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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ug 04. 2020

이상한 상품권을 팔아놓고, 사과하던 그의 정체는?

사기인 듯 사기 아닌 상품권 거래의 전말


상품권을 사서 카드 대신 생활비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한 유튜브 방송을 보고 나서였다. 종종 보던 금융 관련 채널에 한 젊은 엄마가 게스트로 나와 인터뷰를 했다. 그 날의 주제는 '평범한 세 아이 엄마는 어떻게 20억의 부동산 자산을 마련했는가?'였다.


그녀는 아이들 생일에 장난감처럼 감가상각이 되는 물건은 사주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금이나 주식, 펀드처럼 미래에 상승할 가치가 있는 것을 선물하고, 자신의 옷도 감가상각이 되기 때문에 잘 사 입지 않는단다. 세공비를 아끼기 위해 금이나 은은 덩어리나 구슬로 된 것을 사고, 식비를 아끼기 위해 외식이나 배달음식 대신 직접 음식을 만든다고.


토르티야를 사다가 세 아이 피자도 직접 만들어 먹였다는 그녀. 5% 할인하는 온누리상품권을 사서 반 정도는 장을 보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받아서 저축하면 결국 10%의 할인을 받는 것과 같다며 꼭 상품권을 활용해보라고도 했다.


방송을 보고 난 뒤 나 역시 감가상각이 되는 옷은 올 해만이라도 사 입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피자까지 만들어 먹이는 건 무리지만 별생각 없이 자주 시키던 배달음식과 외식을 많이 줄이고, 미용실을 가는 대신 집에서 염색을 했다. 소비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운 신용카드 대신 생활비 통장을 쪼개서 체크카드를 쓰고,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당장 생활비가 몇 십만 원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났다.




이렇게 두어 달 보내고 나니 이제 나도 상품권을 사서 10% 할인 효과를 누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은 집에서 오가는 교통비 때문에 맞지 않을 것 같고, 집 앞 마트에서 쓸 수 있는 상품권을 사 보기로 했다.      


먼저 우리나라 최대의 중고거래 카페에 들어가서 상품권을 검색해보았다. 그러다가 무려 10%나 할인하는 상품권을 발견했다. 70만 원어치의 상품권을 63만 원에 판매한다는 글이었다. 다른 판매글보다 훨씬 저렴해서 의아했지만 판매자의 아이디를 조회해보니 작년부터 상품권만 십여 차례 판매한 이력이 있었고, 모두 거래 완료라고 되어 있었다. 카페에서 제공하는 사기 조회로도 별다른 내역이 뜨지 않았다. 그래도 문자를 보낼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000상품권 구매 원합니다~ 70만 원어치요. 아직 가능한가요?’라고 써놓고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모바일로 쿠폰번호를 받아서 지류로 발급해야 하는 상품권이라 사기꾼이 아니라면 돈을 보내는 즉시 문자로 쿠폰이 와야 한다. 반만 돈을 보내고 정상적으로 문자가 오면 나머지를 거래한다고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뜸 들이는 동안 누가 먼저 사버리면 어떡하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에라, 모르겠다. 전송 버튼을 눌러버렸다. 1분도 지나지않아 답장이 왔다.


-네 가능하십니다. 1234567891234 000 뱅크 홍길동입니다. 입금 후 문자 하나 주십시오.

-네 630,000원 입금해드리면 되죠?

-넵


어쩐지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심플한 답변이었다. 구구절절 설명을 하지 않는 모양새가 오히려 사기꾼 같지 않았달까. 무엇보다 10% 할인의 유혹이 강렬했다. 곧바로 이체를 하고 입금 문자를 보냈다. 무려 현금 63만 원. 큰돈이었다. 중고거래라곤 아이들 장난감 인형 옷과 만 오천 원짜리 전기오븐 사본 게 다였는데.


1분도 안 되어 확인했다는 문자가 오더니 10만 원권 상품권 쿠폰번호 일곱 개가 연달아 온다. 그제야 나오는 안도의 한숨. 휴우, 사기는 아니었구나.


찬찬히 계산을 해보았다.

