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여고

9

아 미쳐돌아버리겠다.

머리가 너무나 혼란스러워.

왜 서로간의 증언이 다른 거지.

혜경이란 애는 도대체 누구인 거야.

시온이 말을 들어보면 세상 천사이고,

재희 말을 들으면 세상 악마이고.

이 둘을 다 가진 아이일까.

아니면 어느 한 편이 거짓말을 하는 걸까.

내 머리로는 부족해.

타고난 내 머리를 탓해본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다.

내 아이큐는 늘 전교에서 탑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을 추리하는 건 정말 어렵다. 어려워.

머리가 뽀개질 것 같다.

"그만, 그만!"

나는 혜경이 칭찬을 해대는 윤우의 말을 막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혜경이가 세상 착한 애라는 거야?

그럼 내가 본 건 뭔데.

까만색 세단 차 타고 가던데."

"아 그거, 혜경이 아빠 차야.

그 날 무슨 일이 있어서 아빠가 혜경이 데리러 온 거."

그래, 그러고 보니 그 날 혜경이는 새벽 두 시 독서실 셔틀 버스를 타지 않았었지.

'너 이너서클이라고 알아?' 하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너네 봉사 활동하러 어디로 가는데?"

"성심원."

성심원?

성심원이라면 고아원인데.

혹시 재희와 관련이 있는 곳인가.

재희가 자란 곳이 성심원인가.

아무래도 그 곳을 탐문해야겠어.

"언제 가기로 했어?"

"내일 갈 거야.

내일 밤에.

독서실 도착해서."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런데 왜 혜경이는 사복을 입고 다녀?

그런 곳 다니면 떳떳하게 교복 입을 수도 있잖아."

"그게 걔네 가정사하고 관련된 거라서.

혜경이 말로는 걔네 집에서는 혜경이가 제멋대로 행동해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대.

그래서 독서실에 가는 척하고

독서실에 와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자기 하고 싶은 일 하는 거라고 그렇게 알고 있어."

음....

이상해.

뭔가 더 있어.

"아무튼지 내일 같이 가 봐. 나도 성심원인가 어딘가에 가볼게. 너네하고 같이. 괜찮지?"

"그럼 괜찮고 말고.

거기 애들이 좋아하겠다.

공부 잘하는 언니 왔다고."

"네가 나 공부 잘 하는 지 못하는 지 어떻게 알아?"

"혜경이가 말해줬지."

으이구.

"알았어. 그럼 내일 독서실에서 봐."

그렇게 부산대 앞 햄버거 집에서 나와 시온이는 헤어졌다.

다음주 토요일이라.

일주일 정도 남아 있다.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다음주 토요일까지는 약 열흘 정도 남은 것이다.

그때까지 사건을 매듭지어야 한다.

깔끔하게.

나는 다시 독서실로 가야지.

한시간이라도 좋으니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집에 가야 한다.

문득 나나 혜경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의심 사지 않게 독서실에 다니는 게.

지금 내가 여기서 뭐하는 거지?

수능이 일년 반 남았는데.

아, 모르겠다.

되돌아가기에는 나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독서실에 가니

역시나,

혜경이는 보이지 않는다.

시온이도.

둘이 어딜 간 거야.

에라 모르겠다. 공부나 하자. 공부나.

사실은 공부가 이렇게 가장 속 편한 것이었다니.

그동안 못한 공부를 부지런히 하고 있을 때였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누가 참말을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살금살금

나는 혜경이 책상으로 갔다.

혜경이 책상은 수학의 정석이 꽂혀 있었고 각 과목마다 문제집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에이구, 공부하는 척하기는.'

난 속으로 생각했다.

뭔가 단서가 있을 거야.

혜경이에 대한.

혜경이가 어떤 아이인지에 대한 단서가.

어디에 숨어 있을까.

어디에.

나는 혜경이의 문제집을 정신없이 훑기 시작했다.

수학의 정석부터 시작했다.

