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실 우린 베프였어.
어렸을 때부터.
너 알지?
나하고 재희하고 성심원 출신인거.
재희가 아마 이미 너한테 이야기했겠지."
얘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무심한 척 라면을 먹다가 갑자기 젓가락질이 멈춰진 건 바로 그 때였다.
"걔가 먼저 시작한 거야.
이 죽음의 놀이를."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슨 소리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죽음의 놀이? 그게 뭔데?"
그러자 혜경이가 웃으며 말했다.
"모르는 척 하지 마. 너.
다 티나거든."
"죽음의 놀이라고?"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순간 여기가 편의점임을 인식하고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나 전혀 몰라."
"룰은 간단해."
혜경이 평소의 빙글대는 표정으로 말했다.
"차례대로 죽는 거야."
"아니, 왜, 그런 짓을?"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재밌으니까?"
도대체 이 아이의 말은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걸까.
알 수가 없다.
혜경이는 내 알쏭달쏭한 표정을 보고나서 하하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정말 어이가 없는 애야.
"순서를 정해서 죽는 거야.
그리고 재희는 마지막에 죽는 걸로 되어 있어.
룰에 의하면.
너도 도희 봤지?
그 애는 거기서 탈락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거지 뭐 별다른 거 아냐."
혜경이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왜 그런 짓을 계획한 거냐고."
나는 흥분해서 물었다.
"말 조심해. 조심."
혜경이가 내게 주의를 주었다.
조용히 말하자는 거였다.
다행히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고 편의점 알바는 졸고 있었다.
"넌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은지 모를 거야.
그 성심원이란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나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물었다.
"한마디로 지옥이었어."
"한명씩 입양을 갈 때마다 우리는 진심으로 축하파티를 열어주었어.
그리고 그 아이가 첫번째로 죽는 아이가 되기로.
고등학생이 되면.
일종의 앙갚음이랄까.
세상에 대한.
우리를 버린 부모에 대한.
그리고 우리를 학대한 성심원에 대한."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말소리가 커졌나 보다.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갑자기 알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자. 나가."
혜경이는 나를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밖에서는 윤우가 혜경이의 행적을 쫓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나와 혜경이는 일단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시원했다.
하지만 난 방금 들은 내용으로 머리가 혼미할 지경이었다.
"어디로 가자는 거야?"
난 혜경이에게 물었다.
"일단 네 남친불러."
헉.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나는 혜경이한테 한번도 내가 남친이 있다는 걸 이야기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왜 놀랐어?
내가 어떻게 아는지?
내가 그 고아원에서 키운 건 눈치뿐이야.
우리는 엄청 눈치밥먹으면서 컸거든.
딱보면 딱이지.
아마 지금 너 기다리고 있을걸.
아까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애가 네 남친 아니야?
너 내가 이어폰 끼고 소설책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뭐?
책상 앞에서 세상을 본다고?
하하하.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네가 할 소리가 아니라."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이 아이는 어디까지 아는 걸까.
"웃기지 마.
나 남친 같은 거 없거든."
일단 부정하고 봤다.
윤우까지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천사 윤우가 우리 앞에 두둥 하고 등장한 것은.
"나야. 소영이 남자친구.
나 찾았어?
왜?
네가 뭔데?"
"오. 삼삼한데."
혜경이 말했다.
"야. 김소영 너 능력있다야.
이런 애를 나한테 소개시켜주려고 했던 거야?
에이. 그때 만나볼걸 그랬다.
너한테 아깝네."
혜경이가 변죽을 울렸다.
"너 뭔데?"
윤우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오, 뭐 어떻게 하시겠다?
난 정보를 주려고 나온 건데?
너희 둘한테?"
그냥 숨어 있지 왜 나와서 본인을 노출시켰을까.
나는 윤우가 안타까웠다.
그냥 가만히 있지.
하지만 내가 당하고 있는 걸 그냥 보기만 할 윤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윤우는 학교까지 안 나가고 날 돕기 위해 여기로 온 거였으니까.
"얘들아.
재희를 조심해야 해."
편의점 앞 파라솔 의자에 앉으며 혜경이 느긋하게 말했다.
"조심해야 할 사람은 너일걸."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와버렸다.
"재희가 잔뜩 벼르고 있는 사람은 너야.
앙갚음 한다고.
너 때문에 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응. 나 다 알고 있어."
혜경이 태평하게 말했다.
다 알고 있다고?
머리가 띵했다.
"아마 너한테 나 불러내라고까지 이야기했을걸.
