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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없는 전업주부 Aug 04. 2022

전업주부지만 전 밥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제라도 깨달아야 하는 것


아무래도 우리 부모님 세대에선

밥을 차리는 일은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가 아빠보다 돈을 더 잘 벌어도

아빠는 엄마에게 맡겨놓은 듯 밥을 달라 그랬고

집에 먹을 것이 없다고 화를 내는 것도

아빠의 몫이었다.


어릴때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어느 정도 머리가 컸을 땐

밥 차리는 걸로 아빠와 싸운 적이 있다.


엄마가 진급시험을 준비하느라 공부 중일때

티비를 보던 아빠가 공부 중인 엄마를 방해하며

배고픈데 밥먹자라고 얘기하는 걸 봤다.


그 순간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해보였다


배고프면 아빠가 차려먹지

공부 중인 엄마한테 차리라고 하냐?


중학생 된 딸의 날카로운 지적에

아빠는 자존심이 건드려졌나보다.

그 길로 화를 쒸익쒸익 내면서 집을 나갔다.


엄마는 괜히 왜 그랬냐고 나를 타박했다


아빠가 반성했을 꺼라고 기대했는데...

오히려 엄마한테

엄마가 공부하느라 정신빠져서

딸한테 자기가 이런 소리 듣게한다고 화를 냈다.

아빠도 웃기지.

차마 딸한텐 언성 못 높이고 만만한 엄마 찾아가서 언성 높이더라.


사춘기 중학생 딸을 어떤 아빠가 이길 수 있을까.

나도 지지않았다.


난 아빠가 반성할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나한테 말시키지마! 하고 삐져버렸다.


그 사건 이후 아빠랑 나랑 서로 계속 피해다녔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은 아빠 말고는 사실 다들 알아서 먹었다.

나는 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학원 끝나고 오는 길에 토스트를 사먹거나

김밥 정도로 해결했다.

남동생은 워낙 이것저것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엄마가 없어도 혼자 뚝딱뚝딱 잘 차려먹었다.

아빠가 문제.

밖에서 사먹는 밥은 싫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제대로 할 줄 아는 음식도 없고

기껏해야 라면밖에 못 끓이는....


나와 동생이 성장하면서

아빠도 자존심이 많이 상했는지

밥 문제를 우리 앞에선 드러내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엄마가 밥을 안차려주었냐?

아니다,

주말에는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셨고

평일에는 아침도 꼭 차려주셨으며

퇴근길에 추어탕이나 김치찌개를 사와서라도

아빠를 위한 저녁은 꼭 차려두셨다.

(엄마가 밥을 차려도 나랑 동생은 잘 안먹었다)


그래도 아빠는 불만이 많았나보다.

다른 집이랑 비교하면 끝도 없지


어느날 엄마랑 아빠랑 크게 싸워서

나랑 동생이 부리나케 부모님 집으로 달려갔더니

아빠가 또.

밥 때문에 엄마한테 화를 내신거다.

이번엔 좀 심각했다,

욱하는 성질을 못 이긴 아빠가 물건을 던지면서 유리가 깨져 엄마가 다치셨다.


그놈의 밥이 뭘까 정말

왜 밥 앞에서 아빠는 승자 엄마는 패자인거지?


아빠가 밥 문제로 이렇게 성질을 못 이기신다면

자식인 우리는 이혼하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엄마가 무방비로 아빠의 폭력에 노출되셨는데 우리는 참을 수 없다,

폭력적인 아빠를 버릴 거라고 엄포를 놓고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갔다.


아빠는 몇일 후 울며불며

자기가 뭘 그리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자기는 바라는 게 많지 않은데 왜 그게 그리 힘든거냐고 억울해하셨다...


본인이 바라시는 걸 왜 남이 해줘야한다고 생각하시죠? 따뜻한 밥상? 원하면 본인이 차려드세요,

제발 남한테 요구하지 마시라고요!


자기 세대는 어쩔 수 없다고, 집안일을 배운게 없다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다고 한탄하시는 아빠...

정말 다시 생각해도 이세상 제일 한심한 장년남자의 최후가 아닌가 싶다.


밥에 대한 문제는 내 결혼관념에도 당연히 큰 영향을 미쳤다.

(부끄럽지만, 부모님의 저 사건을 당시 남자친구였던 내 남편도 함께 지켜보았다.)


난 밥하는 사람 아니다,

나에게 그 아무도 밥을 맡겨놓은 사람은 없다.

배고픈건 스스로 해결해라 누구한테 의지하지말고!


남편도 당연히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비록 전업주부여도 나는 밥을 차려야하는 의무가 없다.


남편은 장인을 보고 깨달은 점이 많아 보인다.


자식들을 버젓히 키우고 허울은 좋다만,

자기 먹을 밥 하나 할 줄 모르는 불쌍한 인간.

그렇다고 사먹기는 싫어하는 고집.

자식들이 아버지를 버릴 수 있다고 엄포를 놓은

상황에서도 자기의 상황만을 억울해하는 모습.


저 불쌍한 늙은 남자의 내면을 보니

자기의 미래를 어떻게 그려나가야할지

아무래도 그려지는 모습이 있긴 한가보다.


아빠는 자식들이 자기를 지켜주지 않을 껄 아시고

엄마한테 더 잘하신다고 한다.

실제로 그 일 이후 아빠를 챙기는 건 엄마뿐이다.

엄마가 아빠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우리에게 좋게 말해주는 건지 모르겠다만,

나와 동생은 엄마에게 아빠가 또 성질 못 죽이시고 폭력적으로 물건을 던지신다면 참지마시라고,

폭력적인 아빠는 우리도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잔인하게 이야기한다.


밥으로 40평생 부부생활동안 승자의 위치였던 아빠는 결국 그 밥 때문에 ..... 제일 불쌍한 남자가 되었다.


밥이라는게 참 쉽지 않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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