상품권 금액의 60%만 쓰면 나머지 40%는 현금으로 받을 수 있다. 10만 원 권으로 식료품과 생필품을 구입하는 데 6만 원을 쓰고, 나머지 4만 원은 현금으로 총 28만 원이 현금으로 돌아오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실제 현금지출은 35만 원이고 상품권 가액으로는 42만 원의 소비를 할 수 있다.


상품권을 이렇게 사용하면 그냥 현금이나 카드로 70만 원의 소비를 하는 것 이상은 물론, 10% 할인된 가격에 상품권을 사서 얻게 되는 10%(7만 원)의 할인보다 더 큰 혜택을 볼 수 있다. 현금을 35만 원만 쓰고도 7만 원의 절약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실 지출한 35만 원의 20%에 해당하는 혜택이다. 현금 적립 시 1.5%를 추가 적립해주는 000 페이, 1%를 캐시백으로 돌려주는 증권사 체크카드, 10%씩 할인해서 판매하는 모바일 쿠폰으로 커피를 사 마신다 해도 상품권을 활용한 할인율에는 못 미친다.




다음 날 아침.  상품권을 교환하기 위해 백화점 고객센터를 방문했다.



대기인원이 한 명뿐이라 빠르게 자리에 앉았다. 오른쪽 맨 끝자리에 앉은 나는 직원에게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


"상품권 교환 좀 하려구요."


직원이 건네받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빠르게 숫자를 두드렸다.  


"손님. 이거 혹시 어디서 받으신 건가요?"

"네?"


물어보는 이유가 뭘까 싶어 어버버하는 사이 직원이 손으로 계속 자판을 두드리며 말한다.


"백화점에서도 교환 가능한 쿠폰이라고 쓰여 있긴 한데 저희 쪽에선 조회가 안되네요."


설마?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자 직원이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고 말한다.


"제가 잘못 누른 걸 수도 있으니까 다른 걸로 다시 한번 확인해볼게요."


타다다닥, 자판 두드리는 소리에 얼음처럼 긴장한 채 기다렸다. 그녀가 "아, 되네요 손님"이라고 말해주길. 그러나.


"한 장은 이미 2019년 12월에 *마트에서 교환한 걸로 나오네요."


뭐라고? 아니야, 아닐 거야.


"다른 걸로 한 번 더 확인해봐 주세요."

"지금까지 3장 확인해봤는데 다 안 되네요. 어디서 받으신 거예요?"

"중고거래로 샀는데..."


목소리가 작아지고 말끝이 흐려졌다. 직원이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휴대폰을 내민다.


"한 번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고객센터를 나오며 상품권을 판매한 사람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전화 연결음이 이내 끊기더니 문자가 왔다.


-회의 중이니 나중에 전화하겠습니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회의라고? 어떻게 하면 더 사기를 잘 칠 수 있을까 사기꾼끼리 회의라도 하는 건가? 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고, 머리속에서 욕이 날라다녔다. 무엇보다 돈을 63만원이나 날렸다 생각하니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저히 침착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상대방이 연락을 끊고 완전히 잠수를 탈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답신을 보냈다.


-제가 백화점에 와서 상품권 교환하려고 했는데 보내주신 상품권이 유효하지 않거나 이미 작년에 교환된 상품권이라고 합니다. 환불 부탁드립니다.


‘당장 환불해주세요!’도 아니고 ‘환불 부탁드립니다’라니. 억울한 입장에서 보내는 문자 치고는 너무 공손해서 어이가 없었지만, 사기꾼도 사람인데 다짜고짜 ‘경찰에 신고하겠다, 너 뭐하는 놈이냐?’ 이러면 절대 환불을 안 해줄 것 같았다.


다행히도 우려했던 연락두절 대신 문자가 왔다.


-아, 죄송합니다. 전부 다 교환이 안되시는가요?


‘안 되나요?’도 아니고 ‘안 되시는가요?’라는 존칭을 써가며 사과까지 하는 이 사람, 도대체 정체가 뭐야? 하지만 사기가 아니라고 안심하긴 일렀다.


-일단 7장 중 3장만 확인한 상태인데, 직원분이 더 이상 확인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신뢰를 잃은 상태라 바로 환불 원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계좌번호를 보냈다. 내가 문자를 보내자마자 그쪽에서도 동시에 문자가 왔다.


-네 알겠습니다. 환불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계좌 부탁드립니다.


