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주고 약 주고

by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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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일의 산책-



생명이 용암처럼 분출하여 대지로 줄줄 흘러내리는 봄이다. 겨울은 봄에 델 새라 허둥지둥 도망쳤다. 어제 내린 봄비는 산책로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거기에 파란 하늘이 빠졌다. 하늘은 반쪽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한쪽엔 두꺼운 목화솜 같은 구름이, 다른 한쪽엔 듬성듬성한 대나무 발 같은 구름이 대치 중이었다. 성글은 봄 구름은 햇살과 연합하여 겨울 구름을 밀어내는 중이었다. 공기는 겨울과 봄이 혼합되어 차가우면서도 포근했다. 10℃가 못 되는 기온이었지만 마스크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장갑 속 새끼손가락 두 개가 시렸다. 나머지 여덟은 따뜻했다.


공원의 색이 변하고 있다. 누렇게 마른 잔디에 촉촉한 초록 잉크가 분무됐다. 잭슨 폴록 같은 액션 페인팅 화가가 부지런히 초록 물감을 뿌렸나 보다. 아이들이 초록 색종이를 가위로 다지듯 자르며 흘린 조각처럼 보이기도 했다. 뭉툭한 손가락으로 주워 담기엔 보통 어렵지 않은 잘디잔 초록 파편들이 이곳저곳에서 반짝였다.


새싹들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달랐다. 장미 꽃잎을 닮은 풀도 따글따글 피어났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벼룩이자리'라는 식물이었다. 돌 틈에서는 진분홍의 작고 길쭉한 꽃봉오리가 보였다. 검색창은 그것이 광대나물이라고 알려주었다. 진작부터 공원에 찾아온 꽃다지는 노란 꽃봉오리를 만들었다. 장갑을 벗고 손가락으로 꽃다지를 살살 쓰다듬어 보았다. 잎에 돋은 짧고 촘촘한 털이 갓난아기의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꽃다지에게 "안녕~ 안녕~ 피어나 줘서 고마워. 잘 커야 돼."라고 말해 주었다. 산책로에 콕콕 찍힌 초록색은 너무 예뻐서 보고 또 보았다.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갈대밭으로 향하는 내리막은 확연한 초록이었다. 거기는 분무기가 아닌 넓은 평붓으로 묽은 초록색 물감을 쓱쓱 발라 놓은 듯한 그림이었다. 소리쟁이의 잎은 부숭부숭해졌고 쑥은 바글바글해졌다. 갈대밭 옆 나무들은 작게 부푼 연두색 솜사탕이었다.


올해 처음으로 부전나비도 보았다. 옅은 회색의 저 작은 나비를 친정 엄마는 '바보 나비'라고 불렀다. 쉽게 잘 잡혀서였다. 오늘은 백할미새를 만난 이래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쳤다(감격). 이 쪼끄만 새는 처음엔 산책객들과 지나치게 내외를 했는데 겨울 한 철 동안 이곳에 적응했는지 사람을 점점 덜 무서워한다.


봄엔 공원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 같다. 볼 게 많아서 도무지 전진이 안 된다. 그러나 고운 산책로는 여기서 끝이었다.


산책로의 남은 반쪽은 엉망진창이었다. 덩치 큰 중장비의 무한궤도가 땅에 움푹진푹한 요철을 파 놓았다. 흙이 뜯겨 우묵해진 땅엔 간밤에 내린 비가 고였다. 1,2미터 간격으로 진흙 무더기도 쌓여 있었다. 미끄덩한 흙이 발바닥에 쩍쩍 들러붙었다. 짧게 잘린 쇠막대기며 굵고 검은 고무 밴드며 갖가지 쓰레기들이 굴러다녔다. 새로 피어난 초록 잔디 위엔 시멘트 반죽이 후드득 떨어져 있었다. 이 길은 원래, 어깨너비로 좁게 눌린 고운 잔디 카펫 길이었다. 과거의 그 길이 자꾸 가물가물해진다.


산책로 한쪽엔 거칠게 뚫린 구멍도 생겼다. 성인 발 사이즈보다 더 큰 구멍이었다. 인위적으로 뚫은 게 아닌, 어쩌다 파괴된 듯했다. 위험해 보였지만 접근 금지 표지판은 없었다. 부서진 땅속으론 콘크리트와 흙, 철근이 보였다. 사람이 다니던 산책로에 무거운 차들이 지나다니는 바람에 저런 상처가 생긴 게 아닐까.


난장판이 된 산책로보다 나를 더 기함하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강물에 떠 있는 낯선 물질들이 그것이었다. 나는 미간을 구긴 채 고장 난 로봇처럼 말했다. "저게 뭐지? 저게 뭐지? 저게 뭐지?" 허연 것들이 둥둥 떠 있었다. 비누 거품 같아 보이기도, 자잘한 스티로폼 조각 같아 보이기도 했다. 부유물이 강물 위를 광범위하게 덮고 있었다.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자연스러운 풍경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몇 마리의 물새들이 그 위를 떠다녔다. 새들의 건강이 걱정됐다.


공사 중인 야외무대엔 거대한 아치형 쇳덩이가 단단히 박혔다. 건설 노동자분들은 아치 위에 하얀 천막을 덮느라 바빴다. 따르르르륵! 하는 요란한 드릴 소리가 규칙적으로 발사됐다. 공사장 옆 가로등 위엔 까치 하나가 앉아 있었는데 드릴과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드릴이 '따르르륵!' 하면 까치가 '깍깍!' 응수했고 이 말싸움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우리나라 대표 텃새이자 공원 원주민(원주조原住鳥인가)인 까치가 실력을 발휘했다. 잘한다 까치야. 맘껏 텃세를 부려라.


거친 산책로를 뒤뚱뒤뚱 걸으며 시끄러운 따발총 소리에 귀를 막느라 나는 지쳤다. 공원의 초록에서 힘을 얻었고 파헤쳐진 공원에서 그 힘을 다 썼다. 공원은 나에게 약도 주고 병도 주었다.


새들은 처지가 더 나빴다. 그들은 인간의 주거지 면적에 비하면 야박하리만큼 작은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인간들은 그곳에까지 콘크리트를 들이붓고 있다. 나는 강변 공원의 인명구조함 밑에 귀리를 소복이 부었다. 이 곡식 앞에서 새들은 '인간들은 병 주고 약 주는구나'라며 어이없어하지 않을까. 게다가 병은 불치병 급인데 약은 소독약 수준이다. 내가 새였다면 '우리 터전 좀 건드리지 마!' '집을 뺏으면서 겨우 곡식 몇 알로 퉁치는 거냐!'라고 따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의 새들은 나의 귀리를 보이콧하지 않았다. 그저 뿌려진 곡식을 남김없이 먹고, 찾아온 봄에 기뻐하며, 시끄러운 소리를 향해 텃세를 부렸다. 그렇게 자신들의 생명을 충실히 가꿀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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