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여고

7

그 때였다.

갑자기 밑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너냐?"

딱 보기에도 불량스러워 보이는 언니들.

"학교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다는 애가 너야?"

뭐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짝언니?

짝언니가 이 언니들한테 내가 한 이야기를 한 걸까?

도대체 왜?

그리고 이 언니들은 누구지?

무서워.

혹시 짝 언니가......

갑자기 짝 언니의 정체가 무서워졌다.

일진인가?

같은 패거리인가?

그런 건가?

왜 짝 언니가 가고 갑자기 이렇게 험상궂게 생긴 언니들이 등장한 거지?

치마를 엉덩이 밑으로 바짝 치켜입은 언니.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머리 군데군데 노란 염색을 한 언니가 내게 서서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 언니 옆에 세 명이 더 서 있었다.

한 언니는 에퉤, 하며 침을 뱉었다.

"너, 뭐야?

왜 여기저기 캐고 다니고 있어?"

나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오마이갓!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등 뒤에 난간이 닿았다.

난간 너머로 떨어지면 바로 오층에서 추락하는 것이다.

언니들은 슬금슬금 나를 난간쪽으로 밀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서 힘이 솟았을까.

"왜, 뭐 찔리는 거 있냐?"

나도 모르게 반말이 나왔다.

싸움이라면 초등학교 때 나도 겁나 많이 했거든.

난 일진도 건드리지 못했던 애야.

그리고 나보다 덩치가 세 배는 큰 애하고 싸워서 이긴 적도 있고.

올라타서 막 주먹으로 정신없이 때렸거든.

갑자기 오기가 솟았다.

나는 싸울 태세를 잡았다.

침을 뱉은 년이 노란 머리 년에게 뭔가를 건넸다.

야구 방망이였다.

"이게 뒤질라고."

노란 머리는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다.

나는 몸을 홱 돌려 방망이를 피했다.

"어쭈. 이게 피해?"

노란 머리가 야구 방망이를 땅에 내던졌다.

그리고 내 머리채를 확 낚아챘다.

"아, 씨발."

욕이 절로 나왔다.

좆같은 년들.

다 죽었어.

개년들아.

난 노란 머리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다.

저기, 노란 머리가 나가 떨어졌다.

그러자 나머지 세 명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타.

두 팔로 얼굴을 막아보았지만

엉덩이며 등이며 배며

사정없이 그년들의 발이 달려들었다.

아파. 씨발.

이렇게 죽는구나.

윤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토요일날 윤우를 만나기로 한 것도.

여기서 나가야 돼.

윤우의 밝은 얼굴을 생각하자 갑자기 힘이 솟았다.

나는 발차기가 순간 멈춘 틈을 타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 일어섰다.

"다 덤벼! 이 시발년들아."

와다다다.

노란 머리 년까지 일어나서 내게 달려오는 순간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지나갔다.

한 년이 내게 주먹질을 하는 게 보였다.

난 그 주먹질 아래로 머리를 넣어 그 년의 배를 머리로 박았다.

그리고 뒤로 넘겼다.

"다음 년 나와. 비겁하게 뭉쳐서 덤비지 말고 다이다이로 붙어."

씨발.

저건 뭐야.

칼?

한 년이 주머니에서 꺼내는 건 칼이었다.

"야. 얼굴 붙잡아.

이 년 성형 좀 시켜주게."

노란 머리 년이 칼을 건네받으며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시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난 칼을 들고 있는 그년의 오른 팔을 발로 차버렸다.

그리고 재빨리 칼을 주웠다.

"자, 덤벼."

그러자 모두들 주춤거렸다.

"이런 좆같은."

그 때였다.

"그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그만해."

혜경이 목소리였다.

"뭐하는 거야. 지금."

"넌 껴들지 말고 있어."

노란머리 년은 혜경이에게 경고했다.

"언니야 말로 뒤지고 싶어?

정우 오빠한테 다 불어?"

혜경이는 노란머리 년에게 바짝 다가가서 말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얘 건드리지 마.

다 다치기 전에."

