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여고

4

다음날.

"야! 들었어?"

학교는 다시 흥분의 도가니이다.

"미쳤다. 미쳤어!"

이제는 살인사건에 익숙해질 때도 될 만하지 않았나?

"무서워!"

내 짝 은지가 말했다.

"전학가 그럼."

"넌 무슨 애가 그렇게 태평하냐."

은지가 나에게 타박을 준다.

"그러게 말이다."

"어쩐지, 저 음악실 갈 때마다 음침했어. 저기 학교 꼭대기층 구석에 있잖아.

정리도 잘 안 되어 있고.

그래서 음악시간도 그냥 교실에서 수업할 때가 더 많잖아."

그랬다.

사실 우리같은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음악이란 교과는 있으나마나한, 내신 때만 잠깐 필요한 그런 과목이었다.

그래서 사실 음악실의 다양한 악기를 쓰는 일은 없었다.

어느새부터 음악실에 가지 않고 교실에서 음악 선생님의 지휘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만 했으니까.

음악실에 가 본 지가 언제였더라.

그런데 그 음악실에서 어젯밤 학생이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저마다 아이들은 추리하기에 바빴다.

"누구지?"

"단순 자살인가?"

"아니면 단순 자살을 위장한 살인?"

이제 아이들은 모두 형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어느 새 네 번째 살인 사건이었다.

처음엔 흥분의 도가니였지만,

두번 세번 반복되면서 아이들의 머리도 더 복잡하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머릿속에서는 혜경이가 말했던 게 맴돌았다.

죽은 아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 그 미술 선생이란 놈이 사실은 원조교제를 일삼는 새끼라니.

죽어라, 죽어라,

혜경이 친구의 목을 조르며 그 짓을 했던 놈이라니.

아오.

그나저나 어제 혜경이는 왜 셔틀버스에 안 탄 거야?

학교는 왔나?

슬금슬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나하고 혜경이는 학교에서는 서로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

나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부터 관계 설정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갑자기 학교 매점에서 그 애와 말을 텄고,

독서실 가는 셔틀버스에서부터 아는 척을 하게 되었고,

그리고 독서실에서만 말하는 사이.

참 희안하네!

하지만 어쨋거나 학교에서 우리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르겠다.

갑자기 혜경이에게 다가가서

"어젯밤에 어디 갔었어?"

하고 묻기도 그렇고.

서로 학교에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암묵적인 룰이 되어버렸다고나 할까.

하지만, 궁금해.

참을 수 없어.

혜경이는 늘 그렇듯이 책상에서 멍때리고 있다.

자습서를 보는 척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 아이의 이중 생활을 아는 건 우리 반에서 나 뿐일걸.

다가가서 물어볼까.

아니야, 괜한 참견이야.

무엇보다 학교라는 공간이 혜경이에게 다가가길 머뭇대게 만든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이야기하는 공간은 학교 후라는 암묵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

괜히 건드리지 말아야지.

그랬다간 우리의 관계도 뭔가 뒤틀려 버릴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일교시는 철학 시간.

아이들은 입을 모아 합창한다.

"선생님~~~~~~~!"

투정하듯이 입을 모아 말한다.

왠일인지 철학의 얼굴이 매우 어두워 보인다.

거듭되는 아이들의 죽음에 선생님들 또한 매우 힘들 것이다.

"자, 수업 나갑시다."

선생님은 엄숙하게 말한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철학이 이렇게 엄숙해지다니. 왜일까.

순간 철학도 별 수 없는 교사라는 것.

교사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미술쌤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쫙 퍼져 있다.

어제 사건 이후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겠지.

처음 목격자니까.

철학은 지금 아무 이야기도 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선생님, 뭐 알고 있는 거 없으세요?"

우리반에서 제일 말 많은 진희가 용감하게 물었다.

"너, 나와!"

갑자기 철학이 흥분한 듯 고함을 지른다.

일동 얼음!

갑자기 왜 저래!

"너네 내가 만만해?"

읭?

이건 무슨 상황?

"자, 앞으로 누구라도 수업 시간에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교무실에서 반성문 쓰고 갈 겁니다."

이제야, 이성을 되찾은 듯 철학이 이야기한다.

고요하다.

"자 책 펴세요.

철학책 61쪽."

철학 수업이 끝나고 애들은 모두 충격에 휩싸여 있다.

