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여고

8

"윤우아!"

깔끔한 흰색 티와 청바지를 입은 윤우가 웃으며 다가오고 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지금, 이렇게 만날 수 있는데 난 왜 그 만남을 대학 뒤로 미루려고 한 걸까.

윤우가 날 좋아했던 것은 단지 내 외면때문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윤우는 내 안의 정의로움을 좋아했던 거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그걸 알고나자 내 넙데데한 얼굴과 몸집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윤우를 만나는 데 있어서.

"소영아!"

윤우는 나에게 무언가를 준다.

작은 빨간색 상자이다.

그 안을 열어보니 목걸이가 나온다.

오 마이갓!

하트 모양 목걸이.

와, 기분 최고다!

하지만 윤우와 할 게 있다.

"윤우야, 지금 나하고 같이 갈 데가 있어."

사실 지난 며칠간 난 일학년 교실을 돌며 실종된 아이에 대해서 조사를 해왔다.

환경부 부장이었다는 것.

모두가 그 아이를 좋아했다는 것.

사물놀이 반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을 탐문해 보았다.

동아리 회장은 대개 2학년이 맡는다.

그래서 난 우리반 사물놀이 동아리 아이를 통해 사물놀이 반 동아리 회장 아이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사물놀이 반 아이는 2학년 동백반이었다.

우리 반 아이는 동백반으로 가 나와 회장 아이를 연결해 주고 바로 가 버렸다.

동아리 회장 아이는 날 경계하는 듯했다.

하여튼지 처음 물꼬를 트는 게 어려워.

에라 모르겠다.

"도와주라.

난 지금 도희의 죽음에 대해서 조사하는 중이야."

그 아이의 반응은 싸늘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별 수 없이 그 간의 조사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진희네 집에서 보았던 육각별,

그리고 진희의 가장 친한 친구의 교복에 수놓아진 육각별.

이학년 실종된 아이 사물함에 그려져 있던 육각별 그림까지.

동아리 회장 아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러니까, 너 지금 그 육각별인가 뭔가하고 도희하고 관련이 있다는 거야?"

그 아이는 내게 물었다.

"그럴수도 있다는 거야.

네 도움이 필요해.

뭐 짚이는 거 없어?"

그 아이는 나를 복도 구석으로 데려갔다.

"도희가 나에게 사라지기 전에 내 생일에 엽서를 준 게 있어."

"엽서?"

"응."

"무슨 엽서인데?"

"잠깐만 기다려."

사물놀이반 회장 아이는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이거야."

오마이갓!

-안녕.

나 도희야.

그동안 우리 사물놀이 반을 잘 이끌어주어서 정말 고마워.

내가 언제 가장 신나는지 알아?

정신없이 장구를 칠 때야.

그럴 때면 모든 근심이 사라지거든.

네가 초보자인 나에게 장구를 천천히 잘 가르쳐 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

곧 여행을 떠날 내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을 거야."

여행?

여행이라?

하지만 여행이라는 말보다 날 더 놀라게 한 것은

'도희로부터'라는 말 옆의 육각형 모양이었다.

거북이 등짝지 같이 육각형 모양이 연결되어 있는그 그림.

뭐야.

소름이 돋았다.

"이것 봐.

이 육각모양들이 내가 지금까지 모아온 증거들이야.

죽거나 사라진 아이들은 모두 이 육각 모양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아이, 재희 역시도 이 육각 모양을 교복에 수놓고 다니고 있고."

사물놀이 반 회장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해?"

그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난 머리를 굴렸다.

"뭐, 또다른 단서 없어?"

"글쎄.... 그 아이가 스트레스 받으면 해운대 가서 바다 보는 게 낙이라는 이야기를 하긴 했었는데."

"그런데, 왜 사라진 곳은 놀이터일까."

"그건 나도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

나도.

아무튼지 그 놀이터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윤우와 함께 그 놀이터에 가보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그 놀이터는 그 아이의 아파트 근처의 공원안에 있다.

"너 걔네 집 어디 아파트인지 알아?"

가산동 로얄 아파트 앞의 공원.

난 입속으로 몇 번 되뇌였다.

그리고 지금 윤우를 만나 그 공원에 가보려는 것이다.

갈데가 있다는 말에 윤우는

"그래!" 하고 별말없이 나를 따른다.

듬직하다.

초등학교 때는 나보다 목 하나가 작았었는데

지금은 내가 올려다 봐야 할 정도로 자란 키.

훤칠한 외모.

나는 미리 알아 둔 로얄 아파트 가는 방향의 버스를 탄다.

윤우는 아직까지 나에게 별 질문이 없다.

반면에 내 마음 속은 복잡하다.

그 아이는 왜 거기에 간 걸까.

왜 거기서 실종된 걸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학교 생활은 어때?"

