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혔던, 가스라이팅의 기억

한번은 필요한 용기

지금은 완전히 회복된 것 같아서

꺼내보기 싫었던 그 고단했던 기억을 이 공간을 통해 한번 풀어보려고 한다.


난 모범생으로 컸다.

누구를 위한 모범생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답답하기도 한.

칭찬받거나 인정받기 위해 나 자신쯤은 갉아먹어도 괜찮았던

몸만 컸지 여전히 어린 사람이었다.


지금도 취업이 힘들지만

내가 취업시장에 던져졌을 때도 쉽지 않았었다.

수습, 일종의 계약직이었던 나는

인정받아 정규직으로 가느냐, 다시 쫓겨나느냐 그 기로에 있었다.

그래서 참 절박했다.


하필, 내가 처음 있던 부서는 좋았다.

적성에도 잘 맞았고, 내 전공도 필요한 곳이었다.


나보다 먼저 수습의 단계를 밟아가던 두 명의 계약직 신분 직원이 더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세 명 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정규직이 되었다.


조직에는 계약직의 절박함을 이용하려는 하이에나 같은 사람들이 꼭 있다.

정규직이 안된 그 한 명이 하이에나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쯤,

내가 들어간 것 같다.


지금부터 가스라이팅을 한 사람을 하이에나라고 표현해보겠다.

그 사람은 사실 조직 내에서 하이에나이기는커녕, 지나가는 쥐새끼보다 존재감이 없었는데

그 당시엔 참 커 보였다.


그 하이에나는 그 계약직을 지독히도 괴롭혔다.

회의만 두세 시간을 하더니, 자료조사를 지시하고 자리로 돌려보낸 후 10분도 안돼 자리로 쫓아와서는

찾아보았냐고 쪼아대었다. 퇴근하려는 걸 붙잡고 자리에 억지로 앉혀 일을 시키기도 했다.

더 어이없는 건, 그 하이에나가 우리 부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 광경을 몇 달 며칠 지켜보다가, 우리 팀 정신적 지주와 같은 분이 부서장에게 말씀드렸다.

그분을 그 하이에나와의 협업에서 빼주는 게 좋겠다고.


그 하이에나는 자기의 허락 없이 팀원이 바뀌는 것에 자존심 상해하더니,

일도 못하고 능력도 없는 직원이었다면서 모두들 앞에서 그를 욕보였다.

그러고는 스탠스를 바꾸어 마침 잘 되었다며,

능력 없는 직원과 일하느라 자신이 고달팠다고 자존심을 챙기더니

협업할 사람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그 하이에나와 일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먹잇감으로 던져졌다.


하필, 그 하이에나는 나를 참 좋아했다.

그리고 모범생의 특성을 잘 이용했다.

그때의 나는 칭찬과 인정을 받으면서 일하니 고단하지만,

부당하거나 잘 못 된 줄을 몰랐던 것 같다.

짧게만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협업하는 프로젝트만 끝나면 난 내가 당연히

원래의 부서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난 그 하이에나가 있는 부서로 옮겨져 정규직이 되었다.

그리고 하이에나는 내가 정규직이 된 것에 대하여, 자신에게 고마움을 갖길 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 입장에서도 그 하이에나를 버리기보단 나를 그 속으로 던지는 게 맞다는 판단을 했을지도.


그렇게 4년을 버티고 있었다.

그 하이에나는 나를 참 좋아했다. 그리고 집착했다. 정말 모두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

회사에 출근하면 그 새끼와 3시간은 회의를 해야 했다.

회의하고 자리에 오면 5분 만에 또 나를 찾아온다.

아까 다 못한 얘기가 있다고.

일하는데 뭔 얘기가 그렇게 필요할까.


그 하이에나가 나를 너무 좋아해서일까

아니면 정말로 내가 고마움을 느껴서였을까

하이에나의 기대를 왜 그렇게 만족시켜주고 싶었던 걸까 나는.

어느새 나는, 하이에나가 찾을 때마다 달려가야 하는 강아지가 되어버렸다.


타 부서와 협업을 많이 해야 하는 곳이라

다른 부서 사람들과도 같이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없어도 되는 회의에도 나는 그 새끼 분신처럼 같이 가야 했다.

그 하이에나를 불편해하는 타 부서 사람들에게도

나라는 융화제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좋은 자리만 함께했다면 그렇게 힘들었을까?


그 하이에나는 갑자기 전화해서 나를 부르더니,

내 앞에서 타 부서 사람들에게 일을 이따위로 한다고 화내고 혼냈다.

