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여고

5

"음......"

철학은 한동안 말이 없다.

"고맙다. 김소영."

때마침, 수업 종료를 알리는 벨 소리가 났다.

나는 느꼈다.

철학이 날 한동안 말없이 응시하는 것을.

"선생님!"

난 복도를 따라나가 그를 크게 불렀다.

도대체 무슨 생각에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무튼지 그를 잡아야만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이따가, 이따가, 철학 문제 좀 교무실에 질문하러 가도 돼요?"

"그럼! 질문은 언제나 환영이야!"

그가 예전처럼 경쾌하게 말하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었다. 내게.

교실에 돌아오자 아이들이 하나 둘 내게 말을 걸었다.

"왠일이야, 왠일!"

진희가 호들갑을 떨었다.

"대박사건! 김소영 철학의 사과를 받아내다!"

진희가 박수를 치자 모두들 따라서 박수를 쳤다.

"김소영 짱!"

"너 이런 애인줄 몰랐다."

"말 짱 잘하는데!"

난 혜경이 자리 쪽을 봤다.

여전히 도도하게 이어폰을 끼고 뭔가를 듣는 혜경이.

책 내용이 재미있는지 뭔지 살짝 웃음을 흘리고 있는 듯했다.

야.

널 위해 한 거 아니거든.

난 속으로 혜경이에게 말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사건 해결을 위해서야.

이어진 점심시간에도 아이들은 철학 시간 이야기 뿐이었다.

"철학이 울다니!

우리한테 미안하긴 했나봐."

"그러게, 나도 살짝 울컥했잖아."

"어른들도 실수를 하잖아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보는 줄!"

미영이가 내 목소리를 따라하며 말했다.

아이들이 와~ 하고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나저나 이따가 철학한테 뭘 물어보지.

내 머리 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어떻게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뭔가 단서를 얻어낼까.

그렇게 오후 수업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습 시간.

학교 아이들이 죽어나가면서 자습 시간은 말그대로 자습시간이 되었다.

자습을 원하는 아이들만 남아서 공부하면 될 뿐

아이들은 집에 가거나 학원에 가거나 했다.

그래! 이거야!

난 교무실로 향했다.


담임 자리를 지나 철학 자리에 갔다.

"선생님!

무언가를 선택함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가 우선되어야 하나요,

아니면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게 우선되어야 하나요."

난 그에게 원론적인 질문을 던졌다.

"음......"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는 보호되어야 하지."

"그, 타인의 자유라는 게 사회적 규율과 맞물려 있다면요?"

"예를 들어?"

그가 내게 반문해왔다.

"산업 혁명 때까지만 해도 지금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에서조차 아이의 인권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었잖아요.

아니, 아이의 인권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죠.

그래서, 도시의 빈민층 아이들은 밤낮으로 자기 전까지 공장에서 노동을 해야 했죠."

난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그의 눈이 내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아이에게 그렇게 노동을 시켰다가는 당장 노동법 위반으로 고발받게 되죠.

그런데,

만약 아이가 원해서 그런 거라면요?

정말 밤낮으로 일하면서 돈을 모아 부자가 되기 위해 아이가 큰 맘 먹고 그렇게 노동을 하는 거라면

그 아이의 의사는 존중되어야 하나요?

산업 혁명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우리 아버지 세대만 해도 기술 배우려고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열악한 환경에 살며

일을 배웠고 어린 여자들도 봉제 공장에서 밤낮으로 일을 해서 산업화를 이루었잖아요.

하지만 그때의 문제점은 노동법이 준수되지 않았다는 거였죠.

제가 여쭤보는 것은, 그러니까 아이들이 노동법을 준수받으면서, 혹은 이에 합당한 이익을 받으면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법에 위배된 일을 하는 경우 이 아이들의 의사는 존중해줘야 하는 건가에요."

"음......"

철학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가서 이야기할까?

여기는 선생님들이 일하는 공간이라 더 길게 이야기는 못하겠다."