난 인사치레로 윤우에게 묻는다.

"뭐, 애들도 2학년이 되어서인지 다들 말 잘 듣고 그래.

재밌어."

아, 참. 윤우는 반장이었지.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 난 공부한답시고 아이들 앞에 나서서 행동하는 걸 그만두었는데

훼손되지 않은 윤우는 여전히 리더십을 발휘해서 지금 반장으로 있나 보다.

버스가 멈췄다.

"여기야. 여기서 내려야 돼."

윤우는 군말없이 날 따라 내린다.

로얄 아파트 앞 버스 정류장.

지금 윤우와 나는 그 앞에 서 있다.

어떻게 로얄 아파트를 찾아가야 하는데

윤우가 먼저 묻는다.

"어디 가는데?"

"로얄 아파트."

키가 큰 윤우가 주변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더니

"이쪽이다!"

하고 외친다.

역시 든든해.

나는 윤우와 함께 로얄 아파트쪽으로 향한다.

로얄 아파트.

로얄 아파트는 말만 로얄이었지

복도식으로 되어 있는 서민 아파트처럼 보였다.

건물 외벽도 낡고 허름했고

벽이 갈라진 곳도 있었다.

"공원은 어디에 있지?"

내 말을 듣자마자

윤우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쪽을 보니,

'로열 공원 가는 곳' 이란 표지판이 써 있었다.

로열 공원 가는 곳.

"그런데 무슨 일로 가는 거야?

나 공원 구경시켜주려고?"

윤우가 웃으며 물어왔다.

"실종사건."

난 무겁게 입을 떼었다.

"우리학교에서 일어난 실종 사건 장소 중 한 곳을 찾아가는 중이야.

지금 우린."

"아."

윤우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뿐이었다.

더 이상 내게 무언가를 물어오지 않았다.

윤우 역시도 많은 생각이 오가는 모양이었다.

예전부터 윤우는 내가 하자는 건 군말없이 다 따르는 그런 아이였으니까.

공원에 도착했다.

말이 공원이었지

놀이터 한 편에 정자 하나와 큰 아름나무가 있는 정도 크기의 공원이었다.

그리고 그 정자에는 'police' 라고 적혀 있는 노란 줄이 둘러쳐져 있었다.

여기구나.

아이가 사라진 곳이.

정말 이 곳일까.

갑자기 의구심이 들었다.

집 앞에서 얼마 멀지도 않은 이 공원에서 실종 사건이라.

이 곳에서 발견된 아이의 안경이 결정적인 증거였지.

하지만 왠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이 오고가는 공원,

아무리 외진 곳에 있다고는 하지만

대낮에 실종 사건이라.

도무지 있을 수 있는 일일까.

혹시 납치를 가장한 또 다른 사건 아닐까.

만약 도희가 이 곳을 사건 장소로 생각하게끔 유도해놓고

실제 사건은 전혀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면.

그 곳은 어디일까.

머리 속이 분주해졌다.

윤우와 나는 맞은 편 벤치에 앉았다.

"잘 들어봐.

윤우야.

그 동안 우리 학교에 총 다섯 번의 실종 또는 자살 또는 타살로 의심되는 사건들이 있었어.

지금까지 그 사건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죽거나 사라진 아이들은 소지품이나 방에 육각별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이 아이도 마찬가지였고.

지금 실종된 아이의 마지막 행보가 발견된 곳이 이 정자야.

여기서 아이의 안경과 가방이 발견되었어.

그런데, 끌려가면서 아이는 왜 아무 저항도 없었을까.

대낮에 이런 밝은 공원에서 실종 사건이 발생했다면

크게 저항했을 텐데.

혹시, 범행은 전혀 다른 곳에서 이뤄진 게 아닐까?"

윤우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했다.

"도무지 그 다음은 생각을 해내지 못하겠어."

난 사실대로 윤우에게 말했다.

"또 다른 아이는?"

윤우가 물어왔다.

"한 아이는 바다 속에서 발견되었고,

한 아이는 음악실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되었어.

그리고 이 아이는 실종 상태고.

한 아이는......"

나는 말을 멈추었다.

이렇게 된 이상 솔직히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파트 주차장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어."

"너희 집 아파트?"

윤우가 놀라며 물었다.

"응.

우리집 아파트 주차장에서.

어떤 미친놈이 그 애를 강간하고

그리고 며칠 후 야산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됐어."

"그 아이도 육각 무늬를 사물함에 가지고 있었다고?"

윤우가 재차 물었다.

"만약,

이건 만약인데,

강간이 아니라면.

서로의 협의하에 하는 그 아이들의 마지막이자 첫 섹스였다면?"

응?

이건 무슨 신선한 개소리?

"생각해 봐.

어쩌면 그 아이는 죽기 전에 하기를 원했을지도 몰라.

