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9일의 산책-
안방 창유리에 조각조각의 햇빛이 아른거렸다. 햇빛은 갈고리처럼 나를 꿰어 끌어당기고 끌어당겼다. 밖에서 같이 놀자고 졸라댔다. 햇빛의 유혹이 최고로 강렬한 계절은 봄이 아닐까. 여름 햇살이 세긴 세지만 그 무자비한 빛줄기는 벼려진 쇠 화살 같아서 전혀 유혹적이지 않다. 오늘은 구름이 많은 날이어서 창문을 비비는 봄 햇살이 물그스름했는데 그 정도의 광도에도 나는 홀랑 설득당해버렸다. 이틀간 산책을 못해서일까. 봄 햇살의 달큼한 향이 산책 허기를 자극했다. 집안일이 쌓여 있지만 행주만 삶고 얼른 나가야겠다. 오늘까지 반납해야 하는 『83가지 새 이야기』도 다 못 읽었지만 산책 다녀와서 마저 읽어야겠다.
『83가지 새 이야기』는 어린이 도서인데 제목에 붙은 수식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재밌는 책이다. 오래전에 어린이였던 나도 즐겁게 읽는 중이다.
위의 책 덕분에 동네 산책로 갈대밭에 살고 있는 붉은머리오목눈이들을 다시 보게 됐다. 오목눈이는 둥지 안쪽에 새 깃털을 촘촘하게 깐단다. 한 연구자가 그 깃털의 수를 일일이 세어봤는데 한 둥지에서 1,000개 이상, 많은 경우엔 2,900개의 깃털이 나왔다고 한다.[1] 탁구공만큼 작고 동그란 오목눈이가 특유의 부산한 몸짓으로 깃털을 수집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입에서, 아니 부리에서 단내가 날 만큼 고생했겠구나. 새든 사람이든 내 집 마련은 보통 일이 아니다.
한편, 부지런한 오목눈이는 모든 일을 혼자 짊어지지 않는다. 가사도우미를 고용해서 함께 일한단다. 오목눈이들 중에는 가정을 이루는 대신 다른 가정의 가사도우미가 되어 집안일이나 육아를 돕는 개체들이 꽤 있다고 한다. 책의 워딩을 그대로 옮기자면 "오목눈이의 장래 희망은 결혼 아니면 가사도우미"[1]라고 돼있다. 새든 사람이든 네버엔딩 집안일은 여럿이 같이 하는 게 국룰이다.
나는 사람이나 새를 가사도우미로 고용하지 않지만 가족들의 집안일 참여를 부지런히 유도한다. 세탁기, 식기세척기, 제빵기, 무선 청소기 등은 내가 즐겨 쓰는 기계식 가사도우미이다.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기에 정리와 청소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줄인 것은 시스템화된 가사도우미라고 볼 수 있다. 내 손이 닿아야 할 집안일을 이런저런 모양으로 압축했지만 우리 집안의 일거리 역시 네버 엔딩이며 그것의 대부분은 내 몫이다. 집안일 외에도 내가 집에서 수행하는 일은 독서, 그림 그리기, 글쓰기, 애들 챙기기 등으로 다채롭다. 나에게 집은 '일감 개미지옥'이다. 집에만 있다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개미로 변해 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제2의 '잠자'가[2] 되기는 싫다. 몸이 변태 되기 전에 산책로로 뛰쳐나야겠다.
인적 드문 산책로에는 하얀 냉이꽃이 펑펑 피어나 있었다. 레몬색의 꽃다지 꽃도 우수수 피었다. 벌레도 진짜 많아졌다. 내 얼굴 높이에서 공처럼 무리 지어 부유하는 벌레 떼들이 너어어어무 많다. 나는 희고 노란 꽃을 밟지 않기 위해, 벌레들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 택견 선수처럼 이크 에크 걸었다.
집에서 들고 온 마지막 땅콩 분태를 인명구조함 아래에 쏟아부었다. 새들의 먹이가 득실거리는 계절이 되었으니 나의 버드 피딩은 내일부터 다음 겨울까지 휴업이다. 새들아, 다음 겨울엔 해바라기씨로 준비할게.
공원에서 새들은 땅콩 분태와 풀씨, 벌레를 먹었고 나는 햇빛을 먹었다. 흐린 날씨의 흐리멍덩한 햇빛을 두 손과 얼굴 피부로 냠냠 섭취했다. 어둑한 집 안에서 종종거리느라 이틀 치 햇빛을 거른 자에겐 흐린 햇빛이 보식으로 적당했다. 슴슴한 죽처럼 부담 없으면서도 기분 좋은 포만감이 드는 광합성이었다.
잔디밭에서는 매일 새 풀이 돋아난다. 오늘도 못 보던 풀이 눈에 들어왔는데 몸이 피곤해서 그냥 지나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낯선 풀에게로 돌아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계속 마주칠 텐데 통성명이라도 할까요." 잎에 세로 줄무늬 홈이 파인 그 식물이 대답했다. "저는 질경이랍니다." 아 얘가 그 질기다는 질경이구나. 질경이는 공원 여기저기에서 돋아나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알아보니 저 또렷한 세로 줄무늬를 '나란히맥'이라고 부른단다. 찻길에서도 질기게 살아남는 질긴 식물은'질경이', 세로 반듯한 줄무늬는 '나란히맥'. 이보다 더 적당할 수 없는 이름이다. 어떤 존재에게 꼭 맞는 명칭이 주어진 걸 보면 괜히 기분이 좋다.