철학은 나를 밖으로 이끌었다.

밖은 비가 오고 있었다.

우리는 현관에 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네가 왜 갑자기 이걸 물어보는지 궁금하구나.

왜 그런 윤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혹시 오층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그러니?"

헉.

갑자기 숨이 막혔다.

내가 당황한 걸 눈치챘는지 철학이 말을 돌렸다.

"아까 수업 시간에 네 도움으로 아이들에게 사과를 할 수 있게 되어서 고마워."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나도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왜 내가 소중히 여기는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 꼰대짓을 했는지.

난 사실 그 말이 너무 싫었어.

어른이라 미안하다.

이런 어른이 되어서 미안하다.

그런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그런 인간은 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고 들어왔는데.

그 날 내 마음이 무척 혼란스러워서 아이들에게 화를 냈던 것 같다."

철학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난 사실 그냥 인간이야.

아주 부족한.

그뿐이야.

갑자기 다혈질이 되고 화를 제어하지 못하는 그런 부족한 인간.

그런 내가 너에게 윤리적 문제나 가치에 대해 내 견해를 이야기 하지는 못할 것 같다.

난 그럴 인간이 못 돼.

그저 지식 전달만 할 뿐이야.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벅차다는 걸 이제는 알겠어.

내가 마치 뭐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했는데 난 선생이 아니야.

지식을 전달하며 밥벌어 먹고 사는 거지.

누군가에게 가치를 이야기하고 윤리를 이야기할만한 인간은 아닌 것 같다.

이게 답이 되었니?

그럼 난 이만 들어갈게.

내가 널 유심히 보진 못했어도 넌 너만의 세계가 있는 것 같아.

그 세계를 잘 지켜가렴.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말고."

그는 내게 의미심장한 말을 전달하며 자리를 떠났다.

음, 그렇군.

요약하자면 그렇게 자신이 도덕적인 인간은 아니라는 거네.

내게는 그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음, 그렇다면 그가 정말로 사건에 관련 있는 걸까.

알쏭달쏭한 채로 난 독서실로 가는 셔틀버스에 올랐다.

셔틀버스에서는 이미 혜경이가 타 있었다.

혜경이는 손을 흔들며 내게 얼른 자기 옆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활짝 웃으며.

학교에서는 온통 무표정일 뿐인 혜경이가

밖에서는 이렇게 달라지다니.

정말 모를 일이야.

"철학하고 이야기는 어떻게 됐어?"

혜경이 내게 속삭이며 말했다.

"왜 내가 너한테 말해야 하는데?"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마,

철학의 그 말이 머리속을 채우며 난 지금 혹시 혜경이에게 휘둘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 이 아이는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걸까.

"왜 너 나한테 화난거 있냐?"

혜경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니."

우리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래,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혜경이 말했다.

난 알고 있었다.

우리가 앉은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앉아 있는 시온이가 사실은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유심히 듣고 있다는 걸.

사실은 그가 귀를 쫑긋 세우며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걸 말이다.

혜경은 왼쪽을, 나는 오른쪽 창문 밖을 내다보며 독서실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 잘 보냈어?

윤우의 문자였다.

-응, 집이야.

난 선수를 쳤다.

어디냐고 물어올 게 뻔했기 때문이다.

걱정은 미리 차단하는 게 속이 편했다.

-나, 다음 주에 너 보러 가려고 하는데 시간 괜찮아?

뭐?

다음주?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차게.

방망이질 하듯이.

-아직은 모르겠는데.

내가 다시 연락줄게.

그럼 이제 나 공부해야 되서.-

-그래, 공부 열심히 해!^^-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은 한가득이었지만 마음대로 만날 수는 없었다.

지난번에 나간 것도 정말 큰 용기를 내서 나간 거였는데.

만나서 뭘 하지.

지난 번엔 어찌저찌해서 바닷가에서 이야기를 했다만 이번에는 또 어딜 데리고 가야 하나.

