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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y 19. 2020

아버지에게 배운 ‘사람 노릇’

내가 자란 시골에서는 쥐가 흔했다. 천장으로 쥐가 뛰어다니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 정도였다. 한 마을 사는 삼촌네 놀러 갔더니 새끼 쥐로 술을 담갔다며 보여주었는데 투명한 술병 안에는 털도 없는 말간 피부의 어린 쥐 여섯 마리가 눈을 감고 있었다. 자다가 봉변을 당한 모양이었다.


하루는 부엌에 쥐 한 마리가 나타났다. 마침 부엌에서 쥐를 발견한 아버지는 재빠르게 싸리 빗자루로 수챗구멍을 막았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퇴로를 막은 것이다. 그리곤 어쩔 줄 모르고 서있던 내게 화를 내셨다. 


“잡아야지 가만있으면 우야노! 얼른 쓰레받기 가 온나!” 


마당으로 나가 쓰레받기를 들고 부엌으로 뛰어갔다. 아버지의 지휘대로 턱이 높은 부엌 입구를 쓰레받기로 막고 쥐를 구석으로 몰았다. 아마도 수챗구멍을 통해 들어왔을 쥐는 길이 막히자 오도 가도 못 하고 찍찍거렸다. 아버지가 쥐를 빗자루로 세게 쳤다. 얻어맞은 쥐가 꿈틀거렸다. 아버지는 꿈틀거리는 쥐를 비료포대에 담더니 패대기를 쳤다. 일전에 부엌에 나타난 새끼 청개구리를 물 한잔과 함께 꿀꺽하던 아버지에게 그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날 아버지는 사람이면 쥐를 잡을 줄 알아야 한다는 꾸중으로 쥐잡기를 마무리했다. 아버지의 훈계는 나에게 이런 교훈을 남겼다.


‘쥐를 못 잡으면 사람 노릇 못 한다.’ 


아버지의 혼쭐나는 교육 후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담이 커졌다. 다른 아이들처럼 가재나 메뚜기는 잘 잡지 못했지만 밭에 나타난 두꺼비를 잡아서 약탕 집에 팔기도 하고(당시 두꺼비는 오백 원, 뱀은 오천 원이었다), 집 앞에 나타난 뱀을 친구와 같이 잡기도 했다.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쥐를 잡는 데 성공한 것은 어른이 된 후였다.      


대학교 4학년을 앞둔 겨울이었다. 학생회실에서 회의를 하던 중 쥐가 나타났다. 몇몇의 비명소리와 함께 놀란 쥐가 여기저기를 휘저으며 도망치느라 한바탕 난리가 났다. 회의 주제는 쥐 출몰에 대한 대책으로 바뀌었다. 쥐가 서식하면서 새끼를 친다면? 학생회실이 쥐 소굴이 될지도 모른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일단 끈끈이를 사서 몇 곳에 놓아보죠.”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정말 쥐가 걸려들면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대한 질문에는 다들 답이 없다. 아버지의 쥐잡기 훈육을 받은 내가 나설 차례였다. 


“죽여야죠.”      


며칠 후 끈끈이 중 하나에 쥐가 걸려들었다. 제법 큰 쥐였다. 쥐는 찌익-찌익 소리를 내면서 도망치기 위해 몸부림쳤다. 쥐가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이 근처에 오지는 못하고 밖에서 수군거렸다. 나는 검은 비닐봉지를 가져와 끈끈이에 붙은 쥐를 발로 밀어 넣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놀랄 것 같아 버둥거리는 봉지를 들고 화장실로 갔다. 그리곤 아버지가 하던 것처럼 바닥에 힘껏 내리쳤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직접 생명을 죽이는 일은 영 달갑지 않았다. 몇 번을 더 내리치자 봉지가 축 늘어졌다. 죽은 모양이었다. 더 이상 내려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났다. 


한동안 내게는 ‘쥐도 잡아 죽인 학생회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러니 뭐든 믿고 맡기면 제 몫을 해낼 미더운 사람이라는 의미로 말하는 이가 있는 반면, 잘못 걸리면 쥐 잡듯 잡는 독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말하는 이도 있었다. 아무렴 어떠랴. 쥐만 안 나타나면 되지.       




대학을 나오고 사회에 자리를 잡은 다음 해였다. 한 선배와 함께 거리를 걷는 중에 쥐를 발견했다. 살이 퉁퉁하게 찐 전형적인 도시 쥐였다. 움직임도 느렸다. 어느 건물 앞에 머뭇거리듯 서 있었는데 발견하자마자 달려가 꼬리를 밟았다. 어떻게 잡아서 처리한다는 생각도 없이 본능적으로 움직인 거였다. 쥐가 몸을 빼내려고 좌우로 흔들었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덩치 큰 남자 선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그걸 왜 잡아?” 


일단 꼬리를 밟아서 도망 못 가게 잡아놓았으니 어떻게든 도와줄 줄 알았는데 왜 잡았느냐니. 어안이 벙벙했다. 


“당연히 잡아야죠!” 


사실 손에 별다른 도구도 없고 잡을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쥐의 몸부림이 더 격렬해지면서 꼬리가 떨어지려고 했다. 그걸 본 선배가 경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야아- 그냥 놔줘!” 


끔찍해서 더 이상은 못 보겠다는 말투였다. 거의 다 잡은 걸 놔줘야 하다니, 쩝. 발을 떼니 이미 꼬리가 너덜 해진 쥐가 자동차 밑으로 도망갔다. 물고기처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아까운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의 과도한 쥐잡기 교육에 세뇌된 탓이었다.     


두 번의 쥐잡기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은 쥐를 잡는 일이 누구나 흔하게 하는 행동은 아니며 더구나 사람 노릇을 하는데 꼭 필요한 일도 아니란 것이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사십 년이 넘는 세대차이가 존재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인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에는 ‘전국 쥐잡기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농림부가 추산한 우리나라의 쥐는 9천만 마리. 인구 1인당 세 마리, 한 집 평균 18마리 꼴이었다. 식구수가 여덟 명인 우리 집에는 24마리가 서식하는 셈이었다.




정부는 잡은 쥐의 꼬리를 학교나 관공서로 가져오면 쥐꼬리 하나 당 연필 한 자루씩 바꾸어 주거나 복금 당첨권을 주었다고 한다. 1972년 쥐띠 해에는 쥐잡기 열기가 더욱 높아져 학교는 쥐잡기 포스터 공모대회와 쥐 박멸 웅변대회를 열었고 표어도 공모했다. 거리에는 쥐잡기를 독려하는 구호가 담긴 포스터가 붙었다.


  



이후 1980년대까지 연 2회에 걸쳐 대대적인 쥐잡기 운동이 계속 진행되었다고 하니 평생을 농촌에서 산 아버지로선 쥐잡기가 봄에 밭을 갈고 고추 모종을 심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터. 다만 일제 치하에 태어나 전쟁과 보릿고개를 겪은 아버지의 ‘사람 노릇’과 휴대폰과 컴퓨터를 사용하는 밀레니엄 세대의 ‘사람 노릇’은 엄연히 다른 거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시대마다 변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사람 노릇을 가르쳐 주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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