그 남자도 그렇고."

오 마이 갓!

그럼 이 모든 게 계획된 죽음들이었다는 거야?

갑자기 소름이 쫙 돋았다.

한여름의 한낮인데도.

섹스.

가끔 윤우와의 섹스를 생각해 본 적이 있긴 하다.

남자의 성기를 내 질 안에 밀어넣는다는 그 것.

잘 상상이 가지 않지만

몹시 아플 것 같다.

그리고 또한 극한의 일체감을 줄 것 같다.

영화에서 보면 여자가 막 신음 소리를 내고 그러잖아. 좋아서.

그런데,

그 첫 섹스를 계획하에 하고

죽음까지도 철저히 계획된 거였다고?

야산에서 죽은 남자의 자살까지도?

이들은 혹시 연결되어 있는 걸까.

윤우와 나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뜬금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감정인지 몰랐다.

두려움의 감정인지,

두근거림인지.

"가자."

윤우와 나는 말없이 돌아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해운대로 갔다.

철썩 철썩.

도저히 진희가 죽은 곳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깊고 푸른 저 바다.

"뭐 좀 먹자."

나는 윤우를 끌고 근처의 패스트 푸드 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간의 사건 조사 브리핑을 했다.

처음, 우리 반에서 죽은 아이 집에서 발견된 육각별.

그리고 그 아이는 우리반의 오락부장일 만큼 쾌활한 아이였다고.

거기서부터 조사를 하게 되었다는 말에

윤우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나서 우리 학년 아이가 음악실에서 목을 매단 채로 죽은 일이 있었거든.

그래서 우연치 않게 그 아이의 사물함을 들여다 보게 되었어.

그랬더니......"

"육각형!"

윤우가 먼저 소리를 쳤다.

역시 우리는 짝짜꿍이 잘 맞아.

"그리고?"

윤우는 입술에 마요네즈를 묻힌 채로 내게 물었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그리고 나서 다시 우리 반 죽은 아이와 베프였던 애하고 이야기를 해보러 갔어.

그랬더니, 그 아이의 교복에 수놓아져 있는 모양이...."

"와. 이거 심각한데......"

윤우가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야.

우리가 지금 찾아갔던 애 있잖아.

그 아이가 친구한테 준 편지의 마무리에도 육각 무늬가 그려져 있었어.

그래서, 혹시나 무슨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 여기까지 너와 와 본 거야.

나 혼자 올 엄두가 안 나더라고. 왠지."

'너와 함께 오고 싶었어.'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왠지 조금 부끄러웠다.

"그들은 모두 육각형으로 연결되어 있어."

"지금까지 모두 몇 명이나 죽거나 실종되었지?"

"총 네 명.

그리고 그 남자까지 하면 다섯 명."

우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마지막 한명이 왠지, 재희가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왔기 때문이다.

"안 돼!

막아야 돼!

그 죽은 애의 베프 있잖아.

재희라는 애거든.

그 아이가 어쩌면.......

다음 타겟이 될지도 몰라."

윤우의 표정이 비장했다.

"큰일이네.

어쩌지."

나는 옥상에서 언니들과 있었던 일은 윤우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했다가는 윤우가 크게 걱정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윤우에게 이야기해도 속이 시원했다.

"그런데 너 대단하다.

소영이 너 살아 있네."

윤우가 농담을 했다.

살아 있다라.

그래, 요새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특히 재희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나에게 먼저 말해줘!"하고 외칠 때

내 안의 무언가가 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옥상에서 언니들과 싸울 때도.

그걸 뭐라고 이름 붙여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나는 예전의 그 주변을 도외시하고 공부만 파고들던

공부벌레는 더 이상 아니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윤우의 역할이 컸다.

"네 덕이지 뭐.

네가 내 안의 무언가를 깨워준 거 같다. 하하하."

난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나도 고민 많이 했어.

네가 날 보고 실망하면 어쩌나.

우리 초등학교 때 졸업하면서

대학교 때 꼭 다시 만나기로 했잖아."

윤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런데 너무 보고 싶은 거야. 네가. 밤에 잠도 안 올 만큼."

뭐지?

이 고백은?

갑자기 가슴이 사정없이 요동쳤다.

"그래서 용기내서 너네 학교로 편지 보낸 거야.

달리 연락할 방도가 없더라고.

고맙다.

나와줘서.

그리고 내 여자친구가 되어줘서."

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난 입에 물고 있던 코카콜라를 뿜고 말았다.

"켁켁켁."

이게 무슨 망신이람.

윤우 앞에서.

에라 모르겠다.

윤우는 내게 티슈를 주면서 웃었다.

"여전하다. 김소영."

윤우가 이제 집으로 갈 기차를 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 마이 갓!

이게 무슨 느낌.

