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내게 말했다.
"오늘 동생 복지관에서 발표회 하는데 올래?"
복지관.
동생은 복지관에서 여러가지 활동을 한다.
점토로 그릇을 만들어오기도 하고 꽃꽂이를 해오기도 하고 수제비누를 만들어오기도 한다.
아침에 복지관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온다.
그런데 그 복지관에서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발표회를 한다는 것이다.
"언제인데?"
"다음주 토요일."
다음주 토요일이라면 혜경이를 데리고 해운대에 가야 하는 그 때이다.
"안 될 거 같은데."
"네가 와야 될 거 같아."
엄마는 진지했다.
엄마가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적은 거의 없었다.
"너 요새 동생에 대해 뭐라도 해주는 거 있니?
하나도 없잖아.
그런데 동생이 가서 노래부르고 한다는 데 한번은 가줘야지. 누나로서."
휴.
엄마, 난 지금 무척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구요.
"몇시인데?"
"아침 열시."
그렇다면 시간은 충분했다.
"알았어."
"너네 학교 봉사 동아리 있잖아.
거기 애들이 지금까지 일주일에 한번씩 복지관에 와서 봉사활동했는데
발표회를 연대.
너도 와보면 좋을 거 같아서.
혜경이래나.
걔가 그렇게 발벗고 나서서 행사를 준비하고 있더라고."
"응, 뭐라고?"
난 순간 망치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혜경이?
설마 이혜경이야?"
"그럴걸.
애가 싹싹하니 붙임성도 얼마나 좋은지.
왠만하면 나도 자원봉사자들 이름 안 외우는데 걔 이름만은 저절로 외워지더라고."
"이혜경이 자원봉사를 한다고?"
"왜 그렇게 놀라? 오늘도 하고 갔어."
"토요일마다 하는 거였어?"
"응. 와서 복지관 애들한테 댄스 알려주고 같이 놀아줘.
생긴 건 얼마나 이쁜지."
"그만!"
나는 소리를 질렀다.
"이게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엄마가 호되게 야단을 쳤다.
내가 변한 사이에 엄마도 변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예전의 내 눈치를 보던 엄마가 아니었다.
"아오. 진짜 열받아."
나는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게 다 뭔가.
사람들을 홀리고 다니는 여우인가.
도대체 어떤 아이이지?
여기저기 봉사활동에 안 다니는 데가 없네.
아니, 그렇다면 그렇게 착한 애라면
왜 재희가 그런 말을 한 걸까.
재희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 혹시?
혹시
혜경이가 피해자인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정황으로 보아서는 혜경이는 세상 둘도 없는 착한 아이인데.
그런 아이가 이런 지저분한 일에 연루되어 있을 리가 없다.
도대체 뭐지.
재희를 더 알아봐야 하나.
하지만 아무 단서도 없는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다시 한번 추리를 되짚어 보자.
그들은 모두 같은 고아원 출신이다.
그리고 뭔가가 뒤틀려 사이가 멀어졌다.
그리고 한 명씩 죽거나 실종되기 시작했다.
만약 재희 도희 혜경이가 이너서클이라면?
그들이 모두 한통속이라면?
그리고 나를 속이고 있다면?
혹시, 내가 그들의 타겟이라면?
그 가능성도 배제 못할 것이었다.
도대체 그들은 누구일까.
성심원.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모든 가설은.
여기서 확실한 것은 그들이 모두 성심원 출신이라는 것,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가정으로 입양되었다는 정도.
나머지는 하나도 확실한 게 없다.
그 누구의 말도 믿을 수가 없다.
그런데 왜 난데없이
윤우와의 뜨거웠던 키스가 생각나는 거야.
아 심장이 두근거려.
왜 아이들이 남자친구를 사귀면 뭔가 달라보이는지 알 것 같다.
모두 그들만의 어떤 비밀 같은 게 생기기 때문이다.
사람이 비밀을 품으면 뭔가 달라보이기 마련이다.
그런 거 같다.
내가 윤우와의 관계를 마음에 비밀로 품고 있는 것처럼
그들 역시도 마음에 모두들 비밀 하나 이상씩 품고 있다.
그것은 확실하다.
성심원에 대해서 조사해보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도대체 그들은 어떤 관계였을까. 성심원에서.
혹시 혜경이가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왕따당한 그런 관계였을까.
그래서 그 모든 일을 꾸민 걸까.
상상하지 말자.
모든 것은 팩트에 기초해야 한다.
팩트만 믿고 가자.
성심원이란 어느 곳인가.
1946년 카톨릭 선교사가 박애를 근간으로 지어 전쟁고아를 거두어 들였다는 고아원.
우리학교도 카톨릭 여자고등학교라고 말했던가.
뭔가 연관성이 있는 걸까.
아. 모르겠다.
배고파.
떡볶이나 먹자.
아니야 무슨 밤중에 떡볶이야.
윤우를 생각하면서 간신히 참는다.
월요일.