아오.

신경쓰여 죽겠네.

순간,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목표는 연고대에 입학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지난 오년간 입을 닫고 달려왔다.

그리고 이제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는 중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뭔가 된 듯 마냥

사건에 뛰어들고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윤우를 만나고.

이건 애초의 내 계획과는 너무 다르잖아.

원래 고3까지는

지상에 올라가기 전에 인어공주처럼

바다속에서

조용히 살기로 했잖아.

내 할 일만 하면서.

주위에 상관없이.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상관없이 말이다.

그때의 나에게서 너무 많이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때의 나를 찾아야 해.

지금 공부할 것도 쌓여있고.

이럴 때가 아니야.

김소영, 정신차려.

다시 모범생 김소영으로 돌아가라고.

그럴 수 있을까.

혜경이를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윤우를 만나러 기차역으로 달려가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예전의 나로 돌아간다면

난 다시 불행해지겠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잡힐 것이냐.

아니면 현재를 즐기며 살 것이냐.

머리속이 복잡했다.

문득 철학에게 물어본

하루종일 잠들 때까지 노동만 하는 청소년이 바로 내가 아니었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공하기 위해 현재의 시간을 온통 공부에 쏟아붓는.

친구고 뭐고 없는.

그게 나였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인가,

아니면 변화할 것인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이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려 있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호들갑 떨지 않았다.

그 대신 무거운 침묵이 교실을 채웠다.

다섯번째 죽음은,

우리반 까불이 진희였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진희가,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어제 밤에 진희 본 사람?"

담임이 왠일인지 배를 문지르지 않으며 물었다.

몹시도 정신이 사나워 보였다.

침묵이 흘렀다.

"어젯 밤에 진희하고 통화하거나 메세지 주고받은 사람?"

담임은 재차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는 애가 없었다.

충격이었다.

나서기 좋아하고 말많은 진희가 연락하는 친구가 없다니.

"그럼 너네 중에, 진희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거니?"

담임은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그제야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막달이 다가와서인지

마치 풍선처럼 담임의 배는 팽팽하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왠지, 개구리 생각이 났다.

나도 모르게.

"할 말 있는 사람은 교무실로 와서 언제라도 좋으니까 선생님한테 진희에 대한 거 알려줘.

그럼 조회 마칠게."

담임이 교실을 나가자마자

반장 미영이가 말했다.

"진희하고 친하게 지내던 애들 왜 아무 말이 없어?

뭐 숨기고 있는 거야?"

그랬다.

진희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왠일인지 그 애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진희가 학교에 안 나오고 있다고.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반장이 재차 물었다.

마치 제2의 담임을 보는 것 같았다.

"너, 재희, 진희하고 친했잖아.

어제 진희하고 무슨 이야기 한 거 없어?"

반장이 재희에게 따져 물었다.

재희는,

말하면 큰일이라도 난 다는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만 좀 해라. 반장."

갑자기 혜경이가 입을 열었다.

모두가 놀라 혜경이를 바라보았다.

"재희는 얼마나 충격이 크겠냐.

자기하고 제일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사라졌는데.

그런데 그렇게 볶아쳐야 되겠니?"

교실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재희는, 이 모든 상황이 싫다는 듯

드르륵 교실 뒷문을 열고 사라졌다.

어디로 간 걸까.

도대체

진희는 어디로 간 걸까.

그렇게 수다스럽고 말 많던 아이가,

밝고 명랑하고 쾌활해 보이던 아이가.

살인 사건에 연루된 건 아닐 거야.

그런 걸 거야.

아마도 잠시 여행을 떠난 거겠지.

머리 식히러.

잠깐 학교에 오지 않은 것 뿐이겠지.

제발, 단순 가출이기를.

나는 마음 속으로 기원했다.

아니, 우리 모두 다 기원했을 것이다.

선생님들은 교무 회의에서 무슨 지령을 전달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진희에 대해 물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를 자극하지 말라는 교장 선생님의 지시가 있었으리라.