모든 아이들이 그러하듯 첫 두 단원까지만 지저분하게 되어 있었다.

수포자인가?

아니, 아까 윤우 말로는 천재라고 했는데.

그다음에는 사회 과목 문제집.

별 건 없었다.

그래도 꽤 열심히 풀려 있었다.

아니, 도대체 언제 공부한 거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철학 자습서.

왠지 모를 끌림에 나는 철학 자습서를 더욱 자세히 훑었다.

"너 혜경이하고 철학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인거 몰라?"

하던 재희의 말이 생각났다.

46쪽 하단.

어?

이게 뭐지?

순간 내 시선을 확 잡아끄는 게 있었다.

46이라고 써 진 숫자 위의 육각 무늬!

나는 정신없이 자습서를 훑었다.

육각 무늬는 때때로 모습을 드러냈다.

낙서처럼.

단순한 낙서인가.

오마이갓!

이게 뭐지?

철학 자습서를 막 책장에 도로 꽂아놓을 때였다.

그때 후두둑 책상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공책이었다.

철학 자습서 맨 뒤편에 끼워놓았던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첫 페이지를 폈다.

'5월 4일

접근 성공'

이렇게만 써져 있었다.

5월 4일?

5월 4일이 언제지?

그때까지 난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순간 누군가 독서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아니야.

혜경이가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더 남아 있다.

혜경이는 새벽 한 시경 돌아오곤 했으니까.

그래도 조심해야 하니 얼른 내 자리로 이동해야겠어.

역시 예상대로 혜경이는 새벽 한 시경 돌아와

다시 교복으로 갈아입고 쿨쿨 잠을 잤다.

새벽 두시,

나는 잠자는 혜경이를 깨웠다.

"야, 집에 가야지"

"응."

집에 가는 동안 나는 똑같이 행동하려고 애썼다.

마치, 오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쿨하게.

원래 나와 혜경이는 필요한 말이 없으면 별로 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별 말없이 버스에 앉아서 최대한 담담한 척 했다.

혜경이가 내릴 때까지 난 혜경이를 잘 속인 줄 알았다.

"할 말 없어?"

혜경이는 나를 향해 씩 웃고 차에서 내렸다.

뭐지?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확 내려서 가버릴 거면서 할말없다고 물은 진의는 무엇일까?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걸까.

집은 왠일로 조용했다.

아빠는 일찍 잠에 든 것 같았다.

티비 소리가 없는 집이 너무 좋았다.

이 놈의 티비 소리만 울리지 않아도 독서실까지 가서 공부하지 않아도 될 텐데.

티비를 너무 사랑하는 아빠 때문에 독서실에 가서 공부하는 걸 선택한 거 아닌가.

그건 그렇고 5월 4일은 무슨 날이지?

접근 성공?

순간 메세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윤우였다.

'자?'

'아니 아직. 무슨 일이야?'

'그냥 잠이 안 와서. 오늘따라 네 생각이 많이 나네.'

뭐야, 이 스윗함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 정말 너한테 접근하기로 한 거 잘한 거 같아.'

'접근?'

나는 '접근'이란 단어를 한동안 노려봤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섬광처럼 뭔가가 떠올랐다.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두번째 아이가 실종된 날을 검색했다.

그 날은 나와 혜경이가 구내 매점에서 처음 만나던 날이기도 했다.

오마이갓!

'5월 4일. 부산시 도정동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변사체는 사고가 일어난 아파트에 거주하는 고등학생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탐문 중이다.'

접근 성공이라?

그럼 나한테 접근하는 걸 성공했다는 건가.

모든 게 다시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나까지 계획에 넣은 치밀한 범죄를 저지른 거였다고?

그런 거였다고?

오, 말도 안 돼!

갑자기 몸이 떨려왔다.

다시 메세지가 울렸다.

윤우였다.

답이 없자 재차 보낸 것이었다.

'내가 너무 갑자기 훅 들어갔나.

아무튼 잘 자. 보고 싶어.'

