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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r 09. 2020

티끌 모아 태산 이랬니?

동전 모으기는 손목, 어깨 튼튼하신 분들 하는 걸로

며칠 전 둘째 딸아이가 태권도를 그만 다니겠다길래 속으로 쾌재를 불렀었다. 매달 나가던 학원비가 굳었으니  적금이나 들면 되겠다 싶어서 적금 통장을 개설했다. 그런데 갑자기 댄스학원을 등록하겠다는 게 아닌가. 이미 같이 다니기로 한 친구들이랑 이야기도 끝났단다.(응? 그 얘기를 나랑 해야지, 왜 친구들이랑 하냐..)

     

결국 3년간 모은 저금통을 털었다. 한 달 학원비는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어느 영화에서 저금통에 모은 동전으로 비행기 티켓을 사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동전도 오래 모으면 여행 갈 때 보태 쓸 수 있겠구나 싶어 모은 거였는데. 국내여행은 고사하고 댄스학원 등록비 때문에 깨게 될 줄은 몰랐다.       


그냥 은행에 가서 기계에 넣어도 되지만, 둘째랑 같이 식탁에 앉아 동전을 쏟아놓고 세어 보았다. 한석봉과 어머니처럼 "나는 100원짜리를 모을 테니 너는 500원짜리를 모으거라." 지시를 하고 열심히 동전을 분류했다. 생각보다 꽤 많은 양이다.


500원짜리 7만 원어치와 100원짜리 5만 원어치를 한데 모아서 먼저 학원비를 따로 빼놓았다. 손으로 가리키며 “요만큼이 댄스 학원비네” 했더니 아이가 피식 웃는다.     



다 계산해보니 22만 원이 조금 넘는다. 티끌모아 태산은 안 되고 누구 말마따나 흙 무대기 정도는 된다.     


동전을 500원짜리와 100원짜리로 지퍼백에 나누어 담았다. 한 봉지만 들었는데도 어마어마하게 무겁다. 체중계에 달아보니 두 봉지가 거의 9kg 정도다. 한 번에 입금하기에 좀 무겁지만, 은행을 두 번 가긴 귀찮아서 그냥 두 봉지 다 가방에 넣어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오전에 우리 집에서 모임이 있었던 터라 오후 1시가 넘어서야 집을 나섰다. 당장 그 날 저녁부터 다니기로 학원에 연락을 해놓았기 때문에 바로 동전을 입금시켜야 했다.


집에서 가방을 메고 나오는데 헉 소리가 난다.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뒤로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함께 모임을 한 다른 엄마가 재래시장 근처의 은행까지 태워주어서 조금 수월하게 이동했다.

      

차에서 내리면 가방을 다시 메는데 어깨가 금세 뻐근해진다. 두 손으로 가방끈을 동여 쥐고 산을 오르듯 느린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겨우 겨우 은행 문을 열고 들어가 손님용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휴우.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으니 한결 살 것 같았다.


동전 바꾸는 곳이 어디지? 잠시 두리번거리니 왼편에 이런 문구가 눈에 띈다.      


동전 교환은 오전 9:00 ~ 11:00      


잠시 얼이 빠진 채로 의자에 내려놓은 가방을 바라보았다. 저걸 다시 들고 가야 한다고? 눈 앞이 캄캄했다. '혹시 어떻게 안 될까요?' 라던가 '맡겨놨다가 내일 다시 오면 안 되나요?'라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네 안 됩니다'라고 대답할 것 같았고, 괜히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진상 손님은 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시 은행을 나왔다. 시장을 거쳐 3층 지하철 역사에 올라가 무인민원발급기에서 민원서류 한 장을 떼려고 했는데 그 마저도 무인민원발급기에서는 발행이 안 되는 서류였다. 가방은 점점 돌덩이처럼 무거워지고, 시내에 다른 볼일을 보러 다니는데 계속 헛웃음이 났다. 


'너 유럽 배낭여행 가보고 싶어 했잖아. 연습이라고 생각해. 10 kg도 안 되는 배낭 메고 이 정도도 못 걸으면 나중에 산티아고 같은 데 가겠니?' 따위의 쓸데없는 걱정을 해가며 겨우 집까지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아이에게 동전을 입금시키지 못했다고 말하니, 괜찮단다. 같이 학원 다니기로 한 애가 갑자기 못 다니겠다고 해서 자기도 안 가겠단다. 어제만 해도 학원에 등록한다고 문자 보냈다가, 오늘 다시 못 간다고 사과 문자를 보내는 건 그렇다 치자. 힘겹게 동전을 메고 헛걸음하고 돌아다닌 걸 생각하니 열이 뻗쳤다. 

너 정말!!! 중2니까 참는다, 내가.   


그 후로 며칠 동안 어깨가 욱신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가방을 멨다 내려놨다 했던 오른 손목마저 시큰거렸다. 지금 동전은 지퍼백에 든 채로 뒷베란다에 방치되어 있다. 더 이상은 들고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몇 만 원씩 소분해서 가져간다 해도 동전 교환 업무 시간에 맞추어 나가기가 어렵고, 일부러 왔다 갔다 하기엔 차비가 너무 아깝다.  그리고 무섭다. 뒷목과 어깨를 잡아당기던 그 무게.


앞으론 예전처럼 열심히 동전을 모으지 않게 될 것 같다. 내 수중에 현금이 22만 원이나 있건만. 든든하기는커녕 못 먹는 감 쳐다보는 것처럼 이리도 씁쓸할 줄이야. 부디 티끌 같은 동전 모으기는 손목과 어깨가 튼튼하신 분들만 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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