혜경이가 엄숙하게 말했다.

"야, 너 이 년이 뭐하고 다니는지 아냐?"

노란머리 년이 혜경이에게 물었다.

"몰라. 낫 오브 마이 비즈니스.

하여튼 건드리지 마.

그랬다간 알아서 해.

다 골로 보낼 테니까.

언니들 대접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선 넘지 마."

"에이 시발."

네 명은 일제히 침을 퉤퉤 뱉고 자리를 떠났다.

옥상에 남은 나와 혜경이.

"뭐냐, 너?"

혜경이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얼른 말하는 게 좋을 거다.

좋은 말로 할 때."

혜경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널 뭘 믿고.

방금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했는지 알아?

아까 짝 언니한테 솔직하게 말했다가 이 꼴 당한 거야.

그런데 너한테 또 솔직히 말하라고?

너는 뭐가 달라?

쟤네들하고?"

"아니, 나도 똑같은 년이야."

혜경이가 담배를 꺼내물며 말했다.

"그래, 말하지 말아라.

하기 싫으면.

괜히 나까지 알면 더 골치만 아프지.

그런데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게 좋을 거 같다.

네가 뭘 캐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년들이 앞으로 더 달려들 거다."

"뭐가 찔리는 게 있나보지?

혹시 쟤네들도 다 이너서클인가 뭐시기냐?"

"그건 알거 없고."

그랬구나.

혹시나 내가 뒤를 캐다가 자신들의 나쁜 짓이 발각될까 봐 저러는 거구나.

"그렇다면 전해.

내가 캐고 있는 건 그놈의 더러운 이너서클인가 뭔가하고 아무런 상관 없다고.

내가 쫓고 있는 건 육각별이야."

"육각별?"

갑자기 혜경이가 와하하, 웃었다.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육각별이 뭐냐."

"그런 게 있다."

문득 혜경이는 날 믿어줄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난 진희네 집에서 보았던 육각 무늬와

죽은 아이의 사물함 속 육각 무늬 그림,

그리고 재희의 교복에 수놓아진 육각 무늬에 대해 말했다.

"그래서 짝 언니한테 말했더니

짝 언니가 고 3 죽은 언니네 집에 같이 가보자면서 자기가 주소 알아오겠다고 하는 거야.

그리고 먼저 내려갔는데

저 언니들이 올라오더라고."

"에이. 도둑이 제 발 저린 거지 뭐."

혜경이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저 년들이 연관된 거야?"

혜경이가 날 보았다.

표정이 진지했다.

"너, 내가 말했던 거 기억나지.

미술샘이 용의 선상에 올랐던 거.

네 말이 맞아.

쟤네들 다 이너서클 애들이야.

그래서 쟤네들은 혹시라도 그게 발각될까 봐 벌벌 떨고 있는 거야.

그리고 니 짝언니인가 뭔가 하는 애는 쟤네 끄나풀이고.

그래서 그런 거야."

"그런데 넌 대개 태연하다."

난 혜경에게 말했다.

"알아보니 아니더라고.

미술샘은 그 일하고 아무 상관이 없더라고."

혜경은 씩 웃으며 담배를 비벼껐다.

"그럼 나 먼저 간다.

담배 피러 왔다가 이게 뭐냐.

육탄전 구경하고.

간만에 스펙터클한 구경 잘하고 간다.

그럼 이따 보자."

혜경은 등을 돌렸다.

그랬구나.

그런 거였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은 고3언니에 대해서 정보를 어디서 알아내야 할까.

"야. 이혜경."

난 혜경을 불렀다.

"도와주라."

"내가 왜?"

혜경이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이제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을 내가 왜?"

할 말이 없었다.

하긴,

자기네 이너서클인가 뭐시기인가 하고 관련도 없는 일을 혜경이가 나서서 도와줄 리 만무하지.

쟤 성격에.

"불쌍하잖아."

"뭐, 불쌍?"

혜경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

이상하잖아.

육각형으로 연결되는 게.

그리고 나 재희가 걱정돼.