귀여운 윤우.

하지만 지금 나는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우선 내일 성심원에 같이 가서 봉사활동의 내막을 알아보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런데 왜

혜경이는 내게 접근한 걸까.

'접근 성공' 이라는 말 앞에 내 이름을 붙이면

'김소영에게 접근 성공'이 된다.

그리고 그 날은 나와 혜경이가 처음 만나 이야기를 한 날이기도 하다.

내게 이너서클에 대한 힌트를 주면서 접근했었지.

미술선생하고 자기 친구하고 성관계를 가졌다는 말로.

도대체 왜.


성심원에서 혜경은 무척 친절하다.

깜짝 놀랄 정도이다.

"언니, 이 삼각함수 문제 어떻게 풀어요?"

"소희야, 여기 소영언니가 공부 완전 잘해. 언니한테 한번 부탁할까?"

혜경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영아!"하고 날 불렀다.

오마이갓!

이런 부드러운 목소리가 혜경이 안에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흐믓하게 혜경이를 바라보고 있는 시온.

이건 뭐 완벽하잖아!

어디 흠잡을 데가 없다.

밤마다 이렇게 학원에 가지 못하는 성심원 아이들은 혜경이에게 공부를 배우는 것 같았다.

"언니, 진짜 짱이야."

"이제 가야 해."

도대체 혜경이는 언제 공부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는 걸로 보아 정말 천재과인 것도 같았다.

난 혜경이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구나.

내게 배우던 소희가 혼잣말을 했다.

"나도 혜경언니 처럼 좋은 집에 입양되면 좋을 텐데."

응?

이건 무슨 소리?

갑자기 머리를 둔치로 얻어맞는 것 같았다.

"너 다시 말해 봐."

난 소희를 다그쳤다.

그제야 자기가 말실수를 한 걸 자각한 듯한 소희.

"아니에요.

저도 얼른 혜경언니처럼 좋은 학교에 가고 싶다고요."

오마이갓!

혜경이가 여기 출신?

난 소희가 더 당황해 하기 전에 "응 그래?" 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머리 안은 물음표로 가득했다.

재희처럼, 도희처럼, 그리고 신지, 진희와 미희 언니처럼 혜경이가 여기 출신이었다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아 혼란하다. 혼란해.

아이들은 학구열에 불탔다.

"우리도 혜경언니처럼 부산에서 알아주는 고등학교에 가는 거야!"

"좋아! 할 수 있어!"

혜경이는 끊임없이 아이들을 독려했고 함께 문제를 풀어주었다.

개중에는 혜경이를 붙잡고 고민 상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언니, 제 남친이 자꾸 무리한 부탁을 해요.

자기 생일에 같이 모텔 가자고."

"뭐, 이런 자식이?

너 걔 전화번호 당장 가지고 와.

언니가 처리할 거니까 넌 가만히 있어도 돼."

혜경은 카리스마 있게 말했다.

오.

도무지 원조교제녀하고는 맞지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철학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재희의 말은 무엇이며

도희에게 원조교제를 제안하며 협박했다는 말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리고 나와 처음 말을 트던 날

'접근 성공'이라고 노트에 써져 있던 것은 또 뭐고.

지금 혜경이는 연기를 하는 걸까.

그럴지도 몰라.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아이니까.

드디어 간식타임.

아이들은 출출했던지 시온이가 사 온 떡볶이와 순대를 맛있게 먹었다.

"우와, 시온 오빠는 얼굴도 잘 생기고 완전 혜경언니가 복받았지."

"무슨 소리야.

혜경 언니가 얼마나 진국인데.

지난 일년간 우리한테 혜경언니가 해 준 거 다 잊었어?"

"맞아. 맞아."

소희의 말에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도무지 머리가 혼란스러워져서 있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었다.

"가자! 독서실로.

그래야 셔틀버스 타지."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혜경은 핸드폰 시계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했다.

"우리 귀요미들하고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다니까."