교실 안에는 내내 무거운 침묵이 떠돌았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맞이한 종례시간.

"모두들 너무 걱정 말고.

진희는 꼭 돌아올 거니까."

갑자기 담임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진지하게 그러길 빌었다.


"오늘은 집에 일찍 좀 와줄래?"

아침에 엄마가 한 말이 생각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드물게 해 오는 엄마의 부탁이니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일까.

수업을 마치고 나니 오후 네 시였다.

난 바삐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탔다.

'무슨 일일까'를 생각하면서.

내겐 정신 지체 1급 동생이 있다.

동생은 다운증후군.

얌전하고 말 잘 듣지만 동생은 말을 잘 못한다.

의사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불쌍한 동생.

그래서, 동생은 잘 보고 있어야 한다.

항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우리 집에 같이 사는 할머니.

할머니는 고향을 떠난 후로 계속 고향 타령이다.

할머니는 작년 겨울 원래 할머니가 살던 고향 집 마루에서

떨어져 척추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겪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집에 살게 되었다.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를 말하자면 복잡하다.

딸 셋에 아들 하나인 우리 가족.

엄마는 아들 욕심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가 아들 타령을 하는 바람에

몇 번 유산을 겪어가면서 결국은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 아들이 바로 내 동생,

다운 증후군인 내 동생이다.

엄마는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

약간 원망스러워하는 것도 같다.

자신에게 아들 낳기를 계속 종용한 할머니에게.

그리고 아빠는 중간에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엄마와 할머니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그러니,

집안이 조용할 리가.

왠일이지.

엄마가 화사한 봄옷으로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엄마 어디 가?"

엄마는 내게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응, 엄마 좀 나갔다 오려고.

동창 모임이 있어서.

동생 잘 챙길 수 있지?

반찬이랑 미역국은 다 해놨으니까 저녁만 할머니 챙겨주고 동생이랑 밥먹고

아빠 오면 저녁 해드리고.

그럼 엄마 나갔다 온다."

엄마가 저렇게 좋아하면서 나가는 건 거의 처음 본 것 같다.

늘 생기 없고 지쳐 있는 엄마가 저렇게 밝은 모습으로 밖에 나가다니.

그래, 오늘은 내가 엄마 몫을 다 해야지.

사실, 동생은 별로 봐 줄 게 없다.

동생은 워낙 조용하기 때문이다.

다운증후군이란 '천사의 병'이라고도 불린다.

왜냐하면 그만큼 조용하고 다른 정신지체와는 달리 사고를 치지 않기 때문이다.

할머니!

할머니를 생각하면 국수가 떠오른다.

언젠가 할머니를 따라 시장에 갔을 때, 내가 아주 어렸을 때였는데

할머니가 장터에서 국수 한그릇을 주문했다.

그리고는 나보고는 국수 가락을 먹으라고 하고,

내가 젓가락을 내려놓자 그제서야 할머니는

국수 그릇을 가져가 국물을 마셨다.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할머니는 고향 집이 그리운 것이다.

결혼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일구며 자식들을 키워내고 조금씩 평수를 넓혀 온, 뒤뜰에 고추나무며 대추 나무,

감나무가 있는 그 고향집이 그리운 것이다.

"소영아. 할미 좀 기차역에 데려다 주련."

나를 보자마자 그 소리.

'할머니,

할머니 시골 집은 이미 엄마 아빠가 팔아버렸다구요.'

나는 차마 이 말을 하지 못한다.

"할머니, 아파서 안 돼.

우리랑 살아야 돼."

씨도 안 먹히는 이야기를 한다.

"아녀, 아녀.

나 혼자서 잘 살 수 있어.

나 좀 데려다 줘."

엄마, 아빠는 밤새 이 이야기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길래, 왜 할머니 집을 팔았을까.

