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좀 걱정되는데.. 아예 콘서트장 근처 게스트하우스 예약해서 1박을 할까? 어차피 낼모레 개학이니까 근처 카페 같은 데 가서 방학과제도 끝내고.”
마중을 나가도 되지만, 집에서 콘서트장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왕복 4시간이나 탈 걸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이는 잠깐 생각하는 눈치 더니 “상관없어”라고 말한다. 나는 곧바로 홍대 입구 쪽의 숙소를 예약했다.
아이는 공연을 보러 서울로 떠났고 나는 밖에서 볼일을 본 뒤 출발할 예정이었다. 생각보다 일정이 30분이나 늦게 끝난 터라 꾸려놓은 가방을 챙기러 부랴부랴 집에 들렀다.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어찌나 허기가 지던지.
‘이왕 늦은 거 조금 더 늦으면 어때. 어차피 서울에서 잘 건데.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하지 뭐.’
냉장고에서 식빵을 꺼내 프라이팬에 굽고 땅콩잼을 발랐다. 우유도 한 잔 따라서 급하게 마시고. 그릇을 대충 치우고 나가려는데 속이 느글거린다. 평소 잘 안 먹던 땅콩잼 때문인지 느끼함이 가시질 않았다. 그때 무모하게도, 라면 생각이 났다. 얼큰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 매콤하고 아삭한 김치! 그걸 먹으면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다.
서둘러 어깨에 맨 가방을 내려놓고 라면을 꺼냈다. 먹는 시간을 아낀다고 라면을 쪼개 3/4만 넣은 데다, 김치를 함께 넣고 끓인 뒤 정말 빠른 속도로 먹어치웠다. 포만감과 밀려와 뿌듯했지만, 가방을 메고 나왔을 땐 이미 예정보다 1시간 이상 지체된 뒤였다.
밖은 어둑했다.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 택시 승차장으로 달려갔다. 택시는 한 대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만 몇 명이 줄을 선 상태였다. 다시 버스정거장으로 돌아와 지하철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려보았지만, 정류장에는 지하철역을 안 가는 버스만 연속으로 세 대가 지나갔다. 한참 후에야 버스를 타고 역에 내려 허겁지겁 지하철 플랫폼으로 뛰어갔을 땐, 인천행 지하철이 막 문을 닫은 뒤였다.
6시에 출발하려던 계획에서 무려 2시간이나 늦게 지하철을 탄 나는 곧바로 아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가 일정이 늦게 끝났어. 어떡하지? 생각보다 더 많이 늦어질 것 같은데... 아무래도 9시 넘어서 도착할 것 같아. 미안ㅜㅜ’
집에서 토스트와 라면을 먹느라 늦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 했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배고픈 채로 나를 기다릴 아이에게 염치가 없었다.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이동할 때쯤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기다리는 중이라고. 나는 다섯 정거장만 가면 되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했다. 건물 3층에 서점이나 문구점이 있다던데 앉아서 기다릴만한 데를 찾아보라고.
홍대 앞 길거리는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미리 알아봐 둔 약도를 보며 부지런히 걸어갔다. 상상마당은 지하철역에서 꽤 거리가 되었다. 나는 건물 앞에서 기다릴 아이를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인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건물 옆도 돌아보았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하철역에서 꽤 머네. 걸어오는데 좀 오래 걸렸어. 어디야?”
“건물 앞에 벤치. 앉아 있는데 안 보여?”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안 보이는데”
“사람이 많다고? 사람 하나도 없는데”
사람이 없다니. 이 바글거리는 사람들이 안 보인다면 대체 어느 건물 앞에 가 있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건물 앞에 뭐 보여?”
“OO자동차"
그런 간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아이가 다시 물었다.
“근데 엄마, 지하철역에서 한참 걸었다고? 나는 별로 안 걸었는데. 여기 삼성역에서 대개 가까웠어”
“삼성역?”
“어, 삼성역”
“삼성역이라고?”
내가 아는 삼성역은 저 아래 강남 쪽에 있는 삼성역인데.
“2호선 삼성역 맞아? 거긴 여기랑 반대쪽인데...”
“왜 코엑스 있는 데 있잖아. 거기 삼성역”
“거기에 상상마당이 있다고?”
“그래 여기에서 공연을 했다고!”
갑자기 뇌 회로가 멈춘 것 같았다. 나는 잠깐 전화를 끊고 아이가 들으러 간 콘서트를 검색했다. 거기엔 ‘공연장 - KT&G 상상마당 대치점’이라고 되어 있었다. 상상마당이 대치동에도 있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내가 아는 상상마당은 당연히 홍대입구 쪽에 있는 곳이었으니, 그 근처에 숙소까지 잡는 멍청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미안해. 엄마가 착각했나 봐. 내가 데리러 갔다가 다시 오려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고. 네가 이쪽으로 오는 수밖에 없겠는데...”
스스로의 실수가 너무나 어이없고 당황스러워서 아이에게 오는 방법을 설명하는 동안에도 횡설수설이었다.
“홍대입구로 오지 말고, 사당에서 4호선으로 갈아 타...어... 거기가 4호선이 맞나? 어쨌든 삼각지에서 6호선을 다시 갈아타고 광흥창역으로 와. 거기에서 숙소가 더 가까우니까....음.... 그냥 2호선 타고 홍대입구로 오는 게 나으려나? 근데 그렇게 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냥 광흥창역으로 오는 게 낫겠다...”
뭐 이런 식이었다.
아이는 한숨을 쉬더니 그냥 2호선을 타고 홍대입구까지 오겠다고 했다. 나는 이미 엄청난 잘못을 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아이더러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결국 8시까지 마중 가기로 한 시간에서 마중은커녕 밤 11시가 다 된 시간에 아이가 오도록 만든 셈이었다. 중학교 2학년 여자아이가 혼자 콘서트를 보고 저녁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오는 게 걱정된다며 서울에 숙소를 잡은 이유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혼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왔어도 벌써 도착할 시간이었으니까.
아이를 만나고 나니 더욱 면목이 없다. 나는 살짝 기가 죽은 목소리로 “배고프지? 저녁 밖에서 먹고 들어갈까?”라고 물었다. 사실 그 시간까지 저녁을 굶은 아이에게 당연히 사줘야 할 밥을 마치 네가 원하면 사주겠다는 식으로 유세를 부렸다.
우리는 시끄러운 힙합 음악에 외국인과 젊은이들이 가득한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나는 연신 “여기 음악도 그렇고, 사람들도 그렇고. 역시 홍대입구라 다르다. 그렇지?”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실수를 포장하느라 진땀을 뺐다.
순간의 배고픔도 참지 못하고, 제대로 확인도 해보지 않고 아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것도 모자라 실수를 포장하려고 허세를 떠는 모양새라니! 부모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부모가 되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스스로에게 씐 콩깍지가 떨어져 나가는 것.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리 지혜롭고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며, 꽤 어설프고 좀생이 같은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은. 스스로를 완벽주의자라고 착각하고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하던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편안하고 만족스러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