아무런 소득없이 주말이 지나가고 월요일이 왔다.
단 6일만이 남은 것이다.
재희의 명령? 또는 부탁의 날까지.
혜경이를 해운대로 데리고 오라는 재희의 말. 또는 명령.
혼란하다. 혼란해.
흠.
혜경이와 재희는 어떤 관계일까.
정말 원수같은 그런 관계일까.
그들의 관계를 면밀하게 조사해 보도록 하자.
다행히 1교시는 철학시간이었다.
- 자 오늘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는 4원소, 물, 불, 공기,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죠.
아 지루하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읭?
혜경이가 쪽지를 던지는 모습이었다.
쪽지는 정확히 혜경이의 책상에 안착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철학샘은 그런 혜경이의 행동을 묵인하고 있다.
독일어 샘이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
"앞에 있으면 너네 딴짓하는 거 훤히 보여"
나도 혹시 앞에 나가서 발표할 일이 생기면 아이들이 뭐하는지 한눈이 들어오곤 해서
철학은 혜경이를 봐주고 있다는 심증이 더욱 굳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도대체 왜.
그리고 그 쪽지는 어떤 내용일까.
온통 미스테리.
할 수 없다. 물어보는 수밖에.
나는 쉬는 시간 혜경이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재희에게 갔다.
"야. 그 쪽지 무슨 내용이야?"
"뭐긴 뭐겠어. 협박성 쪽지지."
재희는 입을 닫았다.
이번에는 재희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 혜경이에게 갔다.
"야. 아까 너 재희한테 쪽지 보내는 거 봤거든."
"내가? 궁금해?
내가 뭐라고 했는지?"
혜경이는 발뺌을 했다.
"야. 이재희!"
갑자기 혜경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너 쪽지 내놔봐.
아까 내가 너한테 보낸거."
혜경이는 재희에게 가 우왁스럽게 쪽지를 뺏었다.
그리고 나한테 던졌다.
'끝나고 공룡분식. 떡볶이 먹자. 콜?'
뭐야.
이것들이.
어이가 없네.
그런데 만약에 공룡분식에서 뭔가 협박성 발언을 하려고 했다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떡볶이를 먹자는 제안일 수도 있고.
"뭐 이상한 거 있어?
떡볶이 먹자는데?"
혜경이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응. 아니야."
난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니 반응이 이상해. 너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 안 하잖아.
그냥 나한테 아무말 안 하거나 그냥 넘어가겠지. 무슨 쪽지냐면서. 그런데 너는 지금 엄청나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어.'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혜경이에게 아무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래.
나는 나대로 조사하는 거야.
이렇게.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막 점심을 먹고 평화롭게 창문에 붙어 언니들 농구하는 걸 오랜만에 보고 있는 중.
거기에는 내 짝언니,
나를 옥상으로 데려가서 무서운 일진 언니들을 만나게 한 그 언니도 끼어 있다.
짝언니는 개뿔.
그때였다.
세밀하게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리는 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재희였다.
재희는 내게 쪽지 하나를 건네주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는 그 쪽지를 가지고 화장실에 갔다.
'아까 그 쪽지 말야.
너 보라고 일부러 혜경이가 조작한 거야.
자기하고 나하고 친하다는 거 과시하려고.
쫄리는 게 있나 봐.
이따가 분식집에 가서 나한테 아마 얼른 이 지구상에서 꺼지라고 협박하려고 했을걸.
조심해. 걔 보통 애가 아니야.
아무튼 이번주 토요일 약속 지켜.'
휴.
한숨부터 나왔다.
도대체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거야.
이 진실과 거짓 싸움은 이번 주 내로 끝내야 한다.
더 탐문을 해보자.
세세히 더 살펴보자.
나는 교실로 돌아왔다.
재희는 다른 애들과 같이 농구하는 언니들을 구경하고 있었고 혜경이는 평소와 똑같이
이어폰을 끼고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참 평화로워 보이는 여고 교실의 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
속으로 들어가 보면
무시무시한,
또는 말도 안 되는,
그런 이야기들이 얽혀 있단 말이야.
역시 멀리서 보면 인생은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괜히 나온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약 사십명의 아이들 저마다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 걸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한 교실에 있는 우리들 모두 사연을 각각 가지고 있을 거라는.
크건, 작건.
그렇게 우리는 한 해를 같이 보내고 있다는 그런 생각.
공부가 다가 아니야.
갑자기 "아!" 하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그 고함소리를 속으로 삼켰다.
'다 털어놔 봐.
너희들의 이야기를.
지금 우리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번주 토요일에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아니?'
하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지르고 싶어.
그리고 나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아.
그때 누군가가 이야기를 꺼냈다.
희영이였다.
"야. 그런데 꽤 조용하다. 우리학교."
"그게 무슨 소리야."
옆자리에 서서 같이 농구를 보고 있던 기순이가 되물었다.
"한 건 정도 터져줘야 될 타이밍인데.
사건이든 실종이든 말이야.
봐봐.