마치 나에게 겁주려는 건지

그 사람에게 네가 얘보다 못하다고 자존심 상하게 하고 싶은 건지.


근데 참 아이러니했던 건

그 하이에나에게 그렇게 혼나고 떠나는 사람들이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나는 이걸로 저 새끼와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는데

너는 어떡하냐는 위로..


그 하이에나는 여자를 정말로 좋아했다.

아니지 지금도 좋아한다.

젊고 어리고 특히 계약직에서 정규직을 앞둔 절박하고 열정적인 사회초년생.

하지만 지극히도 남자를 싫어했다.


하이에나에게 새로운 팀을 꾸릴 기회가 주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조직이 미친 거지.

아주 신이 나서는 누구를 자기 팀으로 데려올까

여기저기 물색하고 인터뷰했다.

젊고 어린 여자애들만 골라서.

인터뷰라고 해놓고 사람을 불러서는 2시간 3시간씩 잡아두었다.


그 하이에나가 젊은 여직원들과 한 창 인터뷰한다고 신났을 때

나는 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나와 잘 지내고 있다는 이미지가 조직에서 퍼졌던 때문일까?

원래는 엄청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아닐 수도 있나 보다는 긍정적? 인 이미지가 그 하이에나에게 씌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고 어린 여자애들만 찾아서 인터뷰를 하고 있으니

다른 부서 사람들이 곱게 볼 수 없었다.

결국 그 쥐새끼는 조직에서 더 강한 호랑이의 눈에 거슬린 거다.

마침 나와 비교하면 고작 몇 시간? 에 불과한 시달림을 겪은 용기 있는 직원이 호랑이에게,

쥐새끼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신고했다.


나는 왜 용기 내지 못한 걸까.

나도 그동안 당해온 그 성추행.

나도 신고하고 벗어났어야 하는데, 왜 스스로를 좀먹고 있었을까.


내가 가스라이팅에 당하고 있구나.

내가 이렇게 힘든 건 그 하이에나 때문이구나.

난 저 사람에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었구나.

저 사람은 지독히도 내게 감사하길 강요했구나.


그걸 깨닫고도 도망갈 방법을 찾지 못했었다.


전화벨 소리만 울리면 심장이 뛰었다.

일하다 뒤돌아 보면, 하이에나는 내 자리에 몰래 와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마다 기겁하고 소리 질러도 그 하이에나는 그걸 즐겼다.

나는 그렇게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하이에나는 자신의 성추행 신고가 들어온 걸 미리 듣고는,

나에게 더 집착하기 시작했다.

나를 통해서 자신이 젊은 여자 직원에게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출근도 전인데 전화가 온다.

회사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같이 사무실까지 가자는 거다.

출근하면 나를 데리고 사무실 안 팍으로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닌다.

자기는 성추행과 무관하다는 걸 대외적으로 보이고 싶은 거다.

나도 할 일이 있는데, 내 옆에서 떠나질 않았다.


조여 오는 그 새끼 집착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내 얼굴은 점점 잿빛이 되어가고

매일 술냄새를 풍겼다.

갇힌 정신을 놓고 싶어서 그렇게나 술을 찾았다.

너무나 심해진 그 새끼의 집착 때문에

정말 알콜중독까지 갈 뻔했다.


그 새끼의 성추행으로 인사위가 열리는 걸 기회로

내가 힘들어하는 걸 보던 주변 동료들이 나에게 숟가락을 얹으라 도와주었다.

그 쥐새끼를 벼르던 호랑이가 나에게 동아줄이 되었다.


호랑이의 힘을 입어, 동료들은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도망가는 대신

그 새끼에게 기꺼이 불이익을 주라고.

그 새끼에게도 고통을 주라고 다독여주었다.


노무사와 상담 후 증거를 수집했다.

그리고 인사팀에 한 통의 메일을 보냈다.

첨부자료를 끼워서.

고작 메일 한 통일 뿐이었는데,

인사팀에선 바로 연락이 왔다.

인사팀 직원과 점심을 먹으며,

그동안 시달려온 것들을 토로했고

호랑이보다 더 높은 직급의 본부장님께도 내 얘기가 전달되었다.


인사팀장, 본부장님과 연달아 면담을 하게 되었고

내가 너무나 잘 지내고 있어서 한 번도 걱정을 한 적이 없으셨다고

신경 써주지 못 한 점에 오히려 사과를 보내셨다.

그 얘기를 들으니 아뿔싸. 그 하이에나는 이미 이런 히스토리가 많았던 새끼였던 거다.

조직은 왜 그 새끼를 안 버리는 걸까.