하지만 병원에서는 할머니 혼자 살기는 힘들다고 이야기했고

노령의 할머니가 혼자 지내시다가 무슨 일을 당할 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엄마 아빠는 그 집을 정리한 것이었다.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야.

아. 복잡하다. 복잡해.

"할머니, 이제 그만해!

그만하라구요!"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나도 할머니에게 잘 하고 싶은데,

고향집 타령을 하는 할머니를 보면 가슴이 갑갑해진다.

하지만 할머니는 또 얼마나 답답할까.

지금의 현실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동생은 소리지르는 나 때문인지 내 눈치를 살살 본다.

아,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

내 방으로 들어간다.

난 착한 딸이 되기는 다 틀렸나 보다.

집에 온 지 몇 분도 안 되어 집안 분위기를 더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나.

에휴.

공부나 하자.

윤우한테 연락이나 해 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내 팔자에 무슨 남자친구야.

시궁창 같은 내 현실.

수학 문제집을 꺼낸다.

삼각함수.

풀리지 않는 삼각함수 문제같은 우리집 상황.

그리고 내 상황.

한숨만 난다.

이 모든 상황을 매일 겪어야 하는 엄마는 얼마나 힘들까.

엄마도 불쌍하고 다 불쌍하다.

얼른 내가 잘 되어서 효도해야 할 텐데.

그러려면 좋은 대학에 가는 수밖에 없다.


풀리지 않는 삼각함수 문제를 기를 쓰고 풀고 있는데

'딩동'

소리가 난다.

아빠다.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인사를 한다.

"엄마는?"

무뚝뚝한 아빠.

"엄마, 동창회 있다고 나갔어."

아무 말 없는 아빠.

침묵이 흐르는 저녁.

젓가락질 소리만 오가는 저녁.

아니, 이 곳의 침묵을 깨는 게 있지.

그것은 저 망할 텔레비전.

뭐라고 뭐라고 떠드는 저 텔레비전.

아빠는 할머니의 읍소를 사전에 방어하려는 듯

텔레비전 소리를 크게 틀어놓았다.

귀가 멍멍할 정도이다.

아무 말 없이 젓가락질을 하는 아빠.

갑자기 젓가락질을 멈추고

잘 먹고 있는 동생에게

"똑바로 앉아 먹어!"

하며 소리를 친다.

약간 삐뚜름하게 앉아 있는 게 맘에 걸린 모양이다.

저놈의 소리치는 건 이 집안의 유전인 듯하다.


답답해.

엄마가 얼른 왔으면 좋겠어.

마음 속엔 온통 이 생각 뿐이다.

"부산시 도정동에서 오늘 오후 네 시 경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오마이갓!

혹시!

"십대로 추정되는 여자의 시신이 광안리 해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바다에서 밀려온 것으로 추정되며

경찰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하고 있습니다."

오 마이 갓!

혹시 진희인가.

가슴이 요동쳤다.

말도 안 돼!

진희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니!


학교는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럴 아이가 아니다.

그렇게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 라는 의견이 팽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아이는 우리 반의 오락 부장을 맡고 있는 분위기 메이커였으니까.

"모든 사람은 양면성이 있는 거야."

반 아이 중 누군가가 말했다.

그렇게 겉으로 쾌활해 보이는 아이일수록 속으로 썪어 있는 경우가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진희라니.

"네가 진희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재희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재희였기에,

진희의 베프이면서 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재희였기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럼 뭔데?"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됐어.

지금은 말하기 싫어."

다시 재희는 입을 꾹 다물고 교과서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진희는 자살일까.

난 그게 가장 궁금했다.

아니면 자살을 위장한 타살?

경찰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하고 있다고 했다.

오마이갓!


다음은 미술시간이었다.

네번째 아이가 음악실에서 죽은 채로 발견 된 후,

학교에 내내 나오지 않던 그 미술샘이 바로 어제부터 출근을 시작한 것이었다.

말로는 모든 혐의점을 벗었다고 했지만

사실일까.

과연.