갈대밭에서는 삐-삐-삐-, 찌삐찌삐 소리가 옅게 들렸다. 삐-삐-삐-는 붉은머리오목눈이의 울음소리이고 찌삐찌삐는 박새 울음소리이다. 가와카미 가즈토는 앞의 책에서 오목눈이가 자발적으로 박새를 먹여 키우기도 한다고 썼다.[1] 가사와 육아를 돕고자 하는 DNA가 저 작은 몸 안에 참 크게도 각인돼 있나 보다. 우리 동네 갈대밭 속에서도 종을 뛰어넘는 훈훈한 상부상조가 이루어지는 중이려나.
공원의 야외무대 건설 현장에서는 사람과 굴착기가 상부상조 중이었다. 사람이 든 삽과 굴착기의 버킷이 일심으로 흙을 쑤셨다. 쇠를 두드리는 탕- 탕- 탕- 소리는 내 귀를 쑤셨다. 시계 초침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규칙적인 소음이었다. 공사 구역을 벗어나려고 걸음의 속도를 올렸더니 산책로의 흙이 튀어 신발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감각이란 얼마나 예민한가. 도톰한 양말을 신은 발이 흙 알갱이 하나의 현 위치(새끼발가락 바로 뒤 발볼 아래)와 크기(대략 율무 한 톨과 비슷함. 흙 알갱이 치곤 커다랗군.)를 정확히 인지했다. 걸을 때마다 그 이물질이 보통 걸리적거리는 게 아니었지만 산책 흐름을 깨고 신발을 털기는 귀찮았다. 천연 지압 용품이라 생각하며 그냥 걸었다.
산책은 천연으로부터의 시각, 청각, 촉각 자극이 넘치도록 감각되는 시간이다. 그런 걸 누리기 위해 생산적인 일을 할 시간을 희생한다. 산책은 생존 필수과목이 아니다. 산책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완벽하게 놀기만 하는 시간, 유일하게 '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이 시간을 나는 포기할 수 없다.
까마귀에게도 '놀이'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까마귀는 잘 놀기로 유명한 새여서 눈 쌓인 언덕에서 썰매를 타거나 다른 동물들과 함께 술래잡기를 하기도 한다. 장난감을 직접 만들어서 노는 극소수의 야생종이기도 하다.[3] 노는 동안에는 식량을 찾을 수도 없고 포식자에게 발견될 확률도 커지며 새로운 일을 생각하느라 뇌에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가와카미 가즈토는 이것이 무의미한 행위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놀이'는 미지의 행동을 시험하는 호기심의 발로로써 궁극적으로는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환경에 큰 변화가 생겨서 먹이나 터전이 사라진다면 경험에만 의존하던 보수적인 새는 쉽게 멸종할 수 있다. 그러나 까마귀처럼 호기심이 강한 새라면 경험해보지 못한 변화가 닥쳐도 도전적인 자세 덕분에 생존해낼 수 있다.[1]
나의 놀이가 까마귀의 그것처럼 생존에 유익한지는 모르겠다. 생존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고 숨을 돌림으로써 짐에 압사되지 않을 수 있으니 결국 산책은 생존에 유리한 쉼표이려나. 이렇게까지 수학적인 생각은 피곤하다. 그냥 내 일상에도 한 조각쯤 아무 생각 없이 즐거운 시간, 무쓸모하고 비실용적인 놀이가 있으면 좋겠다. 생존과 경쟁에 치이기만 하는 삶은 넌더리 나니까.
일곱 명의 유아들과 두 명의 선생님도 공원으로 놀러 왔다. 어린이집에서 마실 왔나 보다. 선생님 두 명이 양손에 아이 하나씩을 잡고 돌계단을 내려왔다. 아이 세 명은 계단 꼭대기에서 대기 중이었다. 아이들 모두 도톰한 파카를 입었는데 노란색, 흰색, 분홍색, 옅은 흙색의 외투에서 봄기운이 났다. 아이들은 살짝 열린 꽃봉오리처럼 동그랗고 작았고 빛났다. 우리 애들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네 명의 아이들은 한참만에 계단 아래에 도착했다. 그들은 선생님 손을 잡고 내려오는 후발대 친구들의 이름을 목놓아 외쳤다. "00야! 00야! 00야! 조오-시임-해애-! 위이-허엄-해애-! 떠어-여어-지인-다아(떨어진다)!" 디딤판끼리의 높이가 어른 신체에 맞춰진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오는 세 아이들은 친구들의 응원 속에서 차근차근 신중하게 '놀이'의 세계로 입성했다. 선발대는 후발대가 잔디밭에 도착할 때까지 두 손을 입 옆에 갖다 대고 목소리로 힘을 보태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저 작은 생명들은 놀기 위해 장애물(계단) 통과를 감수했고, 함께 놀기 위해 서로를 기다려주고 응원했다. '놀이'는 그토록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이구나.
나는 일곱 명의 아이들이 내려온 계단을 거슬러 올라갔다. 구름이 물러가는 통에 공원의 햇살은 점점 진해졌다. 선명한 햇빛을 등지고 집으로 향했다. 일상으로 돌아가 콩을 삶고 고구마를 찌고 국을 끓여야 하며,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하다 보면 햇빛이 고파지고 몸이 고달파지겠지. 빨리 그날이 오면 좋겠다. 또 놀러나가게.
1. 가와카미 가즈토,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83가지 새 이야기』, 사람과나무사이
2.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주인공.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벌레로 변한다.
3.https://ko.wikipedia.org/wiki/큰까마귀
녹차의 일러스트 상품_ 네이버 스토어 ▼
https://smartstore.naver.com/conteenew/search?q=녹차
녹차의 일러스트 굿즈_ 마플샵 ▼
https://marpple.shop/kr/nokc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