기차가 왔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윤우가 갑자기 내 손을 덥썩 잡았다.

그리고 내 입술에 뽀뽀를 했다.

오마이갓, 오마이갓!

이런 스윗한 느낌이라니.

완전 부드러워.

그리고 황급히 기차에 올라탔다.

잘가라는 인사를 할 시간도 없었다.

윤우는 그렇게 떠났다.

언제나 윤우와의 만남은 즐거워. 그리고 알차.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두근거려.

미칠 것 같아.

그나저나 이제 집에 돌아가 저녁을 먹고 독서실로 바로 가서 오늘 윤우를 만나느라 못한 공부를 벌충해야 한다.

나는 바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나?"

아빠가 벌컥 소리를 쳤다.

"수학 시험을 이렇게 맞아놓고."

왜일까.

실실 웃음이 났다.

"아빠. 나머지는 다 백점인 거 안 보여요?

아빠도 좀 세상을 긍정적으로 봐 보세요."

순간

굳어진 아빠의 표정.

얘가 왜 이러지, 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지금 수학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곧 좋은 성적 나올 거에요.

저에게 너무 스트레스 주지 마시구요.

그리고 아빠가 텔레비전 볼륨 좀 작게 해 주시면

제 수학 점수가 십 점은 더 올라갈 거 같아요."

아빠의 벙찐 표정.

"이게 뭐 잘못 먹었노."

"아니요. 엄마가 해주신 음식 맛있게 먹겠습니다."

아까 윤우가 내게 해주었던 뽀뽀를 생각하자

신나기만 했다.

이 모든 것이.

내 모든 생활이.

난 맛있게 음식을 먹고 독서실로 향했다.

내가 좋아하는 독서실의 이 면학 분위기.

아, 너무 좋아!

"알아냈어!"

날 기다리기라도 한 듯한 혜경이의 속삭임이 어깨 뒤로 들려왔다.

"잠깐만."

나와 혜경이는 황급히 휴게실로 향했다.

다행히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죽은 언니 말야.

그 언니한테도 육각 표식이 있더라구."

"어떻게 알아냈어?"

"그 언니 집에 가봤지."

"너 혼자?"

"그 언니하고 친하게 지내던 언니하고 같이."

역시 혜경이는 발이 넓어.

"그랬더니?"

혜경이가 약간 뜸을 들였다.

"너 이 고급 정보를 그냥 맨입으로 듣겠다는 거야?"

"아. 진짜. 알았어.

뭐 마실래?"

"나는 레쓰비."

에휴.

하여튼간.

나는 혜경이에게 레쓰비를 뽑아주었다.

"자, 여기."

혜경이가 내민 것은 다름아닌 일기장!

"그 언니의 일기장이야."

와, 대박!

"너 이 일기장 어디서 구했어?"

"그건 알려 하지 말고.

이거 잘 봐라.

그럼 내가 할 일은 다 했지?"

혜경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온이하고는?"

"시온이?

걔가 누구야?"

혜경이는 딴청을 피웠다.

하여튼.

"아, 됐다. 암튼 고마워."

혜경이는 휑하니 먼저 사라졌다.

난 그 일기장을 고이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더 이상 수학 문제집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3 언니의 일기장을 폈다.

힘들다는 말이 많이 쓰여 있었다.

공부가 너무 힘들다.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까.

넋두리가 많이 쓰여져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육각무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다 끝내고 싶다.'

라고 시작하는 글

그 글의 마무리에는

육각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이들은 어떻게 연결된 걸까.

어떻게 서로를 알게 된 걸까.

일학년인 한명과 이학년 두 명.

그리고 삼학년 언니 한 명.

그리고 야산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된 한 명.

인터넷에서 만난 걸까.

사건을 풀려면 재희의 도움이 필요해.

아니, 재희의 도움이 절실했다.

언니의 일기장에는 더 이상 육각 무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경찰에서도 이 일기장을 봤겠지만

그저 공부에 지친 아이의 넋두리로만 치부하고 넘어간 것 같았다.

재희를 만나야 해.

난 재희에 대해 잘 모른다.

재희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그때 운동장에서가 다이다.

재희와 진희가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는 적은 몇 번 보았지만 그게 다이다.

그 여섯 사람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면?

그 중 가장 충격인 것은 바로 우리 아파트 주차장에서 벌어진 성범죄.

이건 하나의 가설일 뿐이지만

사실 그 성범죄가 계획하에 이루어진 거였다면,

사실은 성범죄가 아니고 성행위라고 봐야 맞겠지.

그리 저항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아파트 사람들도 소리를 듣지 못했던 거야.

그 아이는 육각모임에 대한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

혹시 그런 선택을 한 것 아닐까.

경찰이 육각 모임에 대해 알지 못하도록.

이 육각 모임은 대체 어떤 모임인 걸까.