미술의 얼굴은 한층 초췌해 보였다.

오늘은 석고로 자신의 얼굴을 뜨는 작업을 했다.

아이들은 모두 신이 나 있었다.

석고 가루를 가져가 물에다 개고

그리고 물에다 개어져서 끈적끈적해진 석고 액체를

가져다가 얼굴에다 발랐다.

으,

숨막혀!

죽은 아이도 이렇게 숨막혔을까.

석고 액체 안에서는 숨을 잘 쉴 수가 없었다.

참아야만 했다.

그 후의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석고로 얼굴 모양을 뜨고 나서

그 안에다가 무언가를 바르고

다시 석고로 안을 채웠다.

그랬더니 석고와 석고틀이 분리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얼굴 모양이 입체적으로 드러났다.

오마이갓!

넙데데한 얼굴.

역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석고틀은.

난, 이렇게 생겼구나.

코도 낮고,

얼굴도 크고.

이게 나야......

이 모든 과정을 진행하면서 미술샘은 친절했다.

그는 정말 젠틀한 사람이었다.

늘, 우리에게 경어를 쓰는 사람.

그가 흥분해서 말할 때는 자신의 쌍둥이 딸을 자랑하는 때 말고는 없었다.

"우리 아이가 바나나 똥을 쌌지 뭐야."

에이.

우리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아도 그 때의 그는 흥분에 찬 어조로 눈을 번뜩였던 게 기억난다.

그런데,

그가 성범죄자라고.

미성년자와 그걸 하면서 교복을 못 벗게 했다고?

그리고 이너서클인가 뭔가의 조직원이라고?

혜경이 말에 따르면 그랬다.


문득

"사람은 양면성이 있는 거야."

라고 말하던 반장 미영이가 생각났다.

그러면 넌 무슨 양면성을 가지고 있니.

난 무슨 양면성이 있을까.

난 확실히 양면성이 있다.

겉으로는 말이 없고 조용해도

마음 속으로 활활 타오르는 정열의 불이 있다.

이 정열의 불을 대학 때 태우기 위해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것 뿐이다.

공부만 하는 것이다.

혜경이의 양면성은 말해 무엇하고.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지만

밖에서는 날라리인 혜경이.

그래,

미영이 말대로 우리 모두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희는.

진희도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혼자 괴로워하면서 누군가와도 나눌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그게 무엇이었을까.

몹시 궁금해진다.


이따 진희네 집에 가볼까.

아니,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마.

난 진희네 집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

언젠가 진희와 짝꿍이 되었을 때 진희가 인적사항에 자신의 집을 적는 걸 보았다.

그 동네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부촌 동네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동네 이름을 외워버렸다. 몇 번지인지도.

내 머리가 좋은 걸 어쩌라고.

내 아이큐는 아마 우리 반에서 제일 높을 것이다.

학기 초 개별 면담 때 선생님이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열심히 하면 연고대는 문제 없다는 말을 하면서 면담이 끝났었다.

그래, 할 수 있어.

그게 무엇이든 간에, 잘 해낼 수 있어.

가봐야 하나.

괜한 오지랖인가.

하지만 같은 반 친구잖아.

같은 반 친구가 죽었잖아.

어줍짢은 참견일까.

가야 하나, 가지 말아야 하나 사이에서 난 방황하고 있었다.

"오, 잘 만들었네."

갑자기 미술샘이 아는 척을 해왔다.

"아주 꼼꼼히 석고 틀을 잘 떴어요.

잘했습니다.

작품이 아주 깔끔하게 나왔어요."

그는 나를 지나쳐 교탁에 섰다.

"자, 이제 이 석고가 굳으면 그 위에 예쁘게 색칠을 할 거에요.

그때까지 석고는 사물함 뒤편에 번호대로 배치해 놓으세요.

반장은 책임지고 통솔해 주세요."

이가 빠지면 잇몸이 대신한다고 했나.

갑자기 누군가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영진이였다.

