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하고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훈육을 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자꾸 참견을 하게 된다. 마음으로는 '아이들의 삶에 과하게 끼어들지 말자' 하면서 그게 참 어렵다. 좀 더 나은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 잘못된 것은 바로 고쳐주지 않으면 버릇이 들까 걱정이 든다.
"그건 그렇게 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은 방법이야."
"시작을 그렇게 하면 아무리 해도 안 돼. 이렇게 시작하면 잘할 수 있어."
첫째인 딸은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요즘은 말을 잘 듣지 않지만, 어릴 때에는 아빠의 말을 곧 잘 들었다. 알려 주는 것은 잘 배워서 사용했다. 찾아와서 궁금한 것들을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얼마 전 딸에게 "어릴 때에는 이것저것 잘 물어보더니 요즘은 왜 잘 안 해?"라고 물어봤다. 딸은 "사실 그때도 아빠가 너무 자세히 알려주는 건 싫었는데, 알려줄 때 뭔가 포근한 느낌이 좋아서 자주 물어 본거야"라고 했다. 요즘은 좀 자세히 알려주려고 하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았어"라고 말한다. 그만 말하라는 것이다.
딸과는 다르게 아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무엇을 알려주려 하면 짜증을 냈다. 처음에는 '아, 이놈이 배우는 자세가 영 글러 먹었네.'라고 생각을 했다. 더 늦기 전에 태도를 좀 바꿔줘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혼을 내기도 했다. 그런데 잘 먹히지 않았다. 혼을 내도 수긍을 하고 알아듣는 느낌이 아니었다. 아들은 그냥 견디고 있었다. 그렇게 자란 아들은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요즘은 그나마 말을 조금 들어주는 듯하다. 선택적으로..
방과 후 아들과 축구를 자주 한다. 또래 친구들 중 축구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은 공을 곧잘 찼다. 아들은 배우는 것이 싫다고 학원은 안 간다고 했다. 제대로 배우지 않았으니 공을 잘 찰 리 만무했다. 발가락 끝으로만 공을 차는 아들에게 인사이드 킥을 알려주고 싶었다. 발 끝으로 그렇게 차다 보면 발가락을 다칠 것 같았다. 공을 정확하게 차지 못하니 똥볼을 자주 찼다.
"코 발로 차면 발가락도 다칠 수 있고, 정확하게 찰 수가 없어. 여기 부분으로 이렇게 차 봐. 그럼 넓고 딱딱한 부분으로 차니까 정확하게 찰 수 있어." 하며 발의 안쪽 부분으로 차는 것을 알려 줬다.
"난 이렇게 차는 게 좋아. 자꾸 알려주지 말고 얼른 공이나 차."라고 아들은 말했다.
순간 욱하는 것이 올라왔지만 참았다. 그렇게 아이가 차는 공은 계속 엉뚱한 곳으로 날라 갔다. 계속 공을 가지러 다녀오다 보니 인내심이 바닥이 났다.
"아빠가 알려주는 데로 안차니까 자꾸 공이 이상한 데로 가잖아." 짜증을 섞어 얘기했다.
"알았으니까 그만 말하라고. 왜 아빠가 시키는 데로만 차야 돼?" 아들은 이미 화가 나 있었다.
더 말을 했다가는 서로 기분이 상할 것 같아서 참았다. 그렇게 한동안 공을 차고 집으로 돌아왔다. 공을 찬 시간보다는 주우러 다녀온 시간이 더 많았다. 멀리 굴러간 공을 가지러 가는 건 몇 배는 더 재미없고 힘들었다. 걸어서 가지러 가면 또 화를 내기 때문에 열심히 달려야 했다.
그렇게 아이와 공을 차고 집에 돌아오면 오후 5시쯤 된다. 배가 고프지만 밥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다. 이때 적당한 간식을 조금 먹는다. 마땅한 간식이 없으면 라면을 오븐에 구워서 먹는다. 라면을 구우면 고소하고 맛있다. 양념이 많은 과자보다는 낫겠지 싶어서 자주 구워 먹는 편이다. 라면을 굽는 것은 간단하지만 조금 귀찮다. 중간에 한 번 뒤집어 줘야 하고, 방심하면 타버리기 때문에 오븐 앞에서 지키고 있어야 한다. 그날은 지쳐서 라면 굽기가 너무 귀찮았다. 아들을 불러 라면 굽는 방법을 전수했다.
