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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성 Oct 07. 2024

기내 계급

자본주의 사회의 윤리적 딜레마


당신이 누군가에게 ‘비행기 태우지 말라’는 표현을 한 적 있었다면 그때를 기억해 보자. ‘비행기 태운다.’라는 표현은 누군가를 높이 추어올리는 관용구이다. 이런 표현이 생겨난 것은 물론 비행기가 대기 성층권에서 운행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너무 띄워주지 말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비행 자체가 우리에게 ‘긍정적 경험’을 준다는 가정 하에 지나치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때 겸손의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긍정적 경험을 제공하는 비행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윤리적 딜레마, 기내 계급이다.


비행기에 탑승할 때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이코노미, 비즈니스, 가능하다면 퍼스트클래스까지도. 이 구분은 단순히 좌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구조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재화를 통해 시장의 상품을 거래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자본주의에서 어떤 것까지 돈으로 거래할 수 있을지 윤리적 질문을 던져볼 것이다.


비행을 위해 지불한 금액에 따라 누군가는 편안한, 또 누군가는 짧은 비행시간 동안 허용 가능한 범위의 불편한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우리는 이를 당연한 원칙으로 받아들이며 기내 계급 체계는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합의를 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하늘 위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놀이공원에서 더 비싼 티켓을 구매하여 긴 줄을 건너뛰는 것, VIP 병실에서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 유료 도로로 교통 체증을 피하는 것. 이 외에도 우리는 돈으로 쉽게 시간과 편의를 구매한다. 문제는 이런 선택의 이면에 누군가는 기회비용을 잃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비행기 좌석이라는 단순한 편의성 문제를 떠나, 부의 불균형으로 인해 중요한 기회를 놓치게 되는 상황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격차를 만들고 더 나아가 불공정이 세습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편의와 시간을 살 수 있는 권리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까?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와 공정하고 균형 잡힌 사회를 만들기 위해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모든 이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할 수는 없더라도 기본적인 권리와 기회가 보장되는 시스템이다. 부의 양극화는 자본주의의 체제의 필연적인 부작용이다. 쉽지 않겠지만 정당한 보상 체계가 이뤄진 책임 있는 자본주의 체제만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으며, 이는 제도와 사회적 합의만이 만들 수 있다.


소득 분위에 따라 세금을 더 많이 내는 것이 성공한 이들에 대한 처벌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미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 불공정이 세습된 사회에서는 개인만의 의지로 소득 분위 계층을 넘어서 자수성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소득 분위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는 시스템을 문제 삼기보다, 일명 ‘관행’이라는 말로 세금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부 각 부처에서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점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파시즘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요소로 ‘낮은 교육 수준’ 유지가 있다. 교육은 사람들에게 비판적 사고를 체득하도록 하여 본인의 권리를 주장하도록 만든다. 교육은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상향 평준화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필수 요소이다. 평생 학습을 장려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여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넘어 더 나은 사회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국가가 충분히 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음에도 오로지 입시 제도에 맞춘 교육, 특정 직업군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을 유지하는 것은 국민이 ‘높은 교육 수준’을 평준화하기를 꺼리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집단보다는 개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고, 기꺼이 비즈니스 좌석을 구매하고, 돈을 더 지불해서 줄을 서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는 위선적인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보다 집단을 선택할 합의를 이룰 만큼 성장하지 못한 미성숙한 사회 체제만 경험했기 때문은 아닐까? 사회 발전과 이를 구축하며 생성되는 사회적 합의는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바꾸기 어렵고 제도적 차원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지금도 누군가는 당신이 기회비용을 잃는 만큼 이득을 얻고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시장은 윤리적 딜레마를 수반하는 새로운 상품들을 세상에 지겹도록 내놓고 있고, 그때마다 우리는 찬반 논란을 거듭하다 익숙해지곤 한다.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한 ‘동굴의 비유’는 사지가 결박되어 평생 동굴 안에 있는 죄수가 보는 세계는 동굴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비유한다. 동굴 안에 갇혀 있는 죄수들은 본인이 결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 자본주의 체제란 그런 것이다. 총체적 노동의 사회에서 우리를 형성하는 소비문화에 대해 먼저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문제의식을 느껴야만 우리는 새로운 이상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참조 : 조니 밀러 https://www.lensculture.com/projects/312230-unequal-sce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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