요 며칠 육각 무늬로 인해 머리가 혼란스럽다.

이럴 땐 바닷바람을 쐬는 게 최고의 명약이다.

마침,

셔틀버스 아저씨가 앞문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불러제끼는 신해철의 노래.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생각에 잠길 때 요즘엔 뭔가 텅 빈 것 같아 지금의 난 누군가 필요한 것 같아 친굴 만나고 전화를 하고 밤새도록 깨어있을 때도 문득 자꾸만 네가 생각나 모든 시간 모든 곳에서 난 널 느껴 내게로 와 줘 내 생활 속으로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게 새로울거야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게 달라질거야-

오, 노래 실력 많이 늘었는데.

그나저나 만나는 여자하고는 잘 되어가나.

아니 이게 왠 오지랖이야.

잘 되거나 말거나.

내 옆자리의 혜경이는 누군가와 문자를 열심히 주고받고 있다.

혜경이가 뭔가를 보낼 때마다

시온이 어깨가 들썩이는 걸로 봐서

둘이 비밀리에 문자를 주고받으며 연애질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아니,

이것도 내 오지랖이지.

하지만.

정말로 재희가 걱정이 된다.

육각무늬.

만약 재희가 그 완성체라면.

아, 머리가 어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창문을 확 열어젖혔다.

곧 바닷바람이 창 안으로 훅 들어온다.

좋다.

이 맛에 독서실 가지.

그나저나 재희에게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재희의 죽음을 어떻게 막아야 할까.

내일, 내일 학교에 가서 뭐라도 해야 한다.

재희를 위해.

그리고 또다른 죽음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드디어 다다른 독서실.

오, 뭐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라지는 시온이와 혜경이.

혜경이는 교복을 입은 채로이다.

예전처럼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사복 차림이 아니라.

"야, 너네 어디가?"

하고 물어보았지만

혜경이는

손만 흔들어 보이고 사라진다.

그 옆에 조용히 따라가는 시온이.

아. 갑자기 윤우가 보고 싶다.

나도 윤우하고 학교 끝나고 햄버거 먹으러 가고 공부도 같이하면 얼마나 좋을까.

대학 때를 기다리자.

그때까지 열심히 거북이처럼 고개를 땅에 처박고 공부를 하자.

하지만,

하지만,

자꾸 떠오르는 재희.

안되겠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싸이월드 미니 홈피에 들어간다.

그리고 죽은 진희의 홈피에 접속한다.

여전히,

여전히,

진희를 추모하는 아이들의 글이 방명록에 가득하다.

보고 싶다, 네가 힘들어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

그 틈바구니에서 김재희의 방명록을 발견했다!

오, 이거다!

-재희야, 재희야.

단 두마디.

하지만 이 단 두마디만으로도 난 재희가 얼마나 진희를 그리워하는지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재희 이름을 누르니

바로 재희 홈피로 이동.

오 마이 갓!

홈피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텅빈 미니미 방.

아무것도 없는 게시글.

그리고

역시 비어 있는 프로필.

오, 안 돼!

그 밑의 글.

단, 한 줄.

-고마웠어. 다들-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

혹시?

안 돼!

얼른 내일이 와서 재희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꽉 채운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재희의 죽음을.

"재희야!"

다음 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난 재희를 찾았다.

있다.

다행히 재희가 나와 있다.

또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쳐다보는 재희.

"잠깐 나와 봐."

"왜 또."

투덜대면서도 재희는 나를 따라나온다.

아직 아침 자습이 시작하기 전이라 학교는 비교적 한산하다.

"제발 알려줘.

너희 육각 클럽에 대해서."

"내가 왜?"

갑자기 재희가 사납게 대답한다.

"경찰들한테 시달린 것만으로도 족해.

나 그만 좀 내버려 둬."

재희는 홱 등을 보이며 돌아선다.

"나 다 안다고!

우리 학교에서 벌어진 죽음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거!"

재희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한 번 더 나아가 볼까.

에라 모르겠다.

질러보자.

"그 주차장에서 죽은 애.

그 애의 죽음하고 그 애 죽고 목매달아 자살한 그 남자하고

원래 아는 사이였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어."

헉.

재희의 표정이 달라진다.

"어떻게......"

재희가 날 보며 표정으로 말한다.

'그냥 느낌으로.'

라고 말하려다가 만다.

그러면 신뢰성이 확 떨어질 것 같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알려달라고.

너희에 대해서.

그리고

나 정말 걱정돼.

네가 걱정된다고.

미니 홈피 게시글은 왜 다 지운 거야.

그리고 모두에게 고맙다는 글은 뭐고."

"너 나 뒷조사 하고 다니니?"

재희가 날카롭게 묻는다.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데?

나도 죽을까 봐?"

"그래!"

난 학교 운동장이 떠나가라 외친다.