늘 잠만 자다 집에 돌아가는 아이.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잠만 자다 집에 돌아가는 아이였다.

학교에서는 놀랍게도 영진이에게 제재를 많이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사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선행을 미리 하기 때문에

학교 수업이 이미 시시하다는 것 쯤은 학교 선생님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진이의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그런 영진이가 학교에서 잠만 잔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것 같았다.

"하기 싫어요!"

영진이의 돌발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시간 아까워요."

말도 안 돼.

어차피, 너 잠만 자잖아.

뭔 소리를 하려고 저러는 거지.

"차라리, 잠 자는 게 낫지.

제 얼굴 석고 뜰 시간에.

무슨 초등학교 애들 미술시간인가요?

이런 거 다 왜 하는 거에요?

어제 열두시까지 학원 갔다 와서 겁나 피곤하다구요.

어차피 점수에도 안 들어가는 거

걍 안 하면 안 돼요?

전 어차피 수시로 대학 갈 거라,

수능 점수만 있으면 돼요.

수행평가 상관 없다구요."

아이들은 조마조마하게 미술을 쳐다보았다.

미술은 의외로 꿈쩍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알게 될 거다.

이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열 여덟, 자신의 얼굴을 만들어보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나중에는 알게 될 거야."

뭐야.

갑자기, 왠 노땅 같은 말.

하지만 영진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중은 나중이구요.

아우. 지겨워 죽겠네.

하기 싫다구요.

이런 거.

그냥 원래대로 그림이나 끄적거리고 대충 시간만 때우다가 가지

갑자기 왜 석고 뜨기라니.

갑자기 뭐에요?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기셨나?"

"야, 그만해."

보다 못한 반장이 말렸다.

"그만해. 이영진. 너 선생님한테 무슨 말버릇이 그래.

그만해라.

죄송합니다. 선생님."

철학 수업 때 아이들의 말에 갑자기 눈이 뒤집혀진 철학 쌤의 경우가 생각나서인지

반장은 먼저 나서서 사과를 하는 것 같았다.

그와 같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듯.

"아니에요. 여러분 나이에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여러분, 지금은 대학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에게 공부하지 말라고 이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추억도 쌓고 우정도 쌓는 게 중요하다는 걸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더 이상 꼰대 같은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때 꽃처럼 피어나는 지금,

지금 여러분은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때를 석고로

남겨주고 싶었어요.

그 뿐입니다.

그래서 이 미술 수업을 기획한 겁니다.

괜한 오지랖이라면 미안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공부할 시간 빼앗았다면 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미술은 찬찬히 모두를 둘러보며 이야기했다.

이 사람이 그런 나쁜 인간일 리 없어.

갑자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오해가 있던 걸 거야.

혹시 혜경이의 말이 다 거짓인 거 아닐까.

도대체 그 아이는 믿을 수가 없으니.

아무튼지 선생님의 그 말

'지금 너희가 얼마나 예쁜지 너희는 잘 모른다.',

'우정도 쌓고 추억도 쌓고'

이 문구가 가슴에 남았다.

그리고

진희의 공백이 강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가봐야겠어.

이건 같은 반 친구로서의 도리야.

나는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종례시간.

선생님의 표정은 매우 쓸쓸해 보였다.

사인이 무엇이건 간에 자신 반 아이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다.

"여러분, 선생님은 항상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 힘들 때

제발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선생님한테 이야기를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선생님은 진지하게 말했다.

의외로 우리들을 걱정해주는 어른들이 많구나.

다들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교직에 진심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철밥통이라고 선생님들을 비꼬았던 나를 반성했다.

아무튼지, 이제 진희 집에 갈 때였다.

나는 진희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진희야,

잠깐만 기다려.

너의 흔적,

네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내가 대신 알아줄게.

그리고 그 동안 네 어려움을 미리 헤아리지 못해 미안했어.

버스에 앉아

난 진희에게 마음 속으로 말했다.

이전 04화빨간 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