왜, 아냐?"
혜경이가 특유의 비웃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지?
"그 애는 나를 제거하려고 할 거야.
내가 그들의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만 그 놀이에서 빠져나왔으니까.
재희, 알고보면 무서운 애야.
그 애가 다 다른 애들 정신 조종해서 죽음으로 이끈 거라고.
그런데 나는 자기 맘대로 안 되니까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지."
뭐야.
지금 내가 뭘 듣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잘 들어.
이번 기회를 역이용해야 돼."
혜경이가 제안을 해왔다.
일단 들어나 보자.
"내가 재희가 말하는 날짜에 나갈게.
너는 그때가 언제인지 나한테 말해줘."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에라 모르겠다.
"이번주 토요일 저녁 일곱시. 해운대."
순간 윤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그럼 이걸로 소영이는 이 일에서 빠지는 거다.
너 더이상 소영이하고 아무 이야기도 하지마.
소영이 더 끌어들이지 말라고."
윤우가 혜경이에게 경고했다.
그때였다.
혜경이가 미친 듯이 웃은 것은.
"우하하하. 우하하하."
뭐야, 쟤 미친 거 아냐?
윤우가 눈짓으로 나에게 이야기했다.
"됐어, 우리는 빠지자."
윤우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와 윤우는 혜경이를 두고 큰길가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혜경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김소영. 네 책상 앞에 육각무늬 그거 누가 붙였을까?"
"야!"
윤우가 사자후를 내질렀다.
처음이었다.
윤우가 그렇게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걸 본 적은.
"너, 털끝 하나라도 소영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
그러면 내 손에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알겠어?"
윤우가 경고장을 날렸다.
"아. 이거 남친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알았어. 알았어.
난 그거 재희 짓이라고 경고해주려고 한 거였는데 왜 이러실까."
혜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자."
윤우는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따듯하고 듬직했다. 아 믿음직스러워. 내 남자친구.
역시 윤우야.
내 남자친구 윤우.
꼭 윤우와 결혼해야지.
난 속으로 다짐했다.
빛이 환한 큰 길가로 나와서야 헉, 하고 숨이 쉬어졌다.
"괜찮아?"
윤우는 내 어깨를 감싸쥐었다.
"응. 괜찮아. 걱정마."
나는 윤우를 안심시켰다.
"저 혜경이라는 애.
진짜 이상하다."
윤우가 이야기했다.
"그치?"
나도 윤우에게 맞장구를 쳤다.
"내 생각도 그래.
도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윤우에게 혜경이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모조리 다 해주었다.
재희에게서 시작된 죽음의 놀이와,
재희가 거기에서 빠져나온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사실은 재희가 싸이코 패쓰 급으로 다른이들을 정신조종해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그런데 그건 무슨 소리야?
네 책상 앞에 육각무늬."
윤우가 물어왔다.
"모르겠어. 나도 깜짝 놀랐어.
내 책상 앞에 육각무늬가 그려져 있는 거야."
"소영아. 너 여기 있으면 안되겠다."
윤우가 발을 멈추고 말했다.
"안 돼.
나 토요일에 동생 발표회에 가기로 엄마하고 약속을 해놔서.
아. 참 그 발표회에 혜경이도 올거야.
혜경이가 알고보니 동생 다니는 복지관에서 계속 자원봉사를 해왔대.
엄마가 알려주더라고.
그래서 그 자원봉사자들하고 같이 발표회를 연대.
토요일 아침에."
"뭐?"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라는 표정으로 윤우가 나를 보았다.
알만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것만 보면 혜경이는 완전 착한 애야.
그렇지 않아?
그리고 혜경이 측 이야기만 들어보면 지금 재희가 이상한 거지 혜경이는 아무 문제 없는 오히려 피해자라고."
난 윤우에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찜찜하지?"
윤우가 대답했다.
그렇다.
찜찜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찜찜함.
나도 모르겠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감정.
바로 찜찜함이었다.
혜경이가 선의의 피해자라고 믿기에
도무지 석연치 않은 그 감정.
윤우가 딱, 말로 정리해 준 것이다.
찜찜함.
어떻게 해야 할까.
휴,
윤우가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지금 밤 열한시인데 너 집에 안 가도 돼?"
나는 윤우에게 물었다.
"지금 집에 갈 때가 아닌 거 같아.
이번주까지는 여기 있어야지."
윤우가 결연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학생이 무슨 외박이야.
그것도 몇박 몇일을.
말도 안 돼.
