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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y 27. 2020

이대론 못 보내! 죽어도 못 보내!

 눈 앞에서 펼쳐진 막장 드라마

곧잘 주변 지인들에게 말하곤 했다. 아이들만 성인이 되면 나도 독립할 거라고. 혼자 살면서 그간 출산과 양육으로 누리지 못한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겠노라고. 남편에게도 일찌감치 선언했었다.      


“둘째 스무 살 되면 떠날 거니까 나중에 나 잡지 마!”      


그리고 잊을만하면 그 얘기를 남편에게 꺼냈다.   

  

“재작년에 한 말 기억하지? 이제 5년 남았어.”     


하지만....

남편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여보, 우리 이혼하자. 나 사랑하는 사람 생겼어. 그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뭐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고 손이 치솟았다.

“미, 쳤, 써어?”

온몸의 중력을 실은 채 남편에게 따귀를 날렸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남편은 따귀를 맞고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뒤돌아서 초원에 펄럭이는 하얀 빨랫감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의 행동에는 네가 뭐라든 나는 간다는 초연함이 묻어났다.

언덕 너머에 한 여자와 나란히 누운 남편이 보였다. (안돼. 저 자리는 내 거야!)
흐윽.. 흐윽. 숨 쉬기가 힘들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인지 심장이 조여드는 통증 때문에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캄캄한 밤중. 이불을 덮은 채로 눈을 떴다. 꿈이었다. 여전히 심장이 쿵쾅거리고 호흡이 거칠었다. 씩씩거리던 숨이 잦아들자 의식이 명료해졌다. 그 순간 알았다. 그를 떠나기는커녕 붙잡을 사람이 나라는 걸. 평소 코골이가 심한 남편을 피해 맨날 거실에서 자면서 뭐가 저 자리는 내 거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꿈이었을지언정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는 건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 꿈을 꾼 이후 한동안은 남편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어디 그러기만 해 봐, 아주! 내가 그냥 확! 가긴 어딜 가? 절대 곱게 못 보내줘!!) 남편은 몰랐겠지만.


 

음...혼자 어디가? 그럼 못써.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오른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누군가 음료를 쏟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닥에는 정체 모를 음료와 얼음이 쏟아진 상태였고, 짧은 커트 머리에 수수한 원피스 차림의 중년 여성이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선글라스를 낀 다른 여자가 그 모습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짙은 립스틱을 바르고 골프복을 입은 50대 중후반의 여성이었다.


아래층에서 키 큰 아르바이트생이 올라오더니 바닥에 쏟아진 음료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뭐어? 그냥 몇, 번, 만, 났, 어, 요?”     


카페 안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정도로 격앙된 목소리였다. 그녀가 마주 앉은 여자의 멱살을 덥석 잡더니 흔들며 소리쳤다.      


“이게 어디서 임자 있는 남자를...”     


멱살을 잡힌 여자가 당황한 말투로 “어머, 어머 왜 이러세요?” 라며 말했지만 분노한 아주머니의 주먹은 풀리지 않았다. 누가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분위기상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힘도 없이 휘둘리던 여자가 몇 번 더 “어머, 어머” 하더니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자고 말했다.  

    

“그래 가자, 가! 경찰서로 가!!”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 대항도 못하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더니 계단쪽으로 끌고 갔다. 그제야 옆에서 음료를 치우던 아르바이트생이 두 명을 떼어놓기 위해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시종일관 폭력을 행사하던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분을 이기지 못해 머리채를 잡은 여자의 뒤통수를 퍽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두 명이 내려가고 나자 카페 안은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듯 고요해졌다. 옆자리에 앉은 청년이 한심하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참, 자기 남편한테 가서 그래야지...”      


이미 꿈속에서 남편에게 따귀를 날린 경험이 있는 나는, ‘벌써 남편과도 한바탕 했겠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현실의 이성적인 나는 욕도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평화주의자다. 어떤 문제든 폭력이 개입되어선 안 되고, 최대한 협의와 소통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사랑이나 이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막중한 책임으로 무장하고, 때론 자유를 억압하며 불평등한 사회적 역할을 기대하는 가부장적 결혼 제도를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딸아이들에게도 결혼은 선택이며 굳이 해야 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 꿈만 떠올리면...어느새 꿈속의 나로 돌아가 감정이 몰입되면서 이성이 실종되고 만다. (암, 때리길 잘했어. 지금껏 호강시켜 준 것도 없으면서! 가긴 어딜 가? 누구 호강시켜주려고 가겠다는 거야? 못가. 아무 데도 못 가. 갈 거면 해외여행 한 번은 보내주고 가던가. 남들 다 가는 해외여행도 한 번 못 가고 살았는데!! 이대론 못 보내!... 죽어도 못 보내~ 아무리 니가 날 밀쳐도, 끝까지 붙잡을 거야...feat. 죽어도 못 보내_2AM)


그래서 요즘 나의 관심사는 20주년 독립선언이 아니라 결혼 20주년 기념 여행으로 바뀌었다.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혼자 비행기값을 알아보고 숙소와 여행지 정보를 보러 다니며 설레발을 친다.


“뉴질랜드 어때? 응? 캠핑카 빌려서. 거기가 그렇게 아름답고 캠핑카 여행도 발달했대. 한 2년 바짝 모으고, 비행기 티켓은 카드로 긁으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늘 바쁘고 먼저 여행 계획이라곤 세워 본 적 없는 남편은 이렇다, 저렇다 대꾸가 없다. 학생운동하다 연애하고, 노동운동 시작할 때 결혼한 덕분에 신혼여행(쌀과 야채를 싸가서 밥 해먹었던)도 겨우 제주도 2박3일로 다녀왔으니 말해 무엇하리.  


“너무 멀어서 시간 빼기가 힘든가? 그렇지... 당신 혼자 운전하는 것도 힘들 테고. 그럼 동남아도 괜찮지. 네팔 포카라도 좋대. 뭐 베트남이나 태국도 괜찮고... (한 마디로 어디가 됐든 가야 한다는 얘기!)”



맛있는 건 같이 먹고, 좋은 데는 같이 가고, 알았쪄?


코로나 이후 글로벌이 아닌 로컬의 시대가 온다지만 그건 이미 떠나본 사람들 이야기고. 한국땅을 떠나본 적 없는 나는 그동안 미뤄둔 해외여행을 반드시 가야 한다는 집념같은 게 생기기 시작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눈코뜰새없이 일하는 남편은 해외여행이 사치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그 시간과 추억을 사는 비용이 아깝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가족이 죽을 때까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생기는 거니까.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꼭 가자,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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