마지막 사건 이후에 벌써 두 달쯤 지났잖아."
"야!"
반장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너 꼭 사건을 기다리는 거 같다."
"아니 기다리는 건 아니고......"
희영이가 우물쭈물 말꼬리를 흐렸다.
"더 이상 사건이 생기면 안 되지. 그럼 그게 무슨 소리야."
반장이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그러자 희영이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만큼 금기어인 셈이다.
진희의 죽음 이후에 다들 쉬쉬하면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침묵을 희영이가 깨버린 것이다.
그리고 반장은 다시 그 이야기가 나오지 못하도록 관 속에 집어넣고 대못을 박은 셈이다.
"왜, 이야기도 못해?"
갑자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이혜경이었다.
"너 반장. 왜 애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도 못하게 해.
뭐 이야기하면 사건이 생기고 이야기 안하면 사건이 안 생기나?"
그래. 저게 이혜경이지.
빙그레 웃으며 돌려까는 저 모습이.
이혜경 맞네.
반장은 잠시 당황한 듯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냐.
무서워?
또 그런 일이 생길까 봐?
우리 반 진희가 죽은 것처럼 또 누가 죽어나갈 까 봐?"
이혜경 세게 나가네.
"그래 무섭다. 그럼 너는 안 무섭냐?"
지지 않는 반장.
"그래. 무서울 수도 있지."
한 발 물러서는 혜경이.
그리고 다시 이어폰을 끼고 소설 읽기를 시작하는 혜경이.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혜경이란 아이란 생각이 든다.
저 이어폰은 위장이 아닐까.
사실은 아무 음악이 나오지 않는 그냥 위장으로 듣고 있는 척하려고 끼고 있는 이어폰.
그렇지 않고서야 애들 대화하는 걸 다 캐치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난 속으로 생각했다.
참, 이상한 아이야.
다음은 가사 시간이었다.
오늘은 잠옷을 만드는 시간.
홀치기 기법을 배우는 그런 시간이다.
"아휴. 시간 아깝게 이런 걸 왜 해."
아이들은 투덜대면서 뒤 사물함으로 가서
준비물을 꺼내온다.
지난시간에 사용했던 천하고 바늘 같은 것들.
"악!"
비명소리가 들렸다.
난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재희였다.
"시발!"
"뭔데?"
아이들이 웅성댔다.
"누가 내 거에 손댔어.
씨발. 씨발!"
재희는 쌍소리를 해댔다.
거의 미친 것처럼.
그리고 바닥에 누워서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미친 아이처럼.
아이들이 재희를 둥그렇게 감쌌다.
"갑자기 왜 이래. 왜 이래."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수근거렸다.
"다 자리로 돌아가."
반장이 아이들을 통솔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흩어질 줄을 몰랐다.
"시발년. 시발년."
재희는 혼잣말을 계속했다.
무서웠다.
꼭 뭐에 씌인 것처럼.
오마이갓.
난 재희가 꼭 쥐고 있는 파자마를 보았다.
그 파자마 육각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엄청 큰 크기로.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혜경이인가.
역시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은 없는 상태.
반장은 재희를 부축해 양호실로 데려갔다.
"봤어?"
아이들은 수근댔다.
"누가 재희 파자마에다가 무늬를 새겨놨어.
누구지?"
"아오 무서워."
"무늬 봤어?"
"봤지. 육각무늬."
"내가 재희라도 열받을만 하다."
"누구야?"
아이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사람 돌아버리게 하네. 시발."
갑자기 재희가 일어났다.
막 반장의 부축을 받으며 쓰러져 있다가.
그러더니 성큼성큼 누군가의 책상으로 오는 거 아닌가.
난 혜경이에게 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오.
안 돼.
재희가 나에게로 오고 있잖아.
그러더니 내 머리채를 잡는 거였다.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면서.
나에게 연기를 해달라고 하는 거 같았다.
이런 난감한.
"야. 너 왜 나한테 이런 짓을 해?"
재희가 나에게 소리쳤다.
"나, 아니야. 아니라구."
나는 최대한 연기하는 톤으로 말했다.
그때 가정 선생님이 들어왔다.
"이게 다 뭐야! 제자리로!"
선생님은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정선생님은 성격이 더럽기로 유명하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아이. 왜 나한테 지랄이야.
그때 재희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희는 한방에 보내려는 것이다.
그 용의자를.
한마디로 혜경이를.
그래서 짐짓 이번 일이 혜경이와 관련이 없는 척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나한테 지랄할 건 뭐야.
내가 뭐 동네 북인가.
아오 열받아.
'너네들 이게 다 뭐하는 짓이야!'
하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
확 그냥 저질러 버려?
아니지. 나도 머리를 굴려야 한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어찌저찌하다보니 월요일이 지나가고 있다.
자율학습을 하지 않는 재희는 이제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자율학습을 하는 아이들은 남아서 공부를 하다가
알아서 집으로 간다.
자율학습은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감독한다.