뭐지? 이 순순한 대답은. 이렇게 마음을 안심시켜놓고 진짜 잠수 타는 건 아니겠지? 사기를 당한 후기들 중에는 사기꾼과 2주간 톡을 주고받으며 기다려주다가 결국 상품권을 못 받은 사례도 있었던 터라 환불해주겠다는 문자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기꾼들이 쓰는 계좌가 거의 대부분 시중은행이 아닌 000뱅크라는 글을 중고거래 사기 후기에서 보았기에 여전히 불안했다.  


-계좌번호 보내드렸습니다. 바로 입금 처리해주세요.

-미팅 중인데요, 자리 돌아가는 대로 처리드리겠습니다.


역시. 미팅은 무슨 미팅! 나는 그 사이 사이버범죄 수사를 신고할 수 있는 어플을 깔고, 상품권 사기 범죄 신고 절차들을 알아보았다. 그렇지만 확실한 결론이 나기 전까지 상대방의 기분을 거스르는 어투는 여전히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보낸 답신은 ‘일단 믿고 기다려보겠습니다.’였다. 사기꾼에게 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정중한 문자였다.


그리고 연락이 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1시간 동안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고 기다리겠다던 인내심은 서서히 바닥이 났다. 경찰에 신고도 안 하고 기다리는 동안 그는 휴대폰을 끄고 잠적할 수도 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내가 순진한 호구 중에 호구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된다. 나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문자를 다시 보냈다.


-점심시간인데 미팅 끝나셨나요? 빠른 처리 부탁드립니다!


그리고도 한동안 답은 오지 않았다.


사자성어 하나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소탐대실(小貪大失).


7만 원을 아낄 수 있다는 생각에 63만 원을 날리다니! 작은 물욕에 눈이 어두워 큰 이익을 잃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는 대가가 무려 63만 원인 것인가?


이런 경우들이 종종 있나 보다. 시가보다 10% 싸게 판다는 유혹. 세상에 공짜는 없는데.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지금 끝났습니다. 바로 처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한 번 문자가 전송되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왔다 갔다 차비 명목으로 조금 더 입금드렸습니다.  


얼른 은행 계좌를 확인해보았다. 63만원을 보냈던 이로부터 65만원이 입금되었다. 그가 약속한대로 환불해주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오전에 백화점에 들른 후부터 점심이 지난 시간까지 계속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았는데 드디어  안전하게 도착해서 내린 느낌이었다.


차비 명목으로 더 보낸다더니 진짜 2만원을 더 보내준 게 신기했다. 우리집에서 백화점까지 왕복 버스비는 3천원. 그런데 2만 원이 더 들어왔으니 17,000원을 벌었다. 63만원을 투자하고 하루만에 2.6%수익률을 올린 셈이다. 그게 아침부터 백화점 가서 허탕치고, 불안에 떨며 심장이 쪼그라들었던 비용이라 생각하면 헛웃음이 난다 .


사실 돌려받지 못한다 한들, 잘 알아보지 않고 섣불리 입금한 나의 탓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비운 터였다. 그런데 돈이 환불되고 보니 사기꾼 취급을 하지 않고 나름 예의를 지킨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하다. 이상한 상품권을 팔아놓고, 끝까지 정중하게 사과하던 그의 정체가.  




올해 3월초에 있었던 일이예요. 그즈음 브런치에도 발행했던 글인데, 내용을 수정하고 이미지를 첨부했어요. 그 후로 **마켓에서도 상품권 거래를 시도해보았는데, 찜찜한 경험을 했어요. 그냥 지역화폐와 온누리상품권을 사용하는 게 속이 편하겠다 싶더군요. 그 날 하루 몇 시간동안 심장이 얼마나 쪼그라들었는지. 수명도 몇 년 줄은 것 같아요. 겁도 없이 중고로 상품권 거래 시도했다가 수업료로 63만원 날리는 줄 알았어요. 다들 중고 상품권 거래는 조심하세요!

혹시 저처럼 비슷한 경험하신 분 계신가요? 그 상대방이 누구인지 지금도 너무 궁금하네요. 기업에서 상품권 처리하는 담당자인가 싶기도 하고..도저히 감이 안오더라고요. 흔한 사기꾼은 아닌 것 같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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