을뿐더러 어쩌다 확진자가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곳이거든. 허구한 날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언니와 함께 D에서 지내는 것보다, 엄마가 해주는 두부구이를 먹으면서 애인과 함께 집에서 강의를 들으며 각자 과제를 하는 것이 훨씬 낫겠다 싶어 고향으로 왔어. 저번 주말은 엄마의 생신이기도 했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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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D로 돌아가면 나는 집들이 멤버들과 우리 집에서 술을 마시겠지. 그나마 그 약속이 나를 D로 다시 돌아가고 싶게 만들어 줘. 나는 연인관계는 물론이고 우정에도 어떤 부침(浮沈)이 있다고 생각해. 돌아보면 모두 그랬어. 관계의 도약이나 절정 단계에 서서 그 관계를 바라보면 영원히 다 정복하지 못할 어떤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좋을 만큼 소중하게 보이기도 하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든 관계는 끝나게 되어 있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고 지나간 관계는 과거에 머물게 되겠지. 어떤 사람들은 내 의견에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렇게 모든 관계를 시기별로 그래프로 만들어 일반화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뭐랄까, 이건 관계 회피 성향을 가진 내 방어기제나 다름없는 거야. 점점 멀어져 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그냥 이 관계는 자연스럽게 지고 있는 거야'라고 생각하니까 감정이 다칠 일도 적어졌어.

물론 내가 애인과 오래도록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나는 누군가가 나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는 것이 여전히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깜짝 놀랄 만큼 둔해져. 둔해진다는 게 무슨 뜻이냐면, 너와 나의 거리가 얼마만큼인지 계산하기 위해 상대방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거야. '어떤 한 사람을 오래 본다'라는 생각을 하면 정말이지 믿을 수 없고, 나는 틀림없이 상대방을 실망시키고 말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돼. 최근에 연애를 시작한 삐약이(가명)는 연인 관계든 친구 관계든 무심하게 대하는 나를 보고 부럽다고 얘기해. 하지만 내가 너에게도 얘기하듯이, 새롭게 피어나는 관계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진심으로 다가가려는 너희들이 나는 더 멋있게 느껴져.

내가 오늘 이 얘기를 구구절절 써 내려간 건, 나는 여전히 관계 회피 성향을 가진 로봇 같은 인간이지만, 적어도 요즘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우리(집들이 멤버)의 우정이나, 스무 살부터 쭉 이어진 너와의 관계에서는 이것도 결국 끝나고 말 것이라는 회의적인 생각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어젯밤 삐약이가 보내준 애착 유형 테스트를 하고선 가만히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생각했어. '오래 지속되는 관계'에 대해서 말이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느껴졌어. 관계가 오래 가면 갈수록 볼 꼴 못 볼 꼴 다 보게 되잖아? 성가신 감정 낭비도 해야 할 테고, 어느 날은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친구의 귀찮다는 눈동자와 마주해야 할 수도 있어. 그건 생각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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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나를 오래오래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내가 싸가지 없이 '어쩌라고'라는 식의 방어적인 태도를 보여도, 내 등짝을 때리면서 얼른 이리 오라고 손짓해줬으면 좋겠어. 결국 이 우정도 슬슬 지워져 가는구나 싶어 떠날 채비를 하는 내게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처음 함께 여행을 갔을 때처럼 들뜬 목소리로 놀러 가자고 해줬으면 좋겠어.

내용만 보면 되게 암울한 상태에서 쓴 교환일기 같네. 하지만 나 요즘 되게 잘 지내! 엄마와도 사이가 괜찮고, 애인과도 괜찮고, 너희와도 잘 지내고. 아마도 그래서 더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주절주절 정신없이 쓴 교환일기였어. 오늘 저녁엔 가벼운 요가를 하고 잠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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