말이 감독이지 뭐 하나도 하는 거 없다.
그냥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하거나 할 뿐.
막 자율학습을 하려고 준비하려는 순간
쪽지하나가 툭 떨어졌다.
'아까는 미안했어
어쩔 수 없었어
일이 끝나면 다 설명해줄게'
재희가 내 곁을 지나가며 떨어뜨린 거였다.
오늘은 성격이상한 교련의 시간.
그 교련이 쪽지를 놓칠리가 만무했다.
"뭐야?
지금이 쪽지 주고받는 시간이야?"
아오 시발.
저 인간은 눈이 열개는 달린 게 틀림없어.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다니.
다행히 혜경이는 자리에 없었다.
재희도 그걸 알고 나에게 쪽지를 건넨 거였다.
휴.
불행중 다행이네.
나는 공부에 몰두하는 척했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아.
이런 황당한 시츄에이션이 다 있나.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윤우라면 어떻게 풀었을까.
초등학교 때 아이들의 지우개를 훔쳐가는 아이가 있었는데
윤우가 그 애를 점잖게 타일러 사건을 무마한 적이 있었다.
그때처럼 일이 간단하다면.
하지만 간단치가 않잖아.
지금 뭐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르는 그런 형국이잖아.
복잡하다 복잡해.
공부나 하자.
뭐 어떻게 되겠지.
저녁 시간.
저녁 식사를 신청한 아이들은 저녁 도시락을 업체에서 받는다.
그러면 자유롭게 식사를 하고 한시간 가량 자유 시간을 가진다.
여섯시부터 일곱시까지 주어지는 자유 시간이다.
오늘은 소세지네.
앗싸.
소세지를 막 케찹에 묻혀서 입으로 가져가려는 순간
이거 뭐야.
소세지가 교복 치마에 떨어졌다.
제기랄.
뭔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아냐. 아닐 거야.
그냥 소세지가 떨어진 것 뿐이야.
나는 휴지를 갖다가 치마에 떨어진 소세지를 휴지통에 버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뒷문을 열고 혜경이가 등장했다.
어디 갔다가 지금 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자율학습 일교시를 땡땡이 치고.
"큰일났어."
혜경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 혜경이는 처음이었다.
"재희가 실종됐어."
머리가 띵했다.
뭐라고?
순간 교실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말도 안 돼.
"재희가 실종됐다고."
혜경이가 재차 말했다.
순간
'아니. 혜경이가 어떻게 이 사실을 먼저 알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혹시.
혹시.
혜경이가 재희를?
아니, 아니지.
재희가 죽었다니.
지금 무엇보다 그 사실에 집중해야지.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혜경이에게 물었다.
"아까,
재희하고 떡볶이 먹으려고 만나기로 했거든.
공룡분식에서.
그런데 재희가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는 거야.
연락도 안 받고.
너네 사건 안 일어난지 두 달 되가는 거 다 알잖아.
재희는 분명. 재희는 분명."
갑자기 혜경이가 울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였어.
나와 재희는.
단짝이었어.
너희는 모르겠지만."
혜경이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하지?
걔네 엄마 지금 난리났을 텐데."
그때 선생님이 들어왔다.
자율학습 2교시 담당은 음악 선생님이었다.
"뭐야?
다 제자리로."
하지만 아이들은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선생님."
반장이 울먹이며 말했다.
"재희가, 재희가 없어졌대요."
"뭐?"
갑자기 선생님 목소리가 커졌다.
"핸드폰도 안 받고 연락이 안 돼요."
그때였다.
뒷문이 열리며 누군가 하하 웃으며 들어왔다.
재희였다.
"왜, 이혜경! 내가 사라지길 바랬니?"
오마이갓!
이건 누구?
아이들은 모두 입을 벌리고 다물줄을 몰랐다.
"니들 장난쳐?
다들 자리로 돌아가."
그때야 아이들은 혜경이를 한번씩 미심쩍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자리로 돌아갔다.
재희는 재빨리 한 마디만 남기고 사라진 후였다.
뭐지?
도대체 둘 사이에 오가는 이 묘한 기류는 뭘까.
미스테리야.
아무튼 이번 일로 혜경이에 대한 아이들의 불신이 쌓인 건 확실했다.
혜경이도 그걸 인식했는지
내내 조용히 평소 모습으로 돌아가
책 사이에 소설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척을 했다.
다행히 자율학습은 선생님이 아이들이 뭐 하는지 세세히 보지 않았다.
그저 공부하는 척만 하면 그만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재희가 혜경이를 엿먹인 것은 확실했다.
이번 일로.
이제 독서실에 갈 시간.
독서실에 가야지.
오늘따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독서실 가는 셔틀버스에서 혜경이와 만나기가 싫었다.
부담스러웠다.
도대체 이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하지만 혜경이를 피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한 일이 될 것이었다.
평소처럼 행동해.
나는 나 자신에게 명령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맨 뒤로 가서 앉았다.