"걱정돼.

걱정되서 계속 그 생각만 나.

나도 모르겠어.

나밖에 모르던 내가 왜 이렇게 된 건지는.

그런데 걱정돼.

정말 걱정돼."

"성인 군자 납셨네."

재희가 비아냥댄다.

"네가 뭐라고 하든지 상관없어.

기억해 재희야.

난 네 편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먼저 연락줘.

여기 내 번호야."

나는 내 핸드폰 번호가 적힌 종이를 재희에게 건넨다.

재희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 종이를 호주머니에 넣는다.

그 틈을 타서 나는 재희의 교복을 살핀다.

혹시 예전처럼 육각 무늬가 수놓아져 있는지.

없다!

육각 무늬가 없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육각 무늬가 없다니.

좋은 건가, 나쁜 건가 모르겠다.

안되겠어.

오늘 재희를 미행해 봐야지.

학교가 끝나자마자 나는 재희를 남몰래 쫓아간다.

혼자 걷는 재희.

어딜 저렇게 가는 거지?

아니, 뒤에도 눈이 달렸나.

갑자기 재희가 뒤를 확 돌아보더니 내게 소리친다.

"야! 김소영.

따라오지 마!

너 따라오는 거 다 알고 있었거든!"

뭐야,

맥빠지게.

"이리 와, 와서 보라고."

재희와 나는 말없이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뭐 이런 동네가 있다.

이건 완전 달동네잖아.

판자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

골목골목이 어지럽게 엉켜 있어서 한 번 길을 잃으면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곳.

이 곳에는 왜.

몇번이나 골목을 돌고 또 돌았을까.

재희와 나는 도저히 집이라고는 볼 수 없는 곳에 선다.

"자, 보라고."

재희는 문을 연다.

오 마이 갓!

나는 놀라서 자빠질 뻔했다.

그 안에 왠 아이가 한 명 있다!

그 아이는 앉아서 뭔가를 하고 있다가

"재희언니!" 하며 반갑게 재희를 맞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겁에 질려 떤다.

"걱정하지 마. 얘 신고 안 해."

혹시, 이 아이가?

"그래, 맞아.

실종되었던 애야.

여기서 살고 있어."

아니, 왜 여기서?

나는 눈으로 재희에게 물었다.

재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벽을 보았다.

거북 문양이 온통 그려져 있는 그 벽을.

도대체 이들은 누구일까.

왜,

이런 일을 꾸민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 밑에 무슨 일이 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쉽사리 이야기를 꺼낼 것 같지 않다.

"내가 널 여기로 데려온 이유는

널 믿어서야."

고맙다, 믿어줘서.

난 진심으로 재희에게 말했다.

"우리는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고 있어.

아마도 이게 마지막 프로젝트가 될 거야."

무슨 프로젝트?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것?

혹시 자살이나 뭐 그런 것?

"아니. 네 생각과 달라.

그런 거 하려는 거 아니야.

죽는다던지 하는 거."

그럼 뭔데?

나는 다시 재희에게 눈으로 물었다.

"이 언니를 뭘 믿고 다 말하려고 그래?"

갑자기 들려온 1학년 아이의 목소리.

차갑다.

아무도 믿지 않는 그런 목소리이다.

나도 그랬었지.

아이에게 안심을 시켜줘야 할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니 먹을 게 별반 없어 보인다.

"뭐 먹을 거는 있는 거야?"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냉랭한 공기만 흐를 뿐.

"먹을 거?

그딴 거 필요 없어.

어차피 곧 끝날 거니까."

'뭐가 끝난다는 거야?' 하고 묻고 싶었지만 대답이 두렵다.

저 둘은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다.

"우린 벌써 친구들을 잃었어.

더 이상은 안 돼.

도희야.

한 번만 이 언니를 믿어주라."

"왜 이래, 갑자기."

도희가 말한다.

"다 우리 계획 속에 있던 거였잖아"

"아니, 그 주차장 사건은 아니었지.

우리도 몰랐잖아.

신지 언니하고 재경 오빠가 그렇게 갈 줄은.

나도 더는 힘들어.

못하겠어."

뜻밖에 엉엉 우는 재희.

그러자 재희를 달래주는 도희.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이렇게 힘든 거야?"

"몰라. 이제 너하고 나 밖에 안 남았잖아.

이 모든 게 다 힘들어.

보고 싶어.

우리 둘 밖에 안 남은 이 현실이 너무나 힘들다고."

무슨 말이지?

이게 다 무슨 말이지?

"사실, 우리는 같은 고아원 출신이야."

응?

고아원?

"진희는 부잣집에 입양되었던 거구."

재희가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간다.

"언니!"

도희의 외침에 조용히 하라는 듯 재희가 왼쪽 손가락을 입에 갖다댄다.