"반이 쪼개지는 라면은 반을 자르고, 아닌 라면은 그냥 넣는다. 오븐의 그릴 버튼을 누르고, 3분 30초 굽는다. 그 후 뒤집고 3분을 더 굽는다. 라면을 꺼내서 30초 식힌다. 할 수 있어?"
"조금 복잡하긴 한데 할 수 있을 것 같아." 자기가 좋아하는 라면이라 그런지 똘망한 눈으로 잘 들었다.
부엌에서 나는 냄새와 들리는 소리를 보니 라면을 여러 번 태워 먹는 것 같았다. 내다보면 나보고 구워달라고 할 것 같아서 모른 척했다. 아들은 그날 라면을 잘 구워 먹었는지 어땠는지 말이 없었다. 라면을 여러 번 태우고 사고를 친 것에 대해 함구하고 싶었는 모양이었다. 나는 괜히 물어봤다가 다시 라면 굽는 담당이 될 것 같아서 모른 척했다. 우리는 암묵적 합의하에 그날은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아들은 혼자서 라면을 꽤 잘 구워 먹게 되었다. 그런데 구운 라면을 보니 항상 한쪽 면만 노릇하고 반대쪽은 잘 구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날은 내가 라면을 잘 구워서 다시 방법을 알려줘야겠다 싶었다. 라면을 반을 쪼개서 정성껏 양쪽면을 노릇하게 잘 구웠다. 만족스러웠다. 아들과 TV 게임을 같이하며 노릇하게 잘 구워진 라면을 먹었다.
"아빠가 구운 라면 어때?" '와'하는 소리를 기대했다.
"괜찮아. 이 정도면.." 아들이 김 빠지는 소리를 했다.
"라면을 이렇게 앞뒤로 노랗게 잘 구우려면, 그릴에 놓고 3분 30초, 뒤집은 다음 3분을 더 굽고 빼면 돼. 너무 늦게 꺼내면 늦으면 타버리고 일찍 꺼내면 한쪽이 잘 안 구워져." 자상하게 잘 알려줬다.
"어. 알았어." 아들은 순순히 대답했다. 잘 알아들은 느낌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게임을 끝내고 TV를 보고 있었다. 아들이 라면을 하나를 더 구워서 들고 왔다. 하나로는 조금 모자라던 차였는데 반가웠다. 라면을 척척 구워오는 것을 보니 기특했다. 근데 또 라면의 한쪽 면이 안 구워져 있었다. 한마디 하려다 참았다. 아들은 옆에서 TV를 잠시 보다가 말했다.
"아빠? 내가 왜 한쪽을 조금 덜 굽는지 알아?"
"응? 아니..." 뜨끔 했다.
"양쪽 다 노릇하게 구우면 너무 고소해져서, 스프 맛이 안 느껴져. 고소한 것 하고 스프 맛이 어울리려면 한쪽을 이렇게 좀 하얗게 구워야 해. 이 정도가 딱이야. 먹어봐." 아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먹어보니 아들의 말이 맞았다. 고소하면서 스프의 맛도 잘 살아서 좋았다. 아까 내가 구운 라면은 스프에 찍어 먹으면 맛이 덜 해서 그냥 라면만 먹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이런 심오한 원리를 깨달았다니 놀랐다. 그동안 라면을 태워 먹으면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나 보다. 귀찮아서 일을 넘기고 도망을 쳤더니, 라면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그걸 알아냈어?" 내가 물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면 돼. 아빠가 알려줬잖아." 일이 다시 넘어올 까 봐 한 말이었다.
"판을 밑으로 옮기고 처음에 3분 45초, 뒤집어서 4분 30초야." 아들이 말했다. 오븐은 판을 위아래로 옮길 수 있다.
아들이 구운 라면을 스프에 찍어 먹으면서 앞으로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방법이랍시고 알려줘 봐야 실패하지 않는 법 정도가 되는 것이었다. 아들에게 무엇을 알려 주면 화를 냈던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아이는 이미 실패를 통해 답을 찾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도 정해진 데로 사는 삶은 질색한다. 그것은 재미도 없을뿐더러 성취감도 없다.
축구공을 차는 것도 같은 과정인 것 같았다. 잘 차는 방법을 알려준답시고 앞에서 투정을 부릴 것이 아니었다. 답을 찾느라 열심히 시행착오를 하고 있는 아이에게 재빠르게 공을 주워다 나르는 것이 나의 일 인 것이었다. 아들이 멋진 감아차기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체력을 열심히 키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