우리에게 늘 다정하고 학생 편인 척 굴었던 게 사실은 다 거짓이었던 거야.

똑같아.

결국 다른 어른들하고 똑같아.

기대할 거 하나 없어.

모두 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으니까.

뭐, 별 수 없네. 그런 생각.

하지만 철학 수업 이후로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더 이상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

선생님들 표정은 모두 다 딱딱했고

우리에게 아무런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수업 시간은 냉랭하게 흘러갔다.

점심시간.

"야! 특종!"

진희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뭔데, 뭔데?"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진희가 뜸을 들였다.

"자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뜬금없이 진희가 손을 들었다.

"나!"

어디서인가 들려온 큰 목소리.

바로, 이.혜.경.

뭐지?

애들하고 말도 섞지 않는 애가 갑자기 왜 이래.

"잘 들어봐.

걔가 어제 밤 11시에 죽은 채로 발견되었어.

내가 어제 밤 열시까지 여기서 자습하고 있었어.

그리고

옥상에 바람 쐬러 아홉시 넘어서 올라갔었단 말야.

그때

오층 지나가는데 희미한 불빛이 보였어."

아이들은 숨죽여 혜경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가 봤지."

혜경이가 뜸을 들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합창하듯 물었다.

"글쎄, 어떤 애가........

어떤 애가.......

울고 있었어.

서럽게.

난 뭐 얼마 전 기말고사 성적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옥상에 올라갔지.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거야.

그럼 자살이 아니고 뭐겠어?"

혜경이의 말에 교실 안에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특종이란 게 뭔데?"

혜경이가 도발하듯 물었다.

"음.... 그게 말야."

진희가 얼굴이 발개져서 말했다.

"얼마 전에 그 애가 남자친구하고 헤어졌대."

에이, 난 또 뭐라고.

아이들은 일제히 말했다.

"너, 그거 경찰한테 이야기해야하는 거 아냐?"

반장 지영이가 말했다.

"귀찮아."

혜경이는 다시 멍때리기 모드로 들어갔다.

이어폰을 끼고 소설책을 꺼내들었다.

자기가 할 말은 다 끝냈다는 뜻이었다.

"자, 오늘은 일찍 집에 가세요.

밤자습은 꼭 하겠다는 사람만 남고 일찍 귀가해도 됩니다."

담임이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와.

아이들은 휘파람을 불며 좋아했다.

앗싸.


운동장 안은 학부모들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환했다.

자기 자식을 픽업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저기에 우리 부모님은 없을 터였다.

아빠는 장사하느라 바쁘고.

엄마는 한창 할머니와 씨름하고 있겠지.

에휴.

집에 들어가기도 싫었다.

공부나 하자.

난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고 사회책을 폈다.

교실은 아이들이 몇 남지 않아 휑했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이제 독서실로 향할 시간.

난 학교 앞 독서실 셔틀버스 타는 곳으로 향했다.

혼자.

나와 혜경이는 따로 이동한다.

셔틀버스 타는 곳에서 얼마간 있자니

혜경이가 다가와 싱긋 웃었다.

반갑다는 표시였다.

"아까 한 말 개구라임."

혜경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너 어제 밤에 어디 갔었어?'

목까지 차올랐던 말이 쑥 들어갔다.

어차피 물어봐도 그애가 무슨 대답을 하건 그게 사실일지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어.

도무지.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에휴."

그때 셔틀버스가 왔다.

혜경이의 다리를 훑는 저 아저씨의 끈적한 시선.

아오. 더러워.

난 속으로 생각하며 뒷자리로 갔다.

혜경이 따라서 내 옆에 앉았다.

"뭔데, 어제 뭐 좀 알아냈어? 그 이너서클인가 뭐시기인가."

난 독촉하듯 물었다.

"니가 좀 도와줘야겠다."

혜경이가 말했다.

"뉴페이스가 필요해."

"뉴페이스?"

"응. 이너서클 밖에서 온 뉴페이스.

네가 그 역할을 좀 해줘야겠어."

"웃기지 마."

설마 나를 그 원조교제인가 뭔가에 끌여들이려는 건가.

미쳤구만.

미쳤어.

"너 나 이용하려는 거야?"

나는 따져 물었다.

"너도 사실은 풀고 싶잖아.

누가 그랬는지.

그러니까 나한테 자꾸 묻는 거잖아.