"네가 도와줘야 할 일이 있어."

재희는 비장하게 말했다.

"언니!"

더 크게 소리치는 도희.

"이게 다 우리 아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는 거라구."

열심히 도희를 설득시키는 재희.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투덜대는 도희.

그때서야 알아챘다.

도희는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너 근시라며?"

난 도희에게 물었다.

"어. 그거 거짓말이야."

너무나 당당한 도희.

"나 사실 눈 좋아. 양쪽 다 1.5."

할말을 잃었다.

이 아이들은 도대체 왜 모여서 무슨 일을 벌인 걸까.

아니 벌이고 있는 걸까.

"사실은 여기가 우리의 아지트였어."

재희가 빠르게 말했다.

"우리는 여기 모여서 이야기하고 놀곤 했어.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그 사건이라니?"

"너 혜경이 알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갑자기 혜경이가 왜?

혜경이가 왜 소환되는 거지?

이 자리에 왜.

"너 알아?

혜경이하고 철학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

"아니 전혀 몰랐는데."

나는 일단 발뺌을 했다.

내가 왜 발뺌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재희는

입을 열지 않으리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혹시 들어봤니?

이너서클이라고."

"이너서클? 아니 처음인데."

"그 이너서클이란 게 말야......"

재희의 말에 의하면 그 이너서클은 처음 혜경이가 조직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 둘 씩 사람을 끌어모으고.

그리고 여기 일학년 아이에게도 마수의 손을 뻗쳐 오고.

"글쎄.

입양되어서 잘 살고 있는 우리 도희한테 그 아이가 거래를 해 온 거야."

"무슨 거래?"

갑자기 몸이 떨려왔다.

"뭐긴 뭐겠어.

자기네 클럽에 가입하지 않으면 입양 사실을 다 불어버리겠다는 거지.

철학한테서 입수한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그 애가 도희의 발을 물고 늘어졌어."

"나쁜 년."

듣고 있던 도희가 부들부들 떨었다.

도희의 손을 감싸 쥐면서 재희가 말했다.

"입양이 뭐 죄야?"

난 말했다.

"넌 모를 거야.

아마도 절대 모를 거야.

넌 입양되지 않았으니까.

입양아라는 게 커밍아웃되는 순간

닥쳐올 일들이.

차가운 시선들이.

싫었던 거야.

도희는."

"그래서 자작극을 벌인 거야?"

"응. 시작은 그렇게 된 거야."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말도 안 돼!

너 찾아다닐 부모님은 생각도 안 해봤어?"

"더 이상은 그만 말할래.

언니 더 이상 내 이야기 이 언니한테 하지마.

우리 가정사에 대해서."

"알았어."

재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너한테 정말이지 부탁이 있어.

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야.

이혜경으로부터.

비열한 이혜경으로부터."

오마이갓!

"우리는 그 애한테 복수할 거야."

"어떻게?"

"내가."

재희는 비장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어쩌자는 건데."

"죽여버릴 거야."

뭐?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죽여버릴 거라고?

혜경이를?

"그 애 동선 좀 알려줘."

"난 잘 모르는데."

그러자 재희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너 살아나가고 싶지?

여기서.

너 설마 내가 너하고 혜경이하고 친한 거 모를 거라고 생각해?

네가 수업 시간에 교련이 딴 짓하는 혜경이한테 가까이 갈 때

괜한 말로 교련의 주의를 분산시킨 거

난 우연이라고 생각 안 해.

살아나가고 싶으면

말해.

너네 둘 어떻게 친해진 거야?"

뜻밖에 재희는 내 목을 움켜쥐었다.

켁켁켁.

"가져와."

그러자 도희가 칼을 가져왔다.

부엌칼이었다.

"죽기 싫으면 당장 이야기 해."

재희는 칼로 내 목을 위협했다.

어쩔 수 없었다.

말하는 수밖에는.

"독서실.

걔랑 나랑 같은 독서실 다녀."

그제야 재희는 내 목을 풀었다.

켁켁.

그제야 살 것 같았다.

"그랬구나.

독서실이었구나.

독서실에 있었어.

그 년이 못된 짓을 하고 다니는 데에는."

갑자기 재희가 소리쳤다.

"언니 다 들려. 목소리 좀 낮춰."

재희의 표정이 돌변했다.

"언제 끝나?

무슨 독서실이야?"

이번에는 도희가 내 목을 졸랐다.

다시금 재희가 내 목을 칼로 위협했다.

"새벽 두 시에 끝나.

걔는 그 전에 사복입고 돌아다니다가

그 시간 맞춰서 들어와.

그리고 다시 교복 입고 셔틀버스 타고 집에 가."

난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다 말했다.

그제야 재희는 내 목을 놔주었다.

"자, 넌 할 일이 있어."

"뭔데?"