얼른 밤차 아니면 새벽 기차라도 타고 집으로 가."
나는 윤우에게 말했다.
윤우가 나 때문에 학교를 결석하게 되는 건 싫어.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야.
"나 농담 아니야.
진짜 나 생각한다면 지금 집으로 가.
기차역으로.
그리고 새벽 기차로 집으로 가.
안 그럼.
안 그럼.
나 다시는 너 안 봐.
이거 진짜야.
너하고 헤어질거야."
난 윤우에게 엄포를 놓았다.
그렇다고 물러날 윤우가 아니지.
하지만 왠일인지 순순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알았어.
나 지금 기차역으로 갈게. 그럼 됐지?"
그러면서 마구 뛰어가는 거였다.
"도착하면 연락할게!"
내게 환한 웃음을 던지며.
난 직감했다.
윤우는 기차역으로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윤우는 이번주 토요일까지 이 도시, 부산에 머물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에휴.
나도 모르겠다.
나는 다시 독서실에 돌아왔다.
그리고 내 책상 앞의 육각무늬를 째려보았다.
저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면서.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른들이 왜 담배를 피우는지 알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노답일 때.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을 때 담배가 필요한 것이다.
나에게도 담배가 필요해.
내 담배는 무엇일까.
도대체 나는 마음 기댈 취미 생활 같은 거 하나도 만들지 않고 살아왔던 걸까.
어쩌자고 이 복잡한 문제에 휘말린 것일까.
왜 나에게 혜경이는 그 말을 했을까.
자신이 피해자라고.
죽음의 놀이?
엿먹으라고 그래.
왠지 모르게 혜경이가 자꾸만 의심스러워졌다.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혜경이의 말은 왠지 의심스러워.
하나부터 열까지.
믿음이 안 가.
혜경이가 아무리 자기가 선량한 피해자라고 주장해도
그냥 마음으로 그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평소에 잘했어야지.
어딘지 모르게 미스테리한 그런 느낌.
혜경이는 온 몸으로 그런 느낌을 뿜어내는 그런 아이이다.
그런 아이가 자기가 선량한 피해자라고 이야기를 해봤자 믿어질리가 만무한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할까.
그렇다고 재희를 의심해?
재희에 대한 뒷조사를 해 봐?
어떻게?
아까 체육 시간에 재희가 혜경이를 질투섞인 눈빛으로 쳐다보던 게 생각났다.
아무튼지 둘 다 운동신경 하나는 끝내줬다.
그건 정말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하지만.
하지만.
왠지 믿어지지가 않아.
재희가 이 모든 걸 조작했다는 것이.
재희가 죽음의 놀이를 선도했다는 것이.
그렇다면 누가?
그리고 왜 나를 이 사건에 끌어들인 거지?
왜 나는 여기에 끌려온 거지?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네가 원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네 선택이었어.
그래. 이건 내 선택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마음이 풀렸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뭐다?
다 잊고 공부 하기.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말처럼 나는 공부를 하는 거야.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하지만, 왜.
하지만 왜.
자꾸 스멀스멀 혜경이 책상 쪽으로 눈이 가는 건데.
말할 필요도 없이 혜경이 책상은 비워져 있었다.
시온이 책상도 같이.
둘이 놀러나갔거나 아니면 성심원인가 뭔가 하는 데에 봉사활동을 갔을 것이다.
혜경이 책상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더 뭔가를 찾아낼 필요도 없이.
나는 본능적으로 시온이 책상으로 갔다.
시온이 책상에 뭔가 단서가 될만한 게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너 뭔데?"
앗!
이런 변수가 있을 줄이야.
시온이 책상 옆에는 시온이 친구가 있었지?
왜 바보같이 그걸 잊었을까?
그 아이는 나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그리고 내게 속삭였다.
"너 뭔데 시온이 책상을 뒤져."
그 순간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시온이가 봉사활동 때 필요하다고 자습서 좀 찾아달라고 해서."
오. 거짓말 많이 늘었네. 김소영.
난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물어오지 않았다.
앗싸!
감시망 피했다!
나는 시온이 책상을 뒤지며 뭔가 없는가 보았다.
이런, 시발!
콘돔.
콘돔을 보았다.
책장에 콘돔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뭐, 이거야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이건 무슨 소리지?
도덕책 선악설 부분이 나온 페이지.
-모든 인간은 착하게 태어난 걸까?
무서워-
하는 말이 적혀져 있는 게 아닌가.
무서워?
