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주도권이 없어지고 생긴 변화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경제적 주도권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수능 시험이 끝난 다음 날부터 아르바이트, 과외로 학비 마련뿐만 아니라 내 용돈, 가끔 쥐여주는 동생 용돈까지 스스로 벌고 쓰며 살았다.
취직 전 후 모두, 누구에게도 나의 경제적 주도권을 넘기지 않고 오롯이 혼자 투자하고 가끔은 실패의 쓴 맛을 보기도 하면서 내 통장이 주는 뿌듯함을 느끼며 살았다.
긴 연애 끝 결혼을 결정하면서도, 각자의 경제활동을 존중하자며 남편과 나의 통장은 합쳐지지 않았었다.
경제적 주도권을 가질 수 있던 이유는 나의 경제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2년 정도의 짧은 사회생활을 끝으로 전업맘이 된 내 친구는 가정의 내무부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다. 소소하게 아끼고 핫딜을 사는 재미, 남편에게 용돈을 무기로 주도권을 잡는 재미, 소심하고 보수적인 투자로 적금 이율 정도 수익을 내지만 재테크를 하고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주도권을 잡고 살고 있다.
반면 나는, 이 나라 통장 하나 개설하지 못하고 남편이 주는 생활비 카드를 내 용돈 겸 생활비 겸 쓰고 산다.
더 이상 월급이 들어오지 않는 한국의 내 계좌는 지난 여 달의 카드값 해외 결제를 끝으로, 가끔 들어오는 시댁, 친정 부모님의 용돈을 받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남편이 완전한 경제적 주도권을 갖고 있지만 맞다, 한 번도 나에게 생활비나 용돈으로 눈치를 준 적은 없다.
그래서 취미생활도 하고 쇼핑도 즐기면서 좀 더 뻔뻔해도 되는 데, 나는 이상하게도 눈치가 보인다.
역시, 내 자존감은 내 통장에서 나오는 것이었구나...
경제적 주도권이 없어지자 가장 크게 현타가 온 것은 애석하게도 커피였다.
매일 출근하면서 최소한 스타벅스 커피라도 마셔야 정신을 차리던 습관이
출근도 하지 않는 전업주부인데도 고쳐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 다닐 때는 커피를 정신 차리려고 마셨으니까, 맛과 향도 즐기지 않을 바에야 싸구려 진한 커피로도 충분했을 텐데, 그 당시엔 참... 맛없는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는 걸 용서할 수가 없었다.
전업주부인 지금은 그냥 충분히 자고, 원할 때 일어나도 넘치는 시간인데,
카페인으로 정신을 억지로 깨우지 않아도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 한잔이 필요하다.
십여 년의 직장생활이...
커피를 마셔야 화장실도 가고 눈도 트이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나를 셋팅시켰기 때문이다.
집 앞에 스타벅스가 있지만, 조금만 더 가면 정말 맛있는 커피집들이 많지만
이젠 매일매일 커피의 향과 맛을 즐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되지만
사무실에 넘쳐나도 한 번을 입에 대지 않았던 인스턴트커피를 타 마신다.
왜 그러냐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지 않냐고?
시차적응이 어느 정도 된 해외생활 초반, 여유롭게 커피 한잔 하고자 집 앞 카페에 나선 적이 있다.
카페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만 해도, 그래 매일 아침 이곳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시작하자라고 꿈을 꾸었다.
3개월 배운 떨리는 외국어로 주문을 마치고 커피 한잔을 받아 들어 창가 쪽 자리를 잡았다.
여유롭게 핸드폰을 보면서 생각보다 맛있는 커피에 감동했던 그 시간.
남은 커피를 모두 마시고 이제 뭘 해야 하지...
다시 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집이 감옥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나오질 말걸...
집에는 가기 싫으니 남편이랑 몇 번 가본 마트로 향했다.
살 것도 없는데 시간도 때우고 구경도 하고자 마트 구석구석을 탐방하다가
이게 뭐야... 현타가 왔을 때쯤, 인스턴트커피 코너를 지나고 있었다.
방금 전 마신 커피 세 잔정도의 가격이네...
카페에서 맛없는 디저트도 시켰다가 남기고 왔는데,
오늘 카페에서 쓴 돈이랑 내일 쓸 돈이랑 합친 것 정도구나..
그래, 이거 하나 사면 한 달은 넘게 마실 수 있겠다.
그렇게 인스턴트커피 하나를 사들고 집에 들어왔다.
카페도 가고 마트도 돌고 왔는데 애석하게도 시간이 참 많이 남아있었다.
가만히 식탁에 앉아 창 밖을 보다가, 난데없이 식탁에 놓인 인스턴트커피가 생활비를 아끼는 참된 전업주부가 된 것 같은 뿌듯함을 주었다.
전업주부가 되니, 생활비를 아낄 때 보람이 가장 크다는 내 친구 이야기가 생각났다.
인스턴트커피 너는,
오늘 내가 카페에서 쓴 돈을 최소 20일 이상 아끼는 효과가 있구나!
경제적 주도권이 있을 땐 굳이 천 원 이천 원 아끼려고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내가 아낄 수 있는 걸 아끼지 못하면 이상한 죄책감이 든다.
반면에 잘 아낀다고 생각이 들면 나도 우리집 재정에 보탬이 되고 있다는 뿌듯함이 생긴다.
이전엔 돈을 벌면서 비어있는 통장을 채우는 데 보람이 있었다면
지금은 돈을 아끼면서 통장을 지키는 데 집착하는 기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이 없는 전업주부, 말이 좋지 솔직히 그냥 백수인 나는
소비를 줄여 비생산적인 하루하루를 지켜내는 게 어쩌면 최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