"여기서 빠질 생각 하지 마.

너까지 죽여버릴 거니까.

너 내가 지금 뭐 눈에 보이는 게 있는 줄 알아?

내 베프 진희도 저리 되고 미희 언니도 죽고

나나 도희나 세상에 미련 없어.

내가 너 따위를 왜 여기로 데려왔다고 생각해?

육각무늬에 네가 흥미 보일 때부터

나도 너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했어.

왜 네가 그 따위에 미련갖는지.

그랬더니

너하고 혜경이하고 연관되어 있더라."

그랬구나.

이미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네가 좀 도와줘야겠어.

그 년을 제거하는데."

아, 미치겠네.

어찌되었든지 이 자리를 빨리 나가야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 년하고 밖에서 만나자고 해.

이번주 토요일 해운대에서.

거기에 내가 잘 아는 데가 있어.

아무도 모르는 조용한 곳.

거기서 해치울 거야.

네가 할 일은 그 년을 거기로 데려오는 거야."

어떻게 해야지

이 순간을 모면할 수 있을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렇게 할게. 네 말대로."

의외로 순순한 내 태도에 재희는 놀란 듯했다.

"알리거나 하면 너까지 죽는 수가 있어."

"그래.

이제 나 좀 보내줘.

지금 자습 끝내고 독서실 가야 할 때야.

만약에 가지 않으면 더 의심살 거야."

난 간신히 그 집을 나왔다.

도저히 다시 찾아가라면 찾아갈 수 없을 정도로 얽혀 있는 골목길을 어떻게 빠져나온지 모르겠다.

한시간은 걸린 것 같다.

다시 시내로 나오기까지.

휴.

살았다.

큰 길로 나오자 살 것 같았다.

다음주 토요일 해운대로 혜경이를 꼬여내라고?

그런데,

나머지 죽음과 혜경이하고는 무슨 관련이 있는 거야?

재희는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지 나에게 중책이 주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도와줘.

윤우야.

너의 그 순수한 빛을 나에게 보내줘.

내가 이 상황을 잘 벗어나고

모두를 살릴 수 있도록.

경찰에게 알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너무 위험했다.

어떤 방법이 없을까.

도대체.

신이시여.

저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제발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그런 지혜를.

시온이!

시온이하고 이야기를 해 보자.

시온이하고 이야기를 해 보면 혜경이에 대해서 뭔가를 알게 될지도 몰라.

나는 시온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왠일이야?"

독서실 안에서 받는 전화라 그런지 소근대는 목소리로 시온이가 대답했다.

"물어볼 게 있으니까 여기로 좀 와."

나는 부산대 앞으로 시온이를 불렀다.

부산대 앞으로 가는 길 내내

어떻게 시온이에게 물어볼까를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시온이에게 혜경이에 대해 입을 열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한 햄버거 집에서 만났다.

둘 다 교복을 입은 채로.

"무슨 일이야?

오늘 독서실도 안 오고."

시온이가 콜라를 마시며 물었다.

"너 혜경이하고 사귀어?"

시온이의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있는 은반지가 눈에 띄었다.

시온이가 자랑스럽게 씩 웃었다.

입이 환하게 벌어졌다.

말 안해도 한창 좋을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

그런 시온이한테 혜경이에 대해 어떻게 묻나.

괜히 불렀나 싶었다.

그때 시온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혜경이하고 요새 봉사활동 다녀.

그때 말했던 데 있지?

거기,

고아원.

거기서 애들 가르쳐주고 놀아주고 그래.

너도 같이 다닐래?"

뭐 봉사활동?

"나도 밤마다 혜경이가 어딜 그렇게 쏘다니나 했거든.

그런데 알고 보니 혜경이가

청소년 봉사 단체에 가입이 많이 되어 있더라고.

그래서 양로원도 다니고 고아원도 다니고.

우리 완전 건전 커플이지?"

시온이가 웃으며 말했다.

뭐?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도대체 진실이 뭐야.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니까 매일 밤 너하고 혜경이하고 봉사활동을 다닌다 이거야?"

"응."

시온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집 형편 때문에 학원에 못 가는 고아원 애들한테 공부도 알려주고

멘토 역할도 해주고 그래."

말도 안 돼!

그런데,

그런 혜경이가

이너서클의 멤버라고?

아니,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거야.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

"너 몰랐지?

혜경이 머리 대개 좋아.

공부 잘 해.

나도 몰랐는데 약간 천재과인 거 같기도 해."

그러고 보니

난 혜경이 성적은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하위권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거다.

날라리.

이너서클.

그런데 봉사활동이라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애들이 혜경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성격 좋고

의리 있잖아.

그뿐이니.

얼굴도 얼마나 이쁜지."

시온이는 내 앞에서 그칠 줄을 모르고 혜경이 칭찬을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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