도무지 알 수 없어.

혜경이의 저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말투라니.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얼른 여기를 나가자.

조사고 뭐고.

머리가 혼란스러워져서 도무지 있을 수가 없었다.

"야. 이혜경!"

성심원을 나오자마자 난 혜경이를 불렀다.

"왜, 놀랐어?

내가 여기 출신이란 게?"

혜경이가 뭔저 선수를 쳤다.

"사실, 우리 양아버지가 내가 여기서 봉사활동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

아빠는 내가 여기에서의 기억을 모두 지우기를 원하시거든.

그래서 난 독서실에 가는 척하면서

이렇게 후배들한테 와서 공부를 가르쳐 주는 거야.

애들하고 재미있게 놀기도 하면서.

이제 됐어?"

아.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말투는 왜 그래?"

"내 말투가 어때서?"

난 혜경이에게 괜히 꼬투리를 잡았다.

"어디서 그런 여시같은 말투를 쓰냐고."

하지만 정말 내가 궁금한 건

재희와 혜경과의 관계였다.

왜 재희는 혜경이를 죽이려 하는 걸까.

재희의 말에 따르면 혜경이는 악의 축이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그 어떤 증거도 없다.

이것 참 사람 환장하겠네.


그리고 재희는 다음 주 토요일에 해운대로 혜경이를 데려오라고 나를 협박했다.

협조하지 않으면 나까지 큰일날 줄 알라면서.

어떻게 해야 하지.

아.

혼란하다. 혼란해.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구나.

그렇다고 혜경이한테 재희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는 모양이고.

눈치가 빠른 혜경이에게 재희 이야기를 꺼냈다간 모든 게 도루묵이 될 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독서실로 가서 생각해 보자.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아무튼지 여기서 더 물러날 곳은 없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재희와 더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난 재희를 불렀다.

쪽지로.

지나가는 척하면서 재희 책상에 쪽지를 툭 떨어뜨렸다.

"점심 시간. 음악실로."

음악실에서 난 재희를 만났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난 솔직히 재희에게 고백했다.

"왜 말 안했어?

혜경이도 같은 성심원 출신이라는 거?"

"결국 알게 될 거니까."

재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난 모르겠어.

걔가 그렇게 나쁜 애인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넌 몰라.

아마 앞으로도 모를 거야."

재희가 못박아 말했다.

"그게 이혜경이니까."

"무슨 소리야?"

"내가 말한 거 그건 다 사실이야."

"아니, 어제 내가 성심원 갔는데?"

"넌 말야.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

걔가 왜 너한테 접근했겠냐.

넌 공부만 잘했지 완전 멍청하구나."

재희가 나에게 독설을 날렸다.

"걔는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두고 철저한 계산 하에 움직이는 애야.

그래서 무서운 거고."

"그렇다면 경찰에 신고해."

"됐다. 됐어.

너도 이렇게 나를 못 믿는데 경찰이 과연 믿어줄까.

이 모든 일에 걔가 있다는 걸 경찰이 믿어줄 거 같냐고."

아무래도 비장의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네가 날 설득시켜 봐.

이혜경이 너네한테 어떻게 했는지.

어떻게 신지, 진희하고 미희 언니까지 다 죽게 만들었는지 나한테 말을 해 보란 말야."

"싫어."

재희는 단호했다.

"네가 할 일은 이혜경을 다음 주 토요일에 해운대로 데려오는 것, 그 뿐이야. 알아?

이건 명령이야. 더 이상 부탁이 아니야."

"미안한데,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희를 더 도와줄 수가 없어.

네가 다 말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너희를 도와줘."

"이 바보야!

걸려든 건 너라고!

살고 싶으면 이혜경을 데려와.

다음주 토요일에.

안 그러면 이혜경 손에 죽게 될 다음 타자는 네가 될 수도 있으니까."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우린 다 그렇게 당했어.

당한 줄도 모르고 당했다고.

걔는 그런 애야.