혹시라도......"

난 말을 얼버무렸다.

혹시라도 죽을까 봐,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로 현실이 될까봐서.

"더 이상의 죽음은 막아야 할 거 아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헐. 정의의 사도 납셨네."

혜경이가 비아냥댔다.

역시.

역시나.

에휴. 내가 너한테 뭘 기대하냐.

난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가라 가.

난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무 일도 모른다는 듯이.

그렇게 맑았다.

"그래서, 뭐가 필요한대."

갑자기 혜경의 말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혜경이를 보았다.

"도, 도와주게?"

"마음 바뀌기 전에 말해라."

"주소.

죽은 고3언니 집주소."

"알았어. 그것만 있으면 되는 거야?"

"같이 가 주면 더 좋고."

혼자 가는 것보다 아무래도 같이 가면 더 나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졌다.

암튼 이따 봐."

혜경이 옥상에서 떠났다.

휴.

끝났다.

갑자기 급작스럽게 피곤함이 몰려왔다.

나도 모르게 대자로 누워버렸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낮에 하늘을 바라본 적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

매일 집과 독서실만을 오가며 살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셔틀 버스 타기 바쁘고

저녁 먹고 별 보며 독서실 가기 바쁘고

집에 와서는 잠자기 바쁘고.

원래대로라면 지금 한창 자율학습에 매진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이렇게 싸움을 하면서

뭔가를 찾아내려고 사활을 걸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나 스스로의 변화가.

그리고 그 변화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만 생각하고 살 때보다는

지금의 내가 훨씬 더 맘에 들어.

문득 아까 그 년들과의 싸움이 생각났다.

에유.

싸움도 잘 못하면서

폼만 잡기는.

하하하.

박치기로 한 년을 넘겼을 때,

칼을 발로 차서 떨어뜨렸을 때

쾌감.

그 년들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하하하.

웃음이 났다.

빈 하늘을 보며

누워서 난 크게 웃었다.

이제 남은 건 일학년 아이.

방과 후에 집으로 귀가하다가 놀이터에서 실종된 아이.

그 놀이터 벤치에서는 그 아이의 안경과 책가방 등이 발견되었다.

그 아이는 지독한 근시였다고 한다.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어디를 끌려간 걸까.

내가 그 아이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 정도이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어떤 경로로 알아낼까.

벌써 알음알음 내가 사건의 뒤를 캐고 다닌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있는 이 마당에.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알아야 했다.

그 아이에 대해서.

일학년 후배와 나와는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하나도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마음 한 켠에서는 다가오는 토요일, 윤우와의 데이트가 몹시 기다려지고 있었다.


윤우.

보고 싶어.

내 마음의 빛이자 안식처인 윤우.

삼학년 언니 집의 연락처를 알려준다는 혜경이는 아직 별다른 답을 해주지 않고 있다.

독서실로 가는 길.

우리는 그저 서로의 옆에 앉아 갈 뿐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시온이와 혜경이 사이에 끈끈한 뭔가가 있다는 것을.

자꾸 시온이가 뒤를 돌아본다는 것을.

빙그레 웃으며.

혜경이도 몹시 신경쓰지 않는 척 그때마다 하지만 자세를 고치거나 귀 뒤로 머리를 넘기거나 하고 있다.

둘 사이에 뭔가가 오가고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

그때 혜경이가 시온이를 인공호흡으로 살려주고 난 후부터 생긴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그래.

나는 너희 커플 지지해.

혜경아.

이너서클인가 뭐시기 하는 이상한 데 다니지 말고 착한 시온이랑 오손도손 잘 지내 봐라.

나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응원을 하지만 절대 혜경이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말했다가는 우웩, 하면서 역효과가 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와, 시원한 바닷가다!

문득 윤우와 왔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윤우와 함께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게 부드럽게 용기를 북돋아주던 윤우의 음성도.

그 해맑은 얼굴도.

이제 다시 볼 수 있다.

이번 주 토요일에!

마치 깊은 바다처럼 조용한 독서실.