갑자기 혜경이가 생각났다.
혜경이가 시온이에게 뭐 협박이라도 했나?
왜 시온이가 무섭다고 하는 거지?
나는 본격적으로 도덕책 참고서를 가지고 와 내 책상에서 보기 시작했다.
앞에서 맨 뒷장까지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혹시나 무슨 단서가 나올까 해서.
하지만 아무런 단서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허탕이다.
하지만 무언가 시온이가 무서워하는 게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무언가 혜경이와 관련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늘은 이걸로 만족하자.
난 시온이 자리로 돌아가 얌전히 도덕책 자습서를 넣어놓았다.
오마이갓!
시온이 자리에서 내 자리로 돌아오는 그 짧은 순간,
혜경이가 독서실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마도 혜경이는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눈치챘을 것이다.
내가 시온이 책상에 다녀오는 것을.
하지만 혜경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생각과 달리 혜경이는 혼자였다.
시온이는 옆에 없었다.
나는 아무일 없는 듯 내 자리로 앉아 추리를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그 추리를.
아.
너무 머리를 쓰다보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오마이갓!
눈을 떠 보니 새벽 두 시가 지나가 있었다.
안 돼!
셔틀버스 없이는 나 집에 못 간단 말이야.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아빠는 자고 있을 거고.
어쩌지.
아 모르겠다.
그냥, 여기서 밤샐 수밖에.
아 그런데 이혜경 의리 없네.
아니 애초에 의리를 바란 게 무리지.
그 애한테.
내가 셔틀버스에 안 탔는데도 그냥 혼자 갔단 말이지.
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아.
진짜.
돌아버리겠다.
순간 윤우가 생각났다.
윤우는 지금 어디 있을까.
분명 잘 데가 없어서 헤매고 있을 텐데.
-윤우야,
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나는 윤우에게 메세지를 남겼다.
-나 막차타고 가고 있어. 걱정마.-
윤우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거짓말하지마.
너 잘 데 없지?
여기로 와. 우리 독서실.-
나는 윤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가도 돼?-
윤우에게 답장이 왔다.
에휴.
어디 시내 피씨방에서 떠돌고 있겠구나.
잘하면 여기 독서실에서 재우면 되겠다는 계산이 섰다.
-얼른 와. 자리 만들어 놓을 테니까.-
혜경이 밑에서 토막잠 자면 되지.
독서실에는 밤새 공부하느라 토막잠을 자는 아이들이 몇 있었다.
다행히 독서실 총무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떨고 있는 윤우를 데리고 고개를 숙여 총무실 앞을 통과했다.
웃음이 났다.
그냥 윤우를 보니까 너무 좋았다.
윤우도 그랬나 보다.
나는 혜경이 자리 밑을 가리키며 윤우에게 담요를 내밀었다.
가끔 낮잠을 잘 때 쓰는 담요였다.
"이거 덮고 자.
나는 공부할 게 많아서."
윤우가 나를 올려다 보았다.
"고마워. 소영아."
나는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입에다가 손가락을 갖다대었다.
윤우는 하루종일 피곤했는지,
곧바로 혜경이 자리 밑에 들어갔다.
"악!"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윤우였다.
나도 모르게 윤우에게 내달려갔다.
오마이갓.
이게 다 뭐야.
혜경이 책상 밑에 쓰여진 낙서들.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책상 밑이 모두 빼곡하게 죽어라, 라는 글자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가 죽인다, 로 끝나고 있었다.
나와 윤우는 동시에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독서실 방을 나왔다.
이야기할 곳이 필요했다.
이가 딱딱 부딪혔다.
떨려서.
누구지.
누가 쓴 거지.
재희인가.
아니면 혜경이인가.
아니면 제3자인가.
머리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윤우와 이야기를 할 안전한 곳이 없었다.
휴게실에 있다가는 총무에게 발각될 염려가 있었고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는 것도 위험했다.
화장실.
여자 화장실.
그래.
여자화장실로 가자.
나와 윤우는 몰래 여자 화장실 칸으로 숨어들어갔다.
비좁은 곳에 둘이 있으려니
오마이갓!
가슴이 왜 이렇게 떨려오는 거지.
좀전의 낙서가 무서워서 가슴이 떨리는 건지
아니면 윤우와 같이 있어서 떨리는 건지.
아무래도 윤우와 같이 있어서 떨리는 것 같았다.
"무서워. 윤우야."
오마이갓.
윤우는 나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걱정마. 내가 있잖아. 소영아. 어떻게든 지켜줄게."