더 이상 사람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내 말대로 해.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재희가 말했다.

'모든 책임을 진다고?

너 지금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말하는 거니?'

난 재희에게 묻고 싶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일주일이란 시간이 남아 있다.

그 시간 안에 퍼즐을 풀어야만 한다.

나 혼자.

더 이상 아무도 믿을 수가 없다.

재희도 나에게 속시원히 말하지 않고

혜경이의 겉모습은 천사이고.

이렇게 말이 엇갈리는 상황에서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다.

윤우.

윤우가 보고 싶다.

어쩌면 윤우가 날 도와줄지도 모른다.

윤우라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윤우를 만나자.

내일 일요일에.

난 급히 윤우에게 문자를 했다.

'혹시 내일 시간되니?'

그러자 곧 문자가 왔다.

'무슨 일 있어?'

역시 믿음직한 윤우.

'내가 갈게. 너 있는 곳으로.'

난 윤우에게 말했다.

'괜찮아. 내가 부산으로 가도 돼.'

아니야.

난 정말 잠시 떠나 있고 싶어.

여기를 떠나고 싶어.

난 속으로 말했다.

'아니, 이번에는 내가 가고 싶어서 그래.'

'알겠어. 그럼 도착시간 정해지면 알려줘. 역으로 나갈게.'

휴.

윤우와 메세지를 주고받자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역시 내 영혼의 안식처 윤우.

생각해 보면 윤우가 내게 만나자고 연락을 해 왔을 때 난 바보같이 이혜경을 내 대타로 보내려고 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그때 화장실에서 우연히 혜경이가 하는 말을 들었지.

"한 번 따먹고 버리려고."

그 말에 충격을 받아서 난 혜경이와 싸우고

용기를 내서 윤우와 만났었다.

그래, 그랬었다.

혜경이는 그런 애였어.

다시금 혜경이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철저히 조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토요일.

난 윤우에게 그간의 모든 일을 말했다.

특히 혜경이에 대해.

어떻게 혜경이와 친해지게 되었으며 지금 내가 어떤 처지에 처해있는지.

다만 다음주 토요일 혜경이를 해운대에 불러내야 한다는 말만은 하지 않았다.

그것까지 이야기하면 윤우가 날 너무 걱정할 것 같았다.

윤우는 입이 떡 벌어진 채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조심해.

그 애 이상해.

내가 봐도 이상해."

"그렇지?"

내가 되물었다.

"이상하긴 한데 뭔가 심증만 있지 특별한 물증이 없어.

그 애가 속해 있다는 이너서클인가 뭔가에 대해

알아낼 방법도 모르겠고.

결정적으로 그 애가 재희와 도희를 협박했다는 증거.

그걸 못찾겠어.

혹시 재희와 도희가 나한테 거짓말하나,

그 생각이 들 정도야.

그 고아원에서 걔가 행동하는 거 보면.

얼마나 사근사근한지 몰라."

"그 애도 고아원 출신이라고 했지?"

"응."

"하."

윤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긴 한숨이었다.

한편 나는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든든한 편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신께 감사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윤우를 다시 만나게 해 주셔서.

"이러면 어떨까?"

윤우가 제안을 해 왔다.

"더블 데이트를 해보는 거야."

"뭐야, 말도 안 돼."

난 윤우의 등을 쳤다.

"머리 식힐 겸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나는 윤우를 데리고 자갈치 시장에 갔다.

"부산은 역시 돼지국밥이지."

"우와, 짱 맛있어!"

허겁지겁 먹는 윤우.

마치 며칠 굶은 애 같았다.

잘 먹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다 흐믓했다.

왜 부모님들이 자기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좋다고 그러지 않는가.

나도 꼭 같은 심정이었다.

우리는 시장 구석구석을 다니며 구경을 했다.

그 중에서도 어시장이 최고.

각종 이상하게 생긴 해산물을 구경하며 다녔다.

그때였다.

내 손을 잡는 윤우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낀 것은.