지금도 그 점이 참 어이가 없다.


본부장님은 그 하이에나가 꾸리려던 팀을 모두 남자 직원들로 채우셨다.

남자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지는 그 쥐새끼.

그 팀은 결국 팀장을 해야 할 그 쥐새끼의 능력 부재로 다른 팀장을 데려오고 그 쥐새끼를 좌천시켜버렸다.


내가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날 수 있던 건

처음엔 그 새끼로부터 도망갈 수 있어서 가능했다.

그래도 부작용? 은 남아있었다.

한 동안은 대인기피증에 걸려서 9층이나 되는 내 자리까지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했고,

그 하이에나와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쩔 수 없이 마주치는 경우엔 돌이 된 듯 굳어버렸다.


이러던 내가 정말로 가스라이팅을 극복했구나 느낀 건.

회사 사람들과 함께 그 사람 모친상에 찾아가 꽃을 올리고,

맞절을 드리고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나온 후였다.

오히려 장례식장에 찾아온 나를 보고 돌이 된 그 하이에나를 보니

너나 나나 지난날 고생했다 싶으며 위로하는 마음이 생겨나더라.


그런 일들을 겪고 보니 이제 그 누구도 나를 건드릴 수 없도록 나를 먼저 지키게 된 것 같다.


그 이후 옮겨진 부서는, 내가 좋아했던 처음 들어간 곳이 아니라 더 힘들다고 악명 높은 곳이었다.

조직이 그 하이에나에게 불이익을 주었듯, 나에게도 불이익이 주어진 거다.

그 부서도 상사 때문에 힘들어 한 직원이 많았다.

대신 그 상사는 업무능력만큼은 탁월했다.

거기도 부당한 요구는 많았다. 점심시간 없이 일을 하게 하거나 야근을 밥 먹듯 하거나.


회의를 중단할 수 없다는 핑계로 점심시간에 잡아두는 데,

차라리 야근을 하면 하지 지금은 약속 있어서 나가봐야 한다고 당당히 말하고

아주 맛있게 점심을 먹고 왔다.

점심 먹고 양치할 시간도 없이 다시 회의를 하면 곱지 않은 상사의 눈치가 있어도 참 뻔뻔하게 커피를 홀짝이며 앉아서 회의를 마쳤다.

실제로 야근을 해서 일을 해놓으면 그만인 것을.


그 상사는 나를 길들이고자 사람들 앞에서 혼을 내거나 자존심을 긁기도 했고, 감당 못할 업무량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면 뭐해?

화장실 들러서 세수하고 다시 찾아가 죄송했다는 사과를 모두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하는 내가 되어버린 거다.


고개를 숙이고 무릎 꿇는 건 얼마든지 오케이,

다시는 누군가에게 길들여지지 않겠다.


업무 능력이 탁월했던 상사는, 그래도 내가 일을 못지않게 하는 걸 보고는 더 이상 내 점심시간을 건드리지 않았다.


이런 나를 보고, 어리고 마음 여린 직원들이 가끔 찾아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부당하다고 싫다고 거절해도 되는데,

그러면 불이익을 받을 것 같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커 보였다.

가끔은 그들이 힘들어하는 상사가,

나와는 대화로 원만히 문제를 해결해온 사람인 경우도 있었다.


갈등이 두렵고, 이미 정신적으로 지배를 당했으니 감히 용기를 낼 수 없구나..

그 누구도 너를 다치게 두지 말아라.


아마도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이 글을 보면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암담함을 느낄 것 같다.


어렵겠지만, 한 번은 욕을 먹어야 한다.


내가 있던 곳은 생기 넘치는 조직이 아니라

나와 같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상사와 부하직원 간의 갈등, 직원끼리의 갈등, 일대 다 따돌림, 파벌 싸움 등

그 유형도 참 다양했다.

어떤 직원은 모든 괴롭힘의 순간을 녹음해서 인사팀에 보내기도 했고

다른 직원은 정신과 진단서를 모아서 노무사와 상담 후 대안을 마련한 경우도 있었다.


포기하는 게 가장 쉬운 거 너무 잘 안다.

그렇지만, 용기를 갖길 바란다.

아주 힘들겠지만,

최소한 노무사를 찾아가 보는 정도의 용기가 꼭 필요하다.

(회사 내의 일이라면)


지금 너무나 두려운 그 대상이

당신이 한 번 이빨을 보여주면, 단숨에 깨갱 할 수도 있다.

아니라면, 그땐 증거를 모아서 소송을 통해 칼날을 겨누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