오마이갓.
윤우가 내게 키스를 해오는 게 아닌가.
부드럽고 달콤했다.
이것은 딥키스.
내 입 안에까지 들어오는 윤우의 혀.
그래. 다시
아랫도리가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래서 섹스로 이어지는 거구나.
생각할 틈 없이
윤우의 그것은 내 교복 치마 속으로 들어왔다.
이런 느낌이구나.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팠다.
많이.
윤우는 나에게 키스를 많이 해주면서 진정시켜 주었다.
그러면서 살살 내 안에 들어왔다.
그러자 조금 아픔이 덜해졌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들어왔다고 느껴진 그 때,
전율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여기는 여자화장실이니까.
누군가가 여자화장실로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조용히 하려고 애썼다. 애써서.
하지만 내가 변기 위에 앉아 있고 그 위에 윤우가 앉아 있고
그 상황은 몹시도 불편하고 좋으면서도 스릴넘쳤다.
오마이갓!
그리고 그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내가 예전에 여자화장실에 들어왔을 때,
혜경이가 시온이와 함께 화장실을 나가던 모습을 본 게.
그 애들과 나도 이제 별반 다를 바가 없구나.
지금 밖에 있는 아이는 이미 다 상황을 파악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내 안에 윤우가 들어오다니.
나의 첫 경험.
생각과는 달랐지만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 아팠지만
뭔가 어른이 된 그런 느낌이었다.
어른이 되어버린 느낌.
이렇게 우리는 하나가 되어버렸구나.
윤우는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아마 밖의 아이는 옷자락이 사각거리며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서도 화장실 칸 안의 상황을 모두 파악했을 것이다.
나도 그랬었으니까.
우리는 그 아이가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제발 얼른 나가줘.
다행히 그 아이가 화장실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후다닥.
아이는 볼일을 보자마자 급히 화장실을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왠지 그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내게 일어난 일은 더욱 중요하고 긴요하고 그러면서도 환상적인 그런 일이었다.
윤우와 첫 경험을 가지다니.
"사랑해. 알지?"
윤우가 내 귀에 속삭였다.
그러면서 내게 부드럽게 키스해주었다.
환상적이었다.
이제 나가야 할 때.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그도그럴 것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동안 윤우의 체중을 받아내고 있었으니.
이제 어떻게 하지.
"나가봐야 될 거 같애."
윤우가 나직히 말했다.
"아니야. 총무실 통과해야 되는데. 지금쯤 총무가 깨어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다 끝나."
아. 옥상. 독서실 옥상이 있었지.
"옥상으로 가자."
나는 윤우에게 조용히 말했다.
"응. 나는 너 따라갈게. 앞장서."
우리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게 복도를 지나쳐 옥상으로 갔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잠겨있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문은 열려 있었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누구에게라도 절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옥상에 섰다.
이년 동안 독서실에 다니면서 한번도 와보지 않았던 옥상을 윤우와 처음 와본 곳이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아이들이 다녀간 듯,
바닥은 담뱃꽁초로 가득했다.
여기서 담배피고 그러는구나,
지금에야 알게된 나는 뭐지.
정말 범생이로 살아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제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가 스쳐갔다.
나는 지금 집에 있어야 할 때이다.
셔틀버스를 타고.
하지만 지금 나는 독서실에 와 있다.
엄마에게서는 다행히 연락이 오지 않고 있다.
엄마는 동생을 돌보랴, 할머니와 싸우랴, 힘에 부쳐서 곤히 잠이 들었는가 보다.
그래서 내가 집에 오지 않은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오늘 새벽 첫차로 집에 가야 하나.
그 전에 엄마가 내가 안 온 걸 알게 되면 난리날 텐데.
그러면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그렇게 됐다고 이야기해야지.
그래서 샤워도 하고 속옷도 갈아입고.
이 빨간 피도 지워야 하고.
빨간 피.
윤우와 관계를 가지다가 나온 피.
처음 성관계를 하다가 나온다는 그 피.
내 속옷에는 그 피가 묻어 있다.
갑자기 아까 일이 생각난다.
화장실에서 급박하게 이루어진 첫경험이.
아, 지금 그 생각할 때가 아니지.
뭐야. 이것은.
살그머니 내 손을 잡아오는 윤우.
"괜찮을 거야. 다."
뭐가 괜찮을 거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우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 다 괜찮을 거야.
우리는 다시 깊은 입맞춤을 한다.
"나는 첫 차로 집에 갈게.