아니야?"

혜경이가 내게 질문했다.

그때 그 아이,

내 사랑 윤우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정의의 아이콘이었다는 말.

그래서

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말.

그래, 그랬었지.


초등학교 때 나는 용감하기 그지 없었다.

학교에서 좀 논다, 까분다, 애들 괴롭힌다, 하는 애들 있으면 가서

무조건 때려눕혔으니까.

그때 난 덩치가 그리 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용기였는지

가서 죽기 살기로 덤비면

승자는 나였다.

주머니에 작은 쌍칼도 넣고 다녔었지.

그래. 그게 나야.

문득 나도 나서서 이 사건을 해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실은 마음 속에서부터 그 마음이 항상 존재해 왔었다는 것을 이제야 발견했다.

하지만.

그렇대도

그건 싫어.

"그래서 날 미끼로 쓰려는 거냐?

됐거든."

난 차갑게 거절했다.

"니가 미끼로 쓴다고 되겠니?

됐다 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가서 이야기 좀 해 주면 돼.

그게 다야."

도대체, 이 아이 이야기는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거야.

헷갈려.

"누구랑 이야기를 하는 건데?"

"우리 이너서클 안에 그 미술이란 인간하고 친한 사람.

사실 그 인간이 미술을 이너서클에 소개시켜 준 거거든.

그 인간한테 가서 단서 좀 찾아와봐."

"그 사람이 누군데?"

난 재차 물었다.

"철학."

뭐?

철학샘?

이런 미친.

철학샘도 한통속이었다고?

"말도 안 돼!"

내 목소리가 너무 컸던지

혜경이가 손가락을 자기 입에 대었다.

'쉿'

"그래. 그 놈이야.

그래서, 그렇게 오늘 개난리를 친 거야.

자기도 위험해지니까."

"너, 설마 철학이랑 잤냐?"

혜경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설마, 설마. 설마.

그건 아니겠지.

"우린 같은 학교잖아.

그런 일은 없어."

개구라치네.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지금 나보고 철학하고 어떻게든 사적으로 만나보라고?"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넌 완전 모범생이잖아.

공부도 잘 하고.

뭐라도 알아내 봐.

정말 철학하고 미술이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있는지."

혜경이 진지하게 말했다.

"싫어!"

싫다.

내가 왜 철학샘과 엮여야 하는지.

아무리 수사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래? 그럼 말고!"

쿨하게 물러서는 혜경이.

순식간에 머쓱해지는 공기.

셔틀버스가 독서실에 다다랐다.

심각한 이야기를 해서인지 금새 독서실에 도착한 기분이다.

같이 내리는 아이들은 다른 학교 남자애들 두 명하고 우리 두 명이다.

그 중의 한 명은 혜경이와 같이 독서실 화장실에서 도망치듯 나오던 남자애.

제법 훤칠하니 괜찮다.

혜경과 그 둘은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하여간 웃겨들.

뭐, 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난 윤우가 있으니까.

둘이 그 안에서 키스를 했건, 그 짓을 했건 내 알 바 아니다.

"그럼 즐공!"

오늘도 누군가와 만나러 나가는 건가.

얘는 왜 이렇게 자기 몸 소중한지 모르고 굴리는 거야.

학교에서는 혜경이가 모범생인지 알고 있다.

그런데 혜경이가 속해 있는 원조교제 이너서클에 철학과 그리고 지금 학교에 나오지 않는 미술이 속해 있다......

수사가 깊어지면 이너서클에 대해서 조사가 이뤄질 수도 있고 그러면 혜경이까지

까발려질지 모른다.

에휴.

머리아파.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치는 게 느껴진다.

혜경이가 돌아왔나?

반가움에 뒤를 돌아보는 순간,

오마이갓!

이게 누구야?

혜경이와 화장실에서 뭔가를 하고 나오던 그 애?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내게 속삭이는 아이.

뭐지?


우리는 휴게실로 나온다.

윤우를 제외하고 남자 아이와 이야기를 해본 적이 중학교 이후로는 한 번도 없다.

그나마 윤우와 이야기한 것도 헤어진지 오년 차,

겨우 이주 전에 있었던 일.

오.

이 낯섬.

도대체 날 왜 부른 걸까.

무슨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까.

"뭐 마실래?"

그 아이는 음료수 자판기에서 '레쓰비'를 뽑으며 묻는다.