"같이 다니니까 너무 좋다."

"응. 나도."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말했다.

더 말해서 무엇하랴.

함께해서 좋은 이 기분을.

이 날이 영원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내 앞에 산적해 있는 숙제가 종종 생각났다.

아, 몰라.

뭐, 어떻게 되겠지.

일단 지금 윤우와의 데이트를 즐기자!

이렇게 좋은 걸 왜 나는 대학 이후로 미루고 바보같이 고개를 떨군 채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려 했을까.

이런 나를 변화시켜 준 것은.......

혜경이다.

나도 모르겠지만,

그 애와 어울리면서 나는 조금씩 초등학교 때 자신감 있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와, 돌아버리겠네.

도대체 걔는 어떤 애인 거야.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윤우가 고민에 싸인 나를 알아채고 먼저 말을 했다.

우리는 석양에 물든 바다를 보는 중이다.

해가 지는 풍경은 왠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들어.

"나, 여기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올까?"

윤우가 진지하게 물었다.

"됐어. 뭔 소리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윤우가 정말 여기로 전학오면 같이 공부하고 데이트도 하고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정말 걱정되서 그래. 소영아.

진지하게 부모님께 말씀드려 볼까 봐."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무튼 오늘 너하고 돌아다니니까 좀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네."

난 딴 소리를 했다.

"그래. 그랬다면 됐어.

천하의 김소영.

난 너를 믿어.

네가 잘 헤쳐 나갈 거라는 것을.

넌 김소영이니까.

내가 아는 가장 용감한 사람."

윤우는 내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

용감한 사람.

그래, 초등학교 때는 일진 애들한테 당하고 있는 애들 쥐어 패고 다니긴 했었지.

윤우는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용기를 다시 일깨워 주는 것 같다.

역시, 내 사랑 윤우.

갑자기 용기가 솟아나는 것 같다.

"고마워. 윤우야."

나는 진심으로 윤우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눈이었다.

깊은 우물 같은 눈.

오마이갓!

갑자기 내 입술에 닿는 윤우의 입술이 느껴졌다.

오,

이게 뭐야.

혀?

윤우는 자신의 혀로 내 입을 벌렸다.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붕붕 뜨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혀로 내 혀를 빨았다.

오, 이게 무슨 느낌이지.

더 깊이, 더 깊이.

윤우의 혀는 내 혀뿌리까지 잡아삼킬 기세로 다가왔다.

간지러웠다.

내 몸의 어딘가에서 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뜨거운 물이.

난 몸을 떨며 윤우를 깊이 받아들였다.

윤우는 강하게 내 입에 키스를 하더니

드디어 혀를 뺐다.

이런 강렬함이라니!

처음 경험해 보는 강렬함이었다.

"사랑해. 소영아."

윤우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윤우를 기차역까지 배웅해 주면서 우리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가슴은 두근거릴 대로 두근거렸고

더 이상 할 말을 잃을 만큼의 엄청난 경험이었다.

이게 리얼 키스로구나.

그냥 입술만 부딪치는 게 아니고.

뭔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윤우는 내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했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난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윤우가 기차를 타기 전에 말했다.

"꼭 너에게 조만간 달려올 거니까 그렇게 알아."

다시 가슴이 요동쳤다. 그 말을 들으니.

윤우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아직도 해운대 바다에서의 그 일이 잊혀지지 않았다.

내 입을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오던 그의 혀.

축축히 젖는 것 같았던 내 밑.

정신, 정신을 차리자.

혜경이하고 철학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했지?

정말 그런 걸까.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혜경이하고 철학하고 이렇게 입술을 밀착하고 혀를 주고받는 사이라고?

말도 안 돼.

아니, 왜 말이 안 돼.

생각해 보면 말 안 될 것도 없잖아.

머리속은 여전히 혼란했다.

어떻게 혜경이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내야 할까.

머리속은 그 방법을 생각해 내느라 분주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감이 잡히지가 않아.

