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다녀요? 저요? 아, 제 남편이요.
해외생활을 하다 보면 한인 많은 곳이 꼭 있다.
한식당이 모여있는 곳,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게 그리고 골프장.
우리 부부를 포함한 한국인들은 거의 골프장에 모여있다고 보면 된다.
미국인은 서로 타지에서 만나면 안부인사 건네면서 다가가는 반면,
한국인은 여기도 한국인이 있네 신기해할 뿐,
굳이 모르는 사람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여가면서 다가가진 않는다.
평일 어느 날, 소그룹씩 모여있는 골프장에서 혼자 구석 어디쯤 자리 잡고 안 맞는 공과 채를 열심히 휘두르는 데, 처음으로 먼저 다가와 준 사모님이 계셨다.
오늘 프로모션 있다는데 저랑 같이 나눠서 더 치고 갈래요?
혼자는 너무 힘들어서 한 명 더 구하고 있었거든,
네! 저야 감사하죠.
어느 회사 다녀요?
저 회사 안 다니는데요... 그니까 평일에 골프장 나와있어요
어머어머 자기 너무 재밌다! 애기 아빠 어디 다니냐구,
앗, 저도 모르게 그만 ;; 아직은 어색해서 못 알아 들었어요
그 뒤로 이어진 남편 회사와 관련된 대화
남편 회사의 생태계를 잘 몰랐지만, 먼저 다가와주신 사모님의 설명으로
내 남편과 이사님의 사이가 밀접하다는 걸 알았다.
남편 회사에 대해 내가 참 아는 게 없었구나...
보아하니 자기 애기 없구나?
네;; 애기 없는 걸 눈치채셨네요?
그럼, 자기 나이대엔 애기가 어려서 여기서 못 놀고 있지.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공치실 때 심심하시면 저 불러서 꼭 데리고 가주세요
그래요, 다음에 커피라도 한잔 같이 마시자
감사합니다!
두 시간가량 함께 시간을 보내고, 번호를 교환하는 데
사모님은 내 번호를 '내이름_(회사)' , 나는 '이사 사모님_(회사)' 저장했다.
그러고는 문득 고민했다.
이사 사모님께 성함을 여쭤보는 게 예의인 건지,
여쭤보지 않는 게 예의인 건지
사모님 제가 이렇게 번호 저장해도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자기 귀엽다, 내 이름은 *옥이야
생각해보니 사모님은 나를 **씨라고 부르셔도
내가 *옥씨라고 부를 순 없으니 사모님으로 대동 단결하는 게 맞을 것도 같고...
살면서 처음으로 내 명함이 아닌 남편 명함을 건네면서
나를 소개해본 경험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업주부로 오래 살아온 고모는
성당에서든, 병원에서든 자신을 교장 사모라고 소개했던 것 같다.
교장 사모님의 체면을 열심히 지키시려고 노력하셨던 기억이 난다.
고모가 교장 사모님이라고 소개하는걸 어색해하지 않고 당연히 여겼었는데
나 스스로를 남편 명함으로 소개하는 게 이렇게 어색할 줄이야.
그날 저녁, 내 지갑에 남편 명함을 몇 개 더 넣어두었다.
처음엔 남편의 현지번호를 외우지 못해서 예비로 넣고 다녔었는데
세 장 넣어 두었던 남편의 명함을 벌써 다 소진했다는 걸 알았다.
어디다 썼더라...
주말에 유명 식당 대기 걸면서 전화번호를 현지 언어로 말하기 어려워 건넸던 남편 명함,
아파트 시큐리티에게 이쪽으로 연락하라고 건넸던 남편 명함,
그리고 이번에 이사님께 전달해달라며 건넨 남편 명함.
연애를 길게 해서,
내가 먼저 취뽀하고 남편이 취업준비생일 때, 내가 조언도 해주고 자소서도 봐주고 할 때가 있었는데,
면접 잘 보라고 넥타이며 넥타이핀이며 손수건이며 구두며 백화점에서 큰돈 쓴 적도 있었는데,
다음 기회엔 꼭 합격할 거라고 합격 못하면 내가 먹여 살리겠다고 위로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네 명함이 내 소개가 되었구나.
내가 잘 키운 건지, 네가 잘 성장한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