"이프로 부족할 때 복숭아맛"

난 작게 말한다.

그리고 내 앞에 놓여진 음료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수이다.

"난 시온이야. 청안 고등학교 다녀."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뭐지?

잘생겼는데?

그래도 혜경이하고 화장실에서 나오던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날라리 새끼.

왜 날 보자고 하는 거지?

"난 김소영."

야, 너도 시온인가 뭐시기처럼 자신감 있게 이야기하란 말야.

왜 목이 쑥 들어간 거북이처럼 잔뜩 긴장해 있는 거야.

그럴 필요 없다고.

그래, 그럴 필요 없지.

내가 왜?

난 당당한 김소영이라고!

윤우를 생각하니 갑자기 용기가 솟는다.

"그런데 무슨 일로 보자는 거야?"

갑자기 내 커진 목소리에 당황한 듯 갑자기 말을 더듬는 시온이.

"어. 어. 어. 그게 말이야."

"응 말해."

"혜경이.......

남친 있니?"

아오. 기막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난 자리를 뜨며 말한다.

시간 아까워.

"그런건 당사자한테 물어봐."


황급히 나를 막아서는 시온이.

"아니, 사실은 그 말을 하려고 널 부른 게 아니야.

미안 미안. 사실은 걔가 걱정되서......"

음.

혜경이를 좋아하는가 보네.

"그래. 네가 날 안 좋게 생각하는 거 알아.

그런데, 그때 한번 뿐이었어.

그 후로 혜경이는 날 아는 척도 안 하고."

에이구 당했구나.

"걔하고 어울리지 마.

너만 복잡해져."

갑자기 불쌍한 마음이 든다.

"순수한 마음에서 혜경이한테 관심이 있는 거 같은데 말야.

웬만하면 그냥 그때 있었던 한 번으로 족해.

너네가 뭔 일을 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걔 너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애야.

아니, 너도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아무튼 좀 거리를 두는 게 네 정신 건강에 좋을 거야."

갑자기 너무 꼰대조로 이야기 했나 싶다.

"너는 혜경이하고 친하지 않아?"

풋, 웃음이 난다.

이게 친한 건지, 아닌 건지.

나도 헷갈린단 말야.

나도 걔 일에 얼마나 개입해야 할지 헷갈린다고.

"글쎄.

나도 걔 걱정은 돼.

지금도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그건 사실이긴 하다.

오늘은 누굴 만나서 뭔 짓을 하고 있는지......

"그렇구나.

난 둘이 엄청 친한지 알았어.

셔틀버스에서 하도 붙어서 속닥거리길래."

"아냐.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친하진 않아.

난 걔 전화번호도, 삐삐번호도 모르는데."

시온이는 놀란 눈치이다.

"정말?"

"아무튼 걔한테 맘주지 마. 네 할 거나 열심히 해.

난 그만 일어난다."

풀죽어 보이는 시온이.

에휴. 불쌍하다.

다시 돌아온 독서실.

평온해.

이 잔잔함이.

너무 좋아.

이 조용함.

난 다시 공부의 세계에 빠져든다.

머리 속에 차곡차곡 지식이 쌓여가는 게 느껴질 때의 쾌감.

이 맛에 공부하지!


학교는 여전히 시끌벅적하다.

미술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고,

아이들의 추리는 계속되고 있다.

"누구일까?"

"왜 우리학교 애들만 이렇게 죽는 거야?"

점심 시간.

한참 언니들 농구하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앞문이 열리더니 네 다섯 되는 고삼 언니들이 들어온다.

"자, 자, 주목!"

어?

내 짝 언니도 저기 있네?

남자 스타일로 한 머리, 호리호리한 몸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아이들은 난데없는 언니들의 등장에 깜짝 놀란 모양.

그 중에서 가운데 언니가 입을 연다.

"학생회에서 우리 학교 교복에 대한 설문 조사 중이야.

우리학교 교복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봐."

아이들 대다수가 손을 든다.

"아 빨간색 진짜 좀 어떻게 좀 해 줘요.

시뻘개가지고 이게 남자 성욕을 자극한다니까요.

김천 연쇄살인사건도 봐봐요.

타겟이 된 여자들이 다 빨간 옷 입고 있었다면서요."

진희가 크게 말한다.

아휴.

다들 헛다리들 짚고 있네.

교복색이 문제가 아닌데.