도저히 방법을 모르겠어.

제발 도와주세요.

신이시여.

저와 윤우를 연결시켜 주셨던 신이시여

제발 저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번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미행.

미행을 하는 거야.

그러면 알게 되겠지.

그런데 그때도 재희한테 미행하는 걸 들켰잖아.

이번에도 들키면 어떻게 하지.

달리 방법이 없잖아.

그래. 달리 방법이 없어.

만약에 내가 아닌 윤우가 혜경이를 미행한다면.

뭘 알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윤우는 이미 고향에 가버렸잖아.

아, 어쩌라고.

이제 딱 일주일 남았다.

재희가 말한 날짜로부터.

혜경이를 해운대에 데려오라는 재희의 말.

혜경이를 죽여버리겠다고 했지.

시간이 없어.

미행밖에.

답이 안 나와.

그놈의 이너서클인가 뭐시기인가 하는 곳.

그 현장을 찾아서 사진을 찍어야 해.

만약 재희의 말이 사실이라면.

하지만 재희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혜경이를 해하기 위한 재희의 전략이라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도무지 감이 잡히지가 않아.

시간은 일주일 남았다.

뭐라도 해야 한다.

뭐라도.

일단 독서실로 가자.

독서실에 가서 뭔가 실마리라도 찾아내자.

나는 독서실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한산했다.


버스에 올라 나는 본능적으로 앉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응?

저건 누구?

설마 이혜경?

이어폰을 낀 채로 좌석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

왠일인지 토요일 이 시간에 단정한 교복을 입고 있는 아이.

맞아. 이혜경이야.

이혜경을 이 버스 안에서 보게 되다니.

나는 버스기사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곁눈질로 이혜경이 어디서 내리는지를 체크했다.

과연 어디로 가는 걸까.

'집으로?'

'성심원?'

'라온이와의 데이트?'

설마,

원조교제?

대양 아파트 앞에 버스가 섰고 혜경이는 그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다행히 날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뒷자리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뭔가를 열심히 듣고 있었으니까.

다행이다.

대양 아파트에 사나?

그러고 보니 난 혜경이가 어디 사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셔틀버스에서 혜경이를 내려주는 곳은 외곽의 단독 주택이 몰려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난 혜경이가 거기 어느 즈음에 사는구나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할 수 없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수밖에.

이너서클인지 뭔지에 들어가는 수밖에.


아니야.

그건 정말 바보같은 짓이야.

위험한 일이야.

만약에 윤우가 알면 결사 반대할 그런 일이야.

너 반대로 윤우가 정의를 위한답시고 그런 위험한 일에 뛰어들면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말리겠지.

하지만,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잖아.

내가 직접 이너서클이 되는 수밖에.

이너서클?

내가 이너서클로 들어간다?

말도 안 돼.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야.

뉴스에서 보아도 원조교제 잘못했다가 남자들한테 살해당하는 사건이 수두룩한데

내가 왜 그런 위험한 일에 뛰어들려고 하지?

잠시 미쳤던 거야.

안 해.

그것말고 좋은 방법이 없을까.

혜경이를 미행하는 것?

어디부터?

혜경이가 지금까지 나에게 보여준 것은

독서실에서의 모습,

성심원에서의 모습,

그리고 어느 아파트 단지 앞에서 내리는 모습 뿐이다.

그 어느 경우에도 뭔가 음습하다거나 의심이 가는 정황은 없다.

어떻게 이 위기를 돌파해야 할까.


윤우야,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정면 돌파.

윤우라면 정면 돌파를 할 것이다.

용감한 윤우라면.

그리고 용감한 윤우가 믿는 나라면.

정면 돌파가 해결책이다.


"잠깐 나와 봐."

다음날.

나는 혜경이를 휴게실로 불러냈다.

요새 연애를 해서인지 혜경이는 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나도 그럴까.

누군가 나를 보면 예전보다 더 빛이 난다고 생각할까.

아마도 그렇겠지.