다들 저마다의 목표와 꿈을 가지고 깊은 바다 밑에 있는 우리는.

십대.

명절 때마다 만나는 작은 아버지는 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너희 때가 좋은 거다" 이렇게 말씀해주신다.

그리고 풀어놓는 외국 초콜렛.

작은 아버지의 직업은 파일럿, 국내에서 제일 가는 항공 회사의 기장이다.

그 작은 아버지는 할머니의 자랑이다.

작은 아버지는 일년에 한 두번밖에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가족 전체가 캐나다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작은 아버지는 기러기 아빠로 한국에 남으며 캐나다에 있는 작은 어머니와 세 딸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기장으로 일하면서.

요새 할머니는 부쩍 작은 아버지를 찾는다.

"고향에 보내달라"하고 읍소할 사람을 찾는 것이다.

누구보다 총명했던 작은 아버지에게 기대고 싶은 것이다.

그때마다 작은 아버지는 비행 때문에 바쁘다고 둘러대지만

가끔 할머니와 작은 아버지가 통화하는 걸 들으면 짜증이 난다.

"집에 보내줘. 여기 감옥이야."

애원하는 할머니.

듣지 않아도

"어머니. 형네 집에 계세요. 어머니 아프셔서 이제 혼자 못 사세요.

형수님하고도 잘 지내시고요."

하고 이야기 할 작은 아버지가 훤하다.

도무지 끝이 나지 않는 평행선.

그 평행선을 가운데 두고 선 엄마와 할머니.

엄마는 할머니의 손주 타령 때문에 장애인 남동생을 낳게 되었다는

원망 때문인지 할머니에게 사근사근 대하지 않는다.

그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엄마는 유산도 많이 했다.

뱃 속 아이의 성별이 딸이라는 이유로.

그때마다 얼마나 피눈물이 났을까.

그리고 얻게 된 귀한 아들.

엄마와 할머니의 싸움을 들을 때마다

어서 빨리 여기를 떠나고 싶은 생각 뿐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윤우와 멋진 대학생 라이프를 보내야지.

할 수 있어!

오늘 해야 할 공부표를 점검한다.

자, 이제부터 가보자.


막 수학책을 펴고 문제를 풀려는 순간.

응?

누군가 내 어깨를 치는 게 느껴진다.

아 누구야, 귀찮게스리.

뒤를 돌아보려는데

시온이가 빙그레 웃고 있다.

그러면서 나가서 이야기하자는 신호를 보내온다.

약간 인상을 찌뿌리며 따라 나간다.

보나마자 혜경이 이야기 하겠지.

"넌 이프로 부족할 때 먹을 거지?"

시온이가 자판기 앞에서 묻는다.

"무슨 일이야.

얼른 말해.

공부해야 하니까."

시온이가 이프로 부족할 때 병뚜껑을 따고 내 앞에 놔준다.

오, 스윗한데.

"나 고백하려고. 혜경이한테."

"지금 그 말 하려고 불렀니?"

"너 혜경이하고 친하잖아.

혜경이 뭐 좋아해?"

아이구, 이 순진한 아이를 어떻게 할까.

조건 만남 하고 다니는 애한테 고백을 한다니.

"돈?"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낯빛이 우스워 웃음이 난다.

"돈? 얼마나?"

되묻는 시온이.

"많을수록 좋겠지?"

내 대답에 시온이의 얼굴이 울상이 된다.

"어쩌지. 나 돈 별로 없는데."

이제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야. 내가 전에도 말했지.

맘 접으라고.

혜경이 좋아하지 말고 그 시간에 공부나 해라.

나 일어난다."

의자에서 일어선다.

어차피 의미없는 대화이다.

그때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나, 알아.

걔 뭐하고 다니는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도서관에서 나가서 어디로 가는 건지 택시타고 따라가 봤어."

"그럼 알겠네. 걔가 뭐하고 다니는지."

난 심드렁하게 말한다.

"아니. 걔 그런 애 아니야."

"뭔 소리야?"

"네가 생각하는 원조 교제나 하는 그런 애 아니라고."