이미 시온이는 가운데 쯤 앉아서 혜경이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혜경이를 본 그의 얼굴이 환해지는 걸 나까지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혜경이는 쌩하고 시온이를 지나쳤다.
누가 보면 사귀는 사이인 줄 전혀 모를 것이었다.
아무튼지 버스는 출발했다.
갑자기 혜경이 입을 열었다.
"아까 다 뻥친 거야.
나 걔랑 원래 안 친해."
드디어 슬슬 본색이 드러나는 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공룡분식에서 왜 만나자고 했는데?"
"걔한테 경고하려고.
다시는 나 괴롭히지 말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
그때 혜경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 걔 밖에서 만난 적 있지?"
"아니."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걔가 뭐라고 했건
걔가 나에 대해 뭐라고 했건
그거 사실 아니야.
그것만 알아둬."
아 도저히 모르겠다.
또다시 사건은 미궁 속에 잠겨버렸다.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버스는 독서실에 도착했다.
"오늘 시온이하고 성심원에 가기로 했어.
너도 올래?"
혼자 있고 싶어.
그냥 나 혼자 있고 싶어.
"아니. 난 공부할 게 많아서."
시온이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헐레벌떡 혜경이를 따라갔다.
그 둘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비로소 후. 숨이 쉬어졌다.
압박감에서 조금 자유로워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 책상이 그리웠다.
'난 책상에서 세상을 본다' 라는 내 모토가 써져 있는 내 책상이.
예전처럼 모든 걸 다 잊고 공부만 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하지만 지금, 나는 공부가 간절했다.
그 고요한 침묵의 바다.
머리속에서 바삐 돌아가는 사고력.
문제풀이.
이 모든 게 너무나 하고 싶었다.
간절히.
나는 내 책상으로 재빨리 올라갔다.
오늘은 공부를 열심히 하자.
내 책상에 도착한 순간,
난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다.
육각무늬.
누군가가 내 좌우명 옆에 육각무늬를 그려놓은 것이다.
이런 시부럴.
갑자기 몸이 떨려왔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왜 나에게까지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범인은 누구일까.
조사를 해야 한다.
조사를.
나도 모르게 혜경이의 책장으로 갔다.
그리고 그때 보았던 일기장을 찾았다.
철학 자습서 사이에 끼어져 있던.
없었다.
그때 분명히 있던 일기장이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다.
이게 무슨 관련이 있을까.
내 책상 앞 육각무늬는 무엇을 의미할까.
내 책상 앞에 육각무늬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 누가, 왜?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도저히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윤우가 필요해.
"윤우야."
나는 윤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무슨 일이야."
윤우가 놀라서 내게 되물었다.
"나, 너무 힘들어."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놓아버렸다.
이런 약한 모습 보이기 싫었는데.
눈물이 막 쏟아졌다.
"무슨 일인데. 왜 그래. 소영아.
차근차근 말해 봐."
하지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흐흐윽."
나는 계속 눈물만 나올 뿐이었다.
"이번주 토요일에 갈테니까 꼼짝 말고 기다려."
아니야. 토요일은 결전의 날 아닌가.
그야말로 모든 게 결정되는 날.
"아니야. 오지 마.
그날 가족행사 있어.
우리 가족 다 어디 가."
나는 윤우에게 거짓말을 했다.
윤우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다 이야기할게.
걱정마."
나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런 약한 모습 보이기 싫었는데. 젠장.
윤우가 얼마나 걱정할 거야.
그건 그렇고 지금 모든 게 다 힘에 부친 게 사실이다.
모든 게 내 힘 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여기에 괜히 뛰어들었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냥 거북이처럼 땅에 머리를 처박고 공부나 할 걸.
괜히 혜경이하고 친해지면서 모든 게 꼬여버렸어.
성적이 말해주고 있잖아.
떨어지는 점수들.
기말고사 때 떨어진 점수.
어쩔 거야.
이렇게 해놓고 네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겠어?
난 스스로를 다그쳤다.
아, 미워. 나 자신이 싫어.
다시 옛날로 돌아갈래.
하지만 이미 발을 들여놓은 이상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누군가가 내 책상 앞에 육각무늬까지 그려놓은 이상.
이 사건은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그런 사안이었다.
나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래. 나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윤우를 생각하며 힘내자. 힘내.
넌 할 수 있어. 천하의 김소영이잖아.
다시 한 번 머리를 써 보자.
자,
지금 필요한 건
재희와 혜경이와의 관계에 대한 진실.
그 둘은 과연 어떤 사이일까.
혜경이는 왜 재희가 실종되었다고 급히 교실로 와서 떠들어댔을까.
재희가 실종되어야만 할 이유가 혜경이에게 있는 걸까.
그리고 유유히 나와 혜경이에게 엿을 먹인 재희.
"왜, 내가 실종되었으면 좋겠어?"
하고 말하며 모두를 벙지게 만들었지.
그리고 혜경이에게 모든 의심의 화살이 돌아가게 만들었어.
혜경이가 이상한 아이인 것처럼.