나 스스로도 가끔 내가 예뻐 보일 때가 있으니까. 하하.

"이너서클 어떻게 들어가면 돼?"

나는 먼저 선수를 쳤다.

"왜?"

혜경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돈이 필요해. 더 이상 알 건 없고."

"돈?

단지 그 이유야?"

"응. 단기 알바로 목돈을 마련할 일이 있어서."

"와, 많이 변했네. 김소영.

천하의 모범생이 이너서클에."

"놀리지 말고."

"사실 그거 다 뻥이야. 이너서클인가 뭔가."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내가 꾸며낸 거라고."

순간 화가 났다.

"야! 이혜경! 이 시발."

나는 혜경이에게 달려들어 머리채를 잡아챘다.

"도대체 너 누구야.

뭐하는 애야?"

그러자 혜경이가 미친년처럼 웃었다.

"돈이 목적이 아니지?

너 나 뒷조사 하니?

혹시 재희한테 뭐 좀 들은 거 있나?"

순간 뜨끔했다.

"네가 걔네들한테 뭘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하고 완전히 다르다는 것만 알아."

"알아듣게 말해 봐."

나는 혜경이를 다그쳤다.

"그렇다면 네가 재희한테 들은 거를 나한테 먼저 말해보던가."

아, 이런 환장할 상황.

"나 하나만 묻자.

너 원조교제 하고 다니는 거 맞니?"

"하하하.

너 지금까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순간 당황.

"그럼 너 밤에 나갔다가 오는 거는 뭐며

그때 은근히 철학을 꼬셔보라고 이야기한 건 뭐야.

그리고 이너서클이 있다고 미술 선생하고 철학선생이 그 이너서클에 포함되어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뻥이라니.

도대체 진실이 뭐냐고."

난 애써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알면 다쳐."

혜경이가 말했다.

"내가 널 너무 깊숙한 곳에 들어오게 한 것 같다.

다시 예전의 모범생 너로 돌아가.

여기서 다 끝내고."

이건 뭔 개소리야.

"그래, 나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한 이유는 뭐야."

"야. 김소영.

네가 그런식으로 이야기하니까 슬픈데."

"슬픈 거 좋아하네.

처음에 너 나한테 이너서클 어쩌구 하면서 나한테 이 사건에 대해

뛰어들게 해놓고 이제 와서 발뺌이야, 뭐야."

"너 좋은대로 생각해라. 그동안 즐거웠다. 그럼 이만."

총총 사라지는 혜경이.

마치, 무언가에 놀아난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혜경이의 수에 놀아난 그런 기분.

아니면 난 재희에게 놀아나고 있는 걸까.

아니, 도대체 진실은 어디에 있는 거야.

아.

나는 왜.

저 애한테 휘둘리는 그런 느낌이 드는 걸까.

혹시 싸이코패쓰인가.

거짓말에 능한 싸이코 패쓰.

임기응변에 능한 싸이코패쓰.

되는 대로 거짓말을 꾸며내서 순간을 모면하는 그런 싸이코 패쓰말이다.

만약에

이너서클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너서클이라는 게 존재해서 혜경이가 도희를 협박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리고 나머지 죽거나 실종된 아이들도 혜경이가 그들의 약점을 물고 늘어져서 협박해서였다면?

지금 나에게 한 그 모든 말도 모두 다 거짓말이라면?

진짜 싸이코 패쓰라면?

모든 게 말이 된다.

있지 못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물증이 없다.

혜경이가 일을 저질렀다는 어떤 물증이 없는 것이다.

그 물증을 찾아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철학쌤?

'선생님 저 선생님 좋아해요. 선생님하고 사랑을 나누고 싶어요.'

이렇게 쪽지를 보내볼까.

어떻게 나오는지.

한 번 떠볼까.

아, 아냐.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혜경이의 실체를 파악할 그런 방법이 있을 거야.

아니, 반드시 찾아내야 해.

구원은 전혀 다른 곳에서부터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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