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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Feb 22. 2023

서로의 인생을 들어주는 사이

새해의 첫 월요일을 앞둔 밤, 자기 전에 남편을 위한 쪽지를 남겼다. 올해의 첫 출근날을 기분 좋고 힘차게 시작했으면 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5~6줄 정도 되는 짧은 글을 적어 현관문에 붙여 두었다. 남편은 보통 5시 40분쯤 알람을 듣고 일어나 6시에 집을 나서는데, 나는 보통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남편의 출근길을 배웅한 적이 손에 꼽는다. 가끔 잠결에 남편이 거실 화장실에서 씻는 소리, 철컥하고 현관문을 닫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다. 출근하는구나, 하고 다시 금세 잠들어 버리지만 말이다.


언제인가는 남편이 출근하려고 일어난 새벽의 일을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남편은 가끔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 거실에 잠시 앉아 있다가, 다시 안방으로 돌아와 세상 모르게 쿨쿨 자는 나를 꼭 껴안아 본다고 한다. 평온하게 자는 모습이 좋아서, 그리고 가끔은 잠결에 남편의 품을 파고드는 나의 행동이 좋아서 그렇단다. 그 이야기를 할 때 남편의 표정은 뭐랄까, 무척 행복하면서도 ‘출근하기 싫은 직장인’의 얼굴이 보여 짠하고 안쓰러웠다.


연말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모처럼 휴가를 쓴 금요일, 서울에서 식사를 하고 주말에는 사람이 많아 여유롭게 구경하기 어려운 핫플을 방문했다. 온 김에 이것저것 사느라 금세 남편의 양손에 짐이 늘어났다. 나에게 짐을 들리는 일이 없는 걸 알면서도 남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겁겠다. 나한테 줘. 내가 들게.”

“이게 뭐가 무겁다고 달라고 해? 내가 여보도 드는데.”

잠시간의 정적 후에 내가 머쓱하게 말했다.

“자기 나 못 들잖아…” (좀 구차하게 덧붙이겠다. 들긴 든다. 업는 것도 들긴 드는 거잖아!)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내뱉은 말에 남편이 빙긋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당신의 인생을 들고 있잖아!”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백화점 한가운데서, 잔잔하게 밀려와 모래를 쓸어내는 파도처럼 뭉클한 감동이 내 마음 한구석을 쓸고 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직접 보지 못했음에도 동트기 전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 나를 꼭 안아보다가 끝내 몸을 일으켜 씻으러 가는 남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서로의 인생을 들어주는 사이. 그렇기에 서로의 ‘안녕’을 누구보다도 신경 쓰고 세심하게 살피는 사이. 새삼스럽게 깨달아진 그 책임감이 기분 좋은 묵직함으로 내 마음을 눌렀다. 그건 숨 막히게 나를 짓누르는 무게가 아니었다. 끈이 끊어져 바다 위를 향방 없이 부유하는 부표처럼 둥둥 떠다니지 않도록, 내 깊은 곳에 중심추로 자리 잡아 내가 있어야 할 곳을 가르쳐주는 무게였다. 결혼을 하면서 짊어지게 되는 서로의 무게. 당신의 인생이라는 무게. 그 무게가 마냥 버겁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내가 당신의 인생을 들고 있는 것만큼 당신이 나의 인생을 들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는 게 참 고단하고 지겹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인생에는 왜 이렇게나 숙제가 많은지, 입시가 끝나면 취업하고, 취업하면 결혼을 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고, 아이를 낳으면 20년간은 꼼짝없이 한 사람을 사람답게 키워내야 한다는 책임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구나.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혀와 나는 내 인생 하나 건사하는 것으로 한 사람 몫을 다하겠다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어도 평생 짊어져야 할 1인분의 인생은 가볍지 않았다. 돌보는 것도 돌봄을 받는 것도 나뿐인 삶은, 1인분이지만 2인분의 몫을 하는 듯 고되고 무거웠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을 들고 가는 건 그렇게 신이 난다. 나에게 자신의 인생 일부를 흔쾌히 내어주는 그 마음이 기껍다. 나에게 내어준 그 일부분을 정성스럽게 가꾸어주고 싶다. 그래서 이 사람의 삶이 아주 풍요롭고 아름다운 일생으로 완성되면 좋겠다.


새벽녘 일어나 잠든 나를 꼭 안아주고 출근길에 나선 남편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한 만족감으로 빈틈없이 꽉 채워졌다. 부부의 삶이란 그런 것 아닐까? 각기 다른 그림인 줄 알았지만 가까이 붙여 놓으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것. 내 그림만 아름다워서는 완성될 수 없는 것. 그래서 붓을 들고 서로의 빈 캔버스를 정성 들여 채워주게 되는 것.


우리의 그림이 마침내 완성될 그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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