하지만 혜경이는 셔틀버스에서 말했지.
재희가 내게 말한 모든 것은 거짓말이라고.
실제로 당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라고.
물고 물리는 거짓말.
그 중의 진실은 무엇일까.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 작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토요일날 혜경이 데리고 해운대로 와.'
재희의 말이 머리속에서 계속 울렸다.
어쩔 건데.
죽여버릴 거야.
재희는 말했었지.
그리고 재희는 나와 혜경이가 이 독서실에 같이 다닌다는 걸 알고 있어.
혹시 재희가 내 책상에 육각무늬를 그려놓았나?
어떤 협박의 의미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리속에서는 이번 주 토요일의 상황이 그려질 뿐이었다.
혜경이를 칼로 찌르려고 하는 걸까.
아니면 치열한 육탄전?
아니면 누구를 데려와서 대신 죽이려고 하는 걸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 걸까.
아. 뒤숭숭한 꿈.
일어나도 몸이 개운치가 않았다.
꿈 속에서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그래도 학교는 가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는 가야지.
이 모범생의 근성.
죽을 때 죽더라도 학교는 절대 결석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가 내 안에 있다.
가서 사건을 좀 더 파봐야 한다.
뭐가 나오건 간에.
하루종일 학교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머리가 혼란했다.
점심 시간도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나는 깨작거리며 겨우 도시락을 먹었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야. 대박"
"저게 누구야?"
밖에서 농구를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이 모두 소리를 쳤다.
"대박 훈남이다.
어디 학교 학생이지?
저게 어디 교복이냐?"
아이들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순간!
머리속에 짚히는 게 있었다.
혹시 윤우?
윤우가 학교를 찾아와?
윤우는 학교 교문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봐달라는 듯.
아,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얘는 왜 학교는 결석하고 여기까지 온 거야.
미쳐버리겠네.
하지만 눈물나게 고마웠다.
그리고 보고싶었다.
윤우야. 고마워.
날 찾아와줘서.
나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지금 내가 교문 밖으로 나간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윤우까지 이 사건에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윤우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학교 앞에서 왼쪽으로 이백미터정도 직진하면 롯데리아 나올거야.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 말을 알아들은 걸까.
"간다.
와. 대박 훈남.
간지 짱.
왜 온 걸까.
여친 보러 왔나?"
아이들은 궁시렁대며 이야기를 해댔다.
휴. 다행이다.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수업 끝나고 윤우를 볼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오후 수업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마지막 수업은 체육시간.
오늘은 뜀틀 넘기.
오마이갓.
자신없는 그런 종목.
뜀틀 하나를 세로로 놓고 뛰어넘는 그런 운동이었다.
우리는 한 줄로 서서 체육 선생님의 시범을 보았다.
"뛰어와서 뜀틀을 짚은 후에 반동을 이용해서 가볍게 뛰어넘으면 돼."
오.
선생님의 시범이 끝나고
아이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가다가 넘지 못하고 뜀틀에 주저앉는 아이도 있었다.
그것은 나.
아이들이 대놓고 웃지는 않았지만
킥킥거리는 게 느껴졌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다행히 뜀틀을 못넘는 아이는 나뿐이 아니었다.
나 이외에도 약 다섯 명의 낙오자가 있었다.
"자, 다음은 이단 연결이다.
이건 위험하니까 하고 싶은 사람만 하도록 하겠다."
선생님의 말에 모두 웅성거렸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저 해볼게요."
모두가 읭?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뜀틀 하나도 뛰어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걸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해볼래요."
"괜찮겠어?"
선생님은 내게 재차 물었다.
"네!"
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참 많이도 변했구나.
체육 선생님은 뜀틀을 세로로 두개 연결했다.
"자. 출발!"
나는 힘껏 달렸다.
멀리서 봤을 때는 그렇게 길지 않아 보였는데
가까이 갈수록 왜 이렇게 길게 보이는 거지?
넘을 수 있을까?
넘을 수 있을까.
에라 모르겠다.
날았다!
그리고 두번째 뜀틀의 가운데를 손으로 짚었다.
퍽!
여기는 어디!
뜀틀 가장자리에 엉덩방아를 찧고 매트로 곤두박질!
아 겁나 아파.
하늘에서 별이 보였다.
그것보다 창피했다.
이번에는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뭐, 어쩔.
갑자기 윤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자 없는 용기가 솟아났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또 해볼 사람?"
"저요!"
혜경이였다.
혜경이는 바람처럼 날아올라 가뿐히 뛰어넘고 멋지게 착지했다.
오.
아이들이 감탄했다.
"저 해보겠습니다!"
재희였다.
갑자기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
아이들은 재희에게 박수를 쳤다.
와 대박.
그 외에도 약 일곱 명의 아이가 도전을 해서 성공했다.
"삼단 도전하겠습니다!"
아니 이것은 누구?
재희였다!
"삼단은 안 돼!
위험해!"
선생님은 말렸다.
