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흐릿해지면

by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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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5일의 산책-


오늘은 봄비가 내린 이튿날이다. 맑고 맑게 갠 하늘이 쨍쨍한 햇발을 뿌렸다. 땅에 명중된 온기는 축축한 땅을 부지런히 말리고 있었다. 개미들이라면 지표에서 보글보글 증발하는 물소리를 들었을 게 분명하다.


공원으로 가는 길에 하얀 옷 입은 아이를 봤다. 아장아장 걷던 그 아이는 아스팔트 위로 넘어졌고 옆에 있던 엄마가 재빨리 아가를 안아 올렸다. 살짝 주저앉은 거라 다치진 않았을 테지만 젖은 땅의 더러움이 새하얀 옷을 망가뜨렸을까 봐 속으로 걱정이 됐다. 그러나 공중 부양된 아이는 여전히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아스팔트가 '뽀송' 직전까지 마른 덕분이었다. 봄 햇살의 건조 기능은 강력했다.


맑은 날엔 세상의 활기가 제곱된다. 오늘자 우리 동네 참새들을 저 지경으로 만든 것도 햇살 때문일 거다(내 피부로 직접 햇살을 감별한 후 내린 합리적 의심이다). 집 근처 초등학교 앞과 골목 사이사이에서 수십 마리의 참새들이 정신없이 지저귀고 있었다. 소풍을 가기 위해 반별로 교문을 나선 아이들 같기도, 알 수 없는 말을 래퍼처럼 발사하는 경매사들 같기도 했다.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거지? 저렇게 무질서하게 다 같이 지저귀면 서로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는 걸까. 대화가 아니라 합창인 건가. 어쨌든 오늘 같은 햇살 파워라면 수다나 노래를 하루 종일도 뽑을 수 있을 거다.


힘센 햇살은 딱딱한 나무껍질에서 꽃들을 뽑아냈다. 짱짱한 새소리 옆에서 동백꽃과 산수유가 조용히 피었다. 소리 내지 못하는 식물들은 점잖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서 봄 아지랑이 같은 생명이 이글거린다. 요즘은 꽃집 앞을 기웃거리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내 발걸음도 봄꽃 앞을 지나갈 때마다 느려지거나 정지된다. 신생아실 유리 벽 앞에서 나도 모르게 멈춰 서게 되는 기분이랄까. 그곳에 내가 낳은 아이가 없을지라도 웃으며 쳐다보게 된다.


오늘은 평소보다 옷을 한 겹 덜 입고 나왔다. 바지 내복과 집업 점퍼를 덜어냈다. 머리엔 패딩 모자 대신 얇은 모자를 썼다. 손이 약간 시렸지만 장갑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겨울엔 패딩 주머니 안에 장갑을 꼭 넣어 다녔는데 오늘 내 패딩 주머니엔 새들을 위한 볶은 귀리뿐이다.


산책로 옆을 흐르는 강물은 하룻밤 새 키가 자랐다. 스으-르으-르으- 흐르는 굵은 강줄기가 한 덩어리의 생물 같았다. 껑충 증가한 물, 쓱 해결된 겨울 가뭄을 보니 봄비의 힘이 느껴졌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는 강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야트막한 강둑이 있다. 그 둑을 점프하는 물소리가 내 귀까지 들렸다.


쨍한 공원에 잠깐 서 있는 것만으로 등이 따뜻해졌다. 패딩의 지퍼를 열었다. 공원은 겨울을 벗고 한지 같은 봄을 매일 한 겹씩 덧입는 중이다. 얇은 연둣빛에 마음이 설레고 두툼해질 봄이 기다려진다. 산책객들의 팔엔 벗은 잠바가 일제히 걸려 있었다. 봄이 산책객들에게 명령한 복장 규정이었다.


봄은 패딩도 밀어냈지만 후투티와 오리, 고니, 독수리도 밀어냈다. 정든 겨울 새들이 가고 새로운 공원 입주민들이 도착하고 있다. 오늘은 처음 들어보는 새소리를 만났다. "쀼르르르르 쁘르르르르"라고 들렸는데 정확한 받아쓰기는 아니다. 기계음을 닮기도 한 신기한 소리여서 고개를 홱 돌려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소리는 가깝게 들렸지만 목소리 주인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부풀어가는 나무 사이에 꽁꽁 숨은 것 같다.


대부분의 겨울새가 떠났지만 물닭은 조금 남아있었다. 아기 손톱만 한 새싹을 단 봄 나무 뒤로 펼쳐진 넉넉한 물, 그 위를 천천히 헤엄치는 물닭. 퐁! 소리를 내며 잠수했다가 다시 퐁! 수면으로 복귀하는 물닭은 여린 봄 풍경과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헤엄치던 물닭들 앞에 사람 팔뚝만 한 통나무가 떠 있었는데 새들은 그걸 툭툭 쪼고 지나갔다. 길에 떨어진 깡통을 괜히 발로 차는 사람과 비슷해 보여서 웃음이 나왔다.


곶감 색의 배를 가진 딱새 수컷이 휙 날아갈 땐 "어머 어머" 소리가 튀어나왔다. 자주 못 보는 새를 만나면 반사적으로 감탄사가 터진다. 비둘기들은 축축한 흙을 부리로 파헤치며 먹이를 뒤졌다. 박새도 참 오랜만에 봤다. 알록달록한 연이 걸린 나무에서 박새 두 마리가 새싹 같은 걸 뜯어먹고 쪼아 먹었다. 먹으면서도 둘은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아이고 예뻐라.


갈대밭에서 딱딱딱- 소리가 들렸다. 몇 달 전에도 들었던 소리다. 팝콘 터지는 소리와 결은 비슷한데 음량은 1/5 정도로 가냘프다. 내 눈앞의 갈대밭은 온통 정지 화면인데 저 속엔 내가 모르는 세계가 돌아가고 있나 보다. 미지의 세계가 가동되는 엔진 소리일까. 새들이 부리로 딱딱한 걸 쪼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의 생일이라서 작은 폭죽을 터트리는 중일까. 나도 손뼉을 쳐주어야 할까.


곡선을 그리며 비행하는 벌레도 잔뜩이다. 어제보다 두 배, 아니 다섯 배는 많아진 것 같다. 가창오리의 군무처럼 떼로 부유하는 벌레들, 짝을 지어 팔랑이는 갈색 나비 커플, 아주 작은 부전나비, 음주 비행인 듯 내 얼굴에 충돌하는(으악!) 곤충들. 봄은 살아 있다. 봄은 생명이다. 삶이 흐릿해지면 봄으로 나와야겠다. 여긴 온통 살아있는 것들이다. 죽었다 깨어난 공원이 됐다.


강의 중앙 둑에 도착했다. 봄의 단물이 둑을 꿀렁꿀렁 넘으며 콸콸콸콸 소리를 질렀다. 어찌나 성량이 큰지 바로 옆에서 울리는 드릴 소리를 다 잡아먹고도 남았다. 중앙 강둑 옆으론 야외무대가 지어지는 중이다. 그것은 공원에 문자 그대로 물리적으로 거대한 그늘을 드리웠다. 무대 위를 덮는 큰 천막이 볼트로 조여지고 있었다. 참으로 쓸데없이 큰 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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