한 세시간 후면 버스 탈 수 있을 거야.
난 윤우에게 말했다.
"응. 나도 같이 가.
데려다 줄게."
윤우는 내 손을 더 깊이 잡으며 말했다.
듬직했다.
윤우와 함께라는 것이.
무슨 일이든지 윤우와 함께라면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제,
좀 쉬자. 여기서."
윤우가 말했다.
옥상 모퉁이로 가 나와 윤우는 바닥에 앉았다.
윤우는 나를 포근히 안아주었다.
나는 윤우의 팔 안에서 눈을 감았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갑자기 잠이 몰려왔다.
오마이갓!
갑자기 전화기 울리는 소리가 났다.
내 전화기였다.
엄마였다.
"너 어디야?"
"나 독서실."
나는 태연하게 말하려 했다.
"공부하다가 독서실 셔틀버스를 놓쳤어."
평소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엄마가 화를 냈다.
"지금 몇시인지 알아?"
몇시긴.
아까 윤우하고 옥상에 올 때쯤 새벽 세시쯤이었으니까
얼마 안 지났겠지,
하며 나는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오마이갓!
이게 무슨 일!
여섯시 반?
"어떻하려고 그래?
집에 왔다가면 늦으니까
거기서 곧장 학교로 가."
오히려 다행인가, 싶었다.
다만 속옷을 갈아입어야 했고 씻지 않은 게 좀 마음에 걸렸지만.
편의점에서 해결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학교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약 한시간 반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학교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했다.
다행히 나는 어떤 버스를 타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토요일에는 독서실 셔틀 버스가 운행하지 않아 학교에서 독서실로 버스를 타고 오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휴.
얼른 준비를 하고 학교에 가자.
나는 잠들어 있는 윤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왕자님 같았다.
윤우 왕자님.
아침 햇살이 윤우 얼굴에 비추어 윤우의 얼굴이 부드럽게 빛이 났다.
이게 광채인가, 싶었다.
"윤우야."
난 살그머니 윤우를 깨웠다.
"응. 응."
윤우는 잠에서 깨어 나를 쳐다보았다.
"학교로 직접 가야 돼.
집에 갔다가 학교에 가기에는 시간이 없어.
얼른 준비해야 돼."
"그래, 그래."
나는 윤우의 손을 잡아 끌었다.
"나가자. 내가 먼저 1층 총무실 통과하고 전화걸게.
그럼 내려와."
총무는 무섭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덩치도 어마어마했다.
아마 외부 학생이 여기에 들어온 걸 알게 되면 무시무시한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었다.
조심, 또 조심.
나는 가방을 챙겨 총무실로 살금살금 내려갔다.
다행히 총무실은 비어 있었다.
"얼른 내려와!"
나는 윤우에게 전화를 걸어 황급히 말했다.
그리고 쏜살같이 일층 정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윤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우가 나왔다.
성공이다!
어찌되었건, 성공이다.
나와 윤우는 거리를 두고 걸었다.
큰 도로가 나올 때까지.
"혹시 총무 마주쳤어?"
큰 도로변에서
나는 윤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윤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보고 어디 학생이냐고 묻던데?"
"그래서?"
"다닐 독서실 구하고 있는 중이라고 그랬어.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다고.
그랬더니 알았다고 하면서 안내해주던데?"
휴.
다행이다.
어찌되었건 잘 넘어갔구나.
벌써 화요일.
토요일까지는 오늘까지 5일이 남아 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까.
"너는 집에 안 가려구?"
"말했잖아. 내가 너만 두고 어떻게 가."
윤우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마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어쨋건 지금은 학교에 갈 버스를 타야 할 시간이었다.
나와 윤우는 버스에 올랐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학교까지는 약 사십분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버스 맨 뒷자리로 갔다.
윤우는 피곤했는지 머리를 대자마자 내 손을 잡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혜경이와 재희는 어떤 관계인걸까,
그 질문이 다시금 머리속을 시끄럽게 했다.
혜경이는 말했다.
자신이 협박받고 있는 거라고.
그리고 재희가 이 모든 죽음의 배후에 있는 거라고.
자신이 아니라.
재희는 자신의 그 모든 짓을 알고 있는 자신을 제거하려고 나를 이용하는 거라고.
그래, 너도 봤잖아.
혜경이 책상 밑의 어지러운 낙서, 죽인다, 로 끝나는.
다가올 토요일이 두려웠다.
이미 혜경이는 알고 있다.
토요일 만남에 대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