"괜찮아요. 해보고 싶어요."
선생님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뜀틀 하나를 더 연결했다.
할 수 있을까.
오마이갓!
재희는 가뿐히 해냈다.
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생각해보면 재희는 체육을 잘했다.
지난번 체력장에서 반에서 제일 잘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무서워.
그런 재희가 토요일에 혜경이를 불러내다니.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저도 해보겠습니다!"
누구야.
아이들은 웅성거렸다.
혜경이였다.
"할 수 있겠나?"
선생님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혜경이를 쳐다보았다.
"네!"
햬경이는 씩씩하게 소리쳤다.
"자. 출발!"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혜경이는 재빠르게 달렸다.
오마이갓.
이건 무엇?
앞구르기?
혜경이는 뜀틀로 뛰어올라 앞구르기를 하고 점프를 해 멋지게 착지했다!.
"와!"
선생님은 먼저 박수를 쳤다.
"자, 다들 박수!"
아이들도 선생님을 따라 박수를 쳤다.
그때 나는 재희를 보았다.
샐쭉거리는 그 표정을.
그 표정은 질투의 표정이었다.
하교시간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뛰었다.
윤우가 보고싶어서.
'오늘 나하고 저녁먹고 이야기 좀 할래?'
갑자기 혜경이에게서 쪽지가 날아왔다.
왜 하필 오늘이야.
이런 제길.
아무래도 혜경이는 나에게 무언가를 털어놓을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윤우가 기다리고 있다.
'미안. 집안 일이 있어서.'
나는 혜경이에게 쪽지를 써서 아무도 모르게 살포시 혜경이 책상에 놓았다.
6교시 끝나는 종이 울렸다.
해방!
오마이갓!
이미 나는 오늘 담임 선생님한테 자율학습을 못 한다고 양해를 구한 후였다.
담임선생님은 내 의외의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알겠다고 했다.
"오늘 동생을 돌봐야 해서요."
이렇게 무뚝뚝하게 말했는데도.
거짓말이라는 게 별 거 아니라는 생각도 잠시 스쳐갔다.
어쨌거나 나는 윤우를 만나야 하니까.
룰루랄라.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지금쯤 윤우는 뭘 하고 있을까.
학교가 끝나자마자 윤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나 지금 학교 끝났어."
아까 내가 이야기한 롯데리아에서 나를 꼼짝않고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으이구. 귀여운 것.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리고 그때 윤우와 첫키스 하던 느낌.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던 그 느낌이 살아났다.
윤우를 보자마자 나는 할말을 잃었다.
안보는 그 기간동안 윤우는 더 멋있어져 있었다.
우리는 구석자리로 갔다.
할말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나씩. 하나씩. 설명하자.
윤우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육각무늬에 대해서라면 윤우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재희의 아지트에서 당한 일은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을 이야기해야했다.
아니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임금님귀는 당나귀귀'라고 말하지 못해 답답해 했던 옛 이야기의 사람과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육각무늬 알지?"
"응."
윤우는 내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휴.
진정하자. 진정해.
"지금까지 죽거나 실종되어 있는 사람은 모두 그 육각무늬와 연관이 있어.
그리고 지난 주에 난 우연히 죽은 애와 베프였던 애의 교복에 새겨진 육각무늬를 봤어."
"어?"
윤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서 뒤를 밟았지. 그 애가 걱정되서."
"그런데?"
윤우가 재촉했다.
"어떤 달동네 같은 곳으로 가는 거야. 미로같은 데로.
나도 따라갔지.
그 애가 도착한 아주 허름한 판자집이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 안에 들어가 보니까 실종자로 알려졌던 우리 학교 애가 숨어서 살고 있었던 거야.
죽은 애 베프하고 같이."
"뭐라고? 진짜?"
"여기서부터가 무서워.
나보고 그 죽은 애 베프, 재희가 우리반 애 혜경이를 책임지고 이번주 토요일에 바다로 데리고 나오라는 거야.
자기가 죽일 거라면서."
순간 윤우는 몸이 얼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느껴졌다.
내 손에 닿은 그의 손의 따스한 감촉이.
빠르게 뛰던 심장이 비로소 조금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혜경이라는 애가 좀 이상하긴 해.
나하고 같은 독서실 다니는데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어.
표면적으로는 엄청 착하고 모범생인데 아닌것 같고.
아무튼, 재희말로는 그 애가 아이들의 죽음의 원인이라는 거야.
아주 단단히 벼르고 있더라고.
다 끝내버리겠다고."
그 때 일을 생각하자 다시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윤우는 내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아주었다.
"그러면서 데리고 오지 않으면 나한테도 큰 일이 닥칠거래.
그리고 내가 너한테 울면서 전화하던 날
내 독서실 책상 앞에 누가 육각 무늬를 그려놨어.
너무 무서워서 너한테 전화한 거야."
한동안 윤우는 말이 없었다.
"그랬구나.
난 네가 그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윤우가 풀죽은 채로 말했다.
