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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Aug 19. 2023

생각

8월 초부터 다른 어학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본질은 글쟁이, 혹은 예술가, 혹은 미친 감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속이고 일할 때는 철저히 일만 하자고 다짐하면서 시작했다. 나는 무서운 선생님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까불지 마.


이 미친 영어 사교육의 바다에 다시 풍덩 빠진 것이다. 그것도 내 자의로.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꼬박꼬박 대출 이자도 갚아야 하고, 냥이들 장난감도 사줘야 하고, 식료품 비라도 벌어야 하니까. 이 미친 영어의 바다에. 미쳤지. 미친 짓이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미친 짓에 동참한 것이다. 오 지저스. 


아이들이 영작하는 것을 봐주고 고쳐주고 달래가며 때로는 협박에 소리쳐가면서 하는 일이다. 미안해, 얘들아. 


하지만 벌써 회의감이 든다. 슬럼프인가. 


예를 들어 '나는 사과를 좋아한다' 라는 문장이 나왔다고 하자. 영어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I like apples. 가 답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I like an apple. 이 아니라. 왜냐하면 나는 사과 전체를 좋아하는 것이니까. 사과 하나가 아니라.  


하지만 정답지에는 I like an apple. 이라고 나와 있다. 


응? 내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했다. 아마도 출제자의 의도란 아이들이 a, an을 제대로 쓸 수 있게 하자는 것이겠지. 그래도 그렇지. 


정말 이게 맞는지 따지고 싶어서 교재 홈페이지에도 가입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교재를 편찬했는지, 그리고 이 대형 어학원은 이 교재를 왜 채택했는지 의문이다. 


기계적. 


사실 어느정도 각오한 부분이다. 기계적인 강사가 되자. 어차피 아이들은 한국식 문법에 길들여질 것이니 나는 그 길을 닦아주는 역할을 하자, 하고 시작한 일이다. 


하지만 다섯 시간 동안 그 일을 하는 것은 몹시 피곤하다. a, an을 잡아주고 삼인칭 단수 주어의 동사 변화를 나불나불 대고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지친 표정을 보는 게 힘들다. 오십 대 오십이다. 정말 눈을 반짝거리면서 이노무 되도 않는 영작 수업에 참여하는 아이들도 많다. 


하지만 트러블 메이커 아이들은 역시 어딜가나 역시다. 떠들고 하기 싫다고 떼쓰고 주위 아이들 방해하고. 당연히 단어 시험도 준비해 오지 않는다. 숙제도 해오지 않는다. 


도대체 왜 나는 이 길에 들어선 걸까, 하는 본질적인 질문에 마주치게 된다. 


정말 영어를 가르치는 게 이게 맞는 걸까. 

이렇게 심하게 재미 없어도 되는 걸까. 


다시 한 번 잡코리아를 기웃거린다. 

나는. 

나는. 


여기서 오래 있지 못할 것 같다. 


정말이지 

아무데도 속하고 싶지 않다. 


재미있게 영어를 가르치고 싶다. 

살아 있는 영어를 가르치고 싶다. 


그리고 이놈의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은 제발이지 갖다 버리자. 

아이들의 영혼이 죽어나가고 있다.


어른의 한 명으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사교육 현장에 있어도 되는 걸까. 

이렇게 영어 교육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하지만 정말이지 다른 할 일을 못 찾겠다.

이 일을 십년 이상 해왔다는 건 훈장질이 나에게 그나마 맞는다는 거다. 

내가 가진 지식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그나마 시간당 페이가 높은 일. 

무엇보다 그나마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 삶.


이러한 이유로 강사 일을 십년 넘게 해왔다. 

하지만 늘 질문이 나를 따라다닌다. 


이렇게 영어 가르치는 게 맞는 거니. 


지루해 죽겠다는 아이들의 하품하는 모습, 

일분마다 시계를 확인하는 모습,

떠드는 모습. 


그러한 모습을 무시하고 

떠드는 아이를 소리 지르거나 포인트를 차감함으로서 제압하는 나. 


사실 나도 피곤하다. 

정말이지 피곤하다. 


이 자리를 떠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자리를 떠나도 

나는 또 다른 학원에서 결이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회의감을 

느끼고 있겠지. 


직업을 옮긴다는 건 

생각조차 못하겠다. 


어째야 하나.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보자. 

영어 사교육의 개혁을 일으키는 사람이. 


내가 보기에 어리석은 그런 영어 구닥다리 한국식 문법을 

타파하는 그런 역할을 해보자. 


영어 교육에서 십년이나 일한 고인 물인 나.

모순들을 잘 알고 있잖아. 


일단 그놈의 교재 홈페이지에다가 항의를 해봐야겠다. 

나는 사과를 좋아한다가

왜 I like an apple 이냐고.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배치되는 걸 가르칠 수는 없으니까. 


물질명사라는 개념도 우습다.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것을 물질 명사라고 하는데 

대표적으로 bread, meat, cheese 가 있다. 그리고 셀 수 없다라고 표현한다. 


이것들은 a, an을 쓰지 않고 단수 취급한다. 


어떤 아이가 물었다. 


가방도 모양이 천차 만별인데 그럼 이것도 셀 수 없는 명사냐고.  

음......


할 말이 없었다. 

이것은 내 역량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다. 


영어 강사로서의 역량을 키우기에 나는 사실 영어 교육에 별 뜻이 없다.

뭐야, 이 도돌이표는. 


생계수단으로서의 강사일을 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모순이 너무 많다.

이 영어 교육에. 


제발이지 

나 말고 누군가 각성한 사람이 이 일을 맡아주었으면. 

그런 일은 없겠지. 

내가 해야 하겠지. 


고민만 하고 

불만만 늘어놓지 말고 

행동을 하자. 


뭐야.


이 긍정적인 결론은. 


나 꽤 긍정적인 인간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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