난 속으로 생각한다.

그럼 뭐가 문제야?

혜경이는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이어폰을 귀에 꽂고 뭔지 모를 책을 읽고 있다.

아오, 얄미워.

"자, 여기 설문지.

각자 설문지 작성해서 반장한테 줘.

그리고 반장은 수거되는대로 3학년 3반으로 가져오도록."

언니들이 떠났다.

오, 저 강력한 포스!

멋져, 학생회 언니들.

휴. 나도 초등학교 때는 저랬는데.

갑자기 지난 시절이 생각난다.

반장 애들과 함께 시끄러운 반들을 감독하던 그 때.

누군가 싸우고 있으면 중재하던 날들.

그때는 선도부도 자처했었다.

팔뚝에 '선도'라고 쓰여진 노란 완장을 차고.

다 지난 일이지.

그땐 리더십도 많았고 활발했었는데.

고등학교 시절이 끝나고 대학에 가면 하고 싶은 거 다 해야지.

배우고 싶은 춤도 실컷 배우고.

지금은 노는 애들이 축제 때 무대에 올라가 동방신기 춤추는 걸 바라보기만 하고 있지만,

대학생이 되면 댄스 동아리에 들어가서 실컷 춤춰야지.

그때가 되면 달라질 거야!

윤우도 본격적으로 만날 거고!

철학 시간.

아이들은 이제 철학 수업이 더 이상 즐겁지 않은 듯하다.

"자 수업 나가겠습니다. 80쪽.

오늘은 디오게네스 철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딱딱한 철학의 말투.

아무런 대답 없이 책을 넘기는 아이들.

아이들은 알고 있다.

철학이 더 이상 아이들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그런 꼰대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어느 날 왕이 와서 말했죠.

자기 밑에 와서 일해달라고.

그랬더니 디오게네스가 하는 말.

거 참, 햇빛 가리니 좀 비켜주쇼."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와의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려는 듯

철학은 뒷짐을 지며

"거 참, 햇빛 가리니 좀 비켜 주쇼!"

하는 말을 마치 연극톤으로 내뱉는다.

하지만 아무도 거기에 응답하는 아이는 없다.

차가운 반응.

냉랭한 기운.

머쓱한지 교탁 위로 돌아가는 철학.

뭔지 모르겠지만 애잔하다는 생각이 든다.

에잇, 뭐가 애잔해.

순간,

이너서클인지 뭔지 원조교제단에 철학이 속해 있다는 혜경이의 말이 떠오른다.

정말일까?

사건에 대해 뭔가를 더 물어보았다가는

전처럼 갑자기 돌변해서 버럭 소리지르는 거 아냐?

뭔가 돌려서 질문해 단서를 알아내는 방법이 있을까?

머리를 써야 해.

머리를.

아,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아.

몰라, 일단

지르고 보자!

"선생님!"

나는 번쩍 손을 든다.

수업 시간에 나서지 않는 내가 손을 들자

모두들 날 주목한다.

선생님도 긴장한 듯, 갑자기 꿀꺽 침을 삼킨다.

혜경이도 나를 쳐다본다.

"사람들은 다 실수할 수 있는 거에요!"

뭐야,

나도 모르겠다.

내가 뭔 말을 내뱉었는지.

"저도 엄마한테 그러거든요.

엄마한테 소리지르지 말아야지,

엄마한테 잘 해야지 마음은 그런데

엄마한테 짜증부리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나면 또 후회하고."

나도 몰라. 내가 뭔 말을 하는지.

숙연해진 교실.

조용히 내 말을 경청하는 아이들.

"선생님도 그랬던 거잖아요.

지난번에. 그렇죠?"

뭐야, 사건에 대한 단서를 알아낸다는 게 갑자기 왜 지난 번에 우리반에서 소리질렀던 이야기를 꺼내는 거야?

"으으흑."

뭐지, 이 소리는.

설마, 철학이 우는 소리?

"미안해요.

여러분.

정말, 미안해요.

이 말 대개 싫어하는데.

미안하다는 말.

어른이 되어서 미안하다는 말

정말 싫어하는데.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난 그런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으으흑, 철학의 울음 소리가 교실에 울려퍼졌다.

"괜찮아요."

여기저기서 "괜찮아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학생 이름이 뭐죠?"

갑자기 철학이 물어왔다.

"김소영이요."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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