이건 갑자기 무슨 개소리?

"내가 따라가 보니까 혜경이가 멈춘 곳은 달동네였어.

마을공부방이라고 써 있었는데 거기서 혜경이가 내리더라고."

이건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내가 걔 검은 세단 타고 사라지는 걸 봤는데.

그리고 걔 입으로도 자기가 이너 서클이라고 이야기했고.

"그래서 나도 몰래 따라 올라가 봤어."

"그랬더니?"

"애들이 언니!, 누나! 하면서 혜경이를 반기더라고.

그리고 뭐 같이 이런 저런 이야기 하면서

공부도 알려주고 애들하고 이런 저런 상담도 해주던데."

뭐?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말도 안 돼.

혜경이가 봉사 활동을 한다고?

이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난 거기까지만 보고 들킬까 봐 얼른 나왔어."

흠.

혼란스럽다.

혜경이의 정체가.

"근데, 그거 알아?"

갑자기 시온이가 물어온다.

"뭘?"

"나 사실 그때 쓰러졌을 때 말야.

혜경이 입술이 첫번째 닿았을 때는 아마도 의식을 잃었을 때였겠지만

혜경이가 계속 인공 호흡 해주었잖아.

그러면서

사실, 너무 좋았다. 으흐흐."

으이구.

좋기도 했겠다.

에이구. 맘대로 해라.

"알았어. 알았어. 네 맘대로 해.

고백을 하건 말건.

돈다발을 던지건 진솔한 편지를 건네건."

"사실은 이 말이 하고 싶어서 부른 거야.

어쩌면 혜경이,

네가 알고 있는 그런 애 아닐 수도 있다는 거."

시온이가 진지하게 말한다.

아오.

혼란스럽다.

"알았어. 알았어.

아무튼 고백 잘 하고

성공을 빌어줄게."

정말 알 수 없는 아이야.

혜경이란 아이는.

그거 하나만은 확실하다.

공부나 하자.

토요일날 윤우 만날거라 그 날 해야할 공부량까지 미리 해놓으려면 부지런히 해 놓아야 한다.

그건 그렇고 일학년 아이는 어떻게 접선하지.

음. 머리속이 복잡해진다.

일학년 후배들, 일학년 후배들이라.

내게도 짝 후배가 있긴 한데.

이번에 짝 언니에게 당한게 있어서

짝 후배에게 섣불리 접근하기가 좀 그렇단 말야.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아, 나도 모르겠다.


드디어 다가온 토요일.

초등학교 때는 다리가 날씬해서 치마가 잘 어울렸는데

지금 치마라니, 말도 안 된다.

내 다리가 그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굵어졌다.

어쩔 수 없어.

까만 통바지를 입어야지.

그리고 회색 티셔츠를 입고.

정말 수수하군.

어쩔 수 없어.

살찐 나에게는 지금 이 착장이 최선이야.

나도 모르겠다.

이미 내 마음은 내 달리고 있는 걸.

기차역으로.

"야. 김소영. 너 좀 나와봐라."

갑자기 들려오는 아빠의 목소리.

"이게 뭐냐."

아빠의 손에 들려있는 건 성적표?

아마도 기말고사 성적표가 집에 도착했나 보다.

"야. 너 좀 앉아 봐."

아빠가 일장 연설을 하려는 순간

이 일장 연설을 듣다가는 윤우와 만나지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멈추어야 한다.

"아, 아빠!

그래, 내가 수학이 좀 안 나왔지?

그래서 열받았지?"

갑작스런 내 말에 놀란 듯한 아빠.

예전 같으면 아빠의 불호령에 눈물을 뚝뚝 흘렸겠지만

난 예전의 내가 아니다.

나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의 나는 예전과 다르다.

"내가 좀 더 열심히 할게.

암쏘 쏘리.

난 일이 있어서 그만."

갑자기 달라진 내 태도에 벙찐 아빠의 표정.

그러나 저러나 난 지금 윤우를 만나러 가야 한다구요.

냅다 기차역으로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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