"아니야.
난 네가 학교도 안 가고 오기를 바란 건 아니야.
왜 그랬어."
"여자친구가 울면서 전화하는데 그럼 당연히 와봐야지."
여자친구?
그런 내가 윤우의 공식적인 여자친구?
이 무서우면서도 기분좋은 복합적인 기분은 뭐지?
아무튼 좋긴 좋다.
"어떻하지 윤우야?"
"어떻긴 뭘 어떻게 해. 나만 믿어."
윤우는 결연하게 말했다.
"내가 곁에 있을 거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오마이갓!
이렇게 든든할 수가.
갑자기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전화할 때까지만 해도 엄청 무서웠던 세상이 다시 따스하게 다가온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 윤우는 나에게 그런 빛과 같은 존재였다.
"일단 평소처럼 행동해.
내가 혜경이인가 뭐시긴가 하는 애 좀 알아볼 테니까.
내가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뜨이게 널 따라다닐게."
오케이. 좋았어.
"이제 뭐 좀 먹을래? 배 안고파?"
그 말을 들으니 문득 허기가 느껴졌다. 그제서야.
나는 거의 한 시간을 쉴새없이 윤우와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었다.
윤우와 불고기 버거를 먹으며 우린 저녁을 해결했다.
"난 버스로 너네 독서실에 갈게."
윤우가 말했다.
"너는 평소처럼 셔틀버스 타고 와."
아 참. 아까 혜경이한테 오늘 집에 일있다고 했지.
"그게 말야.
그 이상한 애 있잖아. 혜경이라고.
걔하고 원래 같은 셔틀 타고 다니는데 걔가 갑자기 오늘 저녁에 이야기 좀 하자는 거야.
나는 너하고 만나야 해서 집에 일 있다고 둘러댔거든.
그래서 지금 다시 학교가서 셔틀 버스 타기가 좀 그래."
"음. 그렇구나.
네가 혜경이가 누군지 나한테 알려줘야 하는데.
그래야, 내가 몰래 뒤를 밟지."
윤우 말이 맞았다.
윤우는 독서실 앞에서 몰래 대기해 있다가 셔틀 버스 도착하는 걸 보고 내가 혜경이를 짚어주면 쫓아갈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럼 내가 셔틀 버스를 타야겠네."
난 윤우에게 말했다.
혜경이가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던 것도 궁금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나는 윤우에게 내가 다니는 독서실에 가는 버스 노선을 자세히 알려줬다.
윤우는 똑똑한 아이라 잘 알아들었다.
"나만 믿어."
윤우는 윙크를 하고 내 손을 한번 꼭 쥐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밖은 벌써 어둑했다.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이제 조금 있으면 열시였다.
셔틀 버스가 올 시간.
저 멀리 혜경이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왠일이야? 집에 일 있다며."
"응. 가족끼리 시내에서 저녁먹고 노래방 갔다가 오는 길이야."
난 혜경이에게 거짓말을 했다.
"난 또 남친 만나러 간 줄 알았네."
순간 뜨끔했다.
뭐 알고 있는 건가.
아니, 설마.
알리가 없어.
혜경이가 나와 윤우 사이에 대해 알리가 만무해.
"그런데 하려던 말이 뭐야?
지금 해줄 수 있어?"
나는 혜경이에게 물었다.
"지금은 좀 곤란한데.
버스에서 하기가.
너도 알잖아. 내 남친 시온이가 우리 이야기 귀 쫑긋 세우고 듣는 거.
이따 독서실 가서 이야기해줄게."
혜경이가 말했다.
아니. 그럼 계획에 차질이 생기잖아.
나는 윤우에게 급히 문자를 보내고 싶었으나 혜경이가 뭘 눈치챌 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독서실 앞에서 셔틀버스 오기만을 기다릴 윤우를 생각하니 속이 탔다.
기회를 보자. 기회를.
버스가 독서실 앞에 도착했다.
나는 곁눈질로 윤우를 찾았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는 혜경이가 눈치챌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윤우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어디선가 숨어서 나와 혜경이를 보고 있을 거였다.
"뭐 좀 먹을래?"
난 혜경이를 유인할 계획이었다.
밝은 곳으로.
윤우가 혜경이를 확실히 인식할 수 있도록 말이다.
"배고픈데 컵라면이나 먹을까?"
혜경이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성공이닷!
그때 저 멀리 주차된 봉고차 옆에 얼굴만 내밀고 있는 윤우가 보였다.
윤우가 내게 오케이 사인을 보이는 게 멀리서도 느껴졌다.
나와 혜경이는 컵라면을 하나씩 사서 자리에 앉았다.
"너 궁금하지?
나하고 재희가 어떤 사이인지."
갑자기 왜 털어놓으려는 걸까.
그게 더 수상쩍긴 했지만 일단 들어보기나 하자.
나는 혜경이에게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별 관심없다는 무언의 신호를 주고 싶었다.
예상대로 혜경이는 저 혼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무심함이 통했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