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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자선생 Oct 15. 2020

내 인생의 꿈은 날라리양성학교

 놀자선생이란 별칭의 탄생비화     


완벽하게 실패한 인생을 산 필자가 거짓말을 좀 보태서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자면, 필자는 일찌감치 노자선생을 존경하여 노자선생의 수하로 들어가 공부에 일로매진하기로 하였으나 몸이 근질근질하여 삼 년을 못 견디고 끝내 하산하겠다고 다짐하고는 작별 인사를 하는데 뭔가 허전하고도 섭섭한 마음이 든지라 노자선생께 “염치는 없으나 그래도 미운정고운정 들었는데 소생한테 호 하나 지어주면 안 될까요?” 여쭈니 노자선생 왈 “예끼, 니는 하란 공부는 안 하고 허구한 날 놀기만 했으니 정히 호를 지어주자면 ‘놀자’로 하여라” 하여 줄행랑쳐 내려왔는데 노자선생과 발음이 비슷하기도 하여 꽤 쓸 만하다 싶은데 기왕지사 표기도 비슷하게 하고 싶은 욕심이 꿈틀거려 문득 생각난 게 한자를 우리식으로 표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해서 나온 게 아래와 같은 한자 노(老)자와 을(乙=ㄹ)자를 합자하여 나온 놀자다.(이런 글씨가 당연히 없어서 그림으로 글자 만듦)

이런 표기는 모든 공문서를 한자로 표기하던 시절 돌쇠나 개똥이 등을 어떻게 표기할까 고심 끝에 나온 우리식의 한자 표기 방법이었다. 의병운동하였던 신돌석의 돌(乭)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한자이며 물(水)과 밭(田)을 합자하여 만든 논 답(畓) 자도 마찬가지이다.           




각설하여, 기왕에 놀기로 작심한 이상 쓰것게 한번 놀고 싶어서 만든 게 2010년도에 만든 놀자학교였다. 여기서는 말 그대로 공부가 아닌 노는 걸 배우는 학교다. 그래서 공부 잘하는 사람한테 상을 주는 학교가 아니라 <날라리상> <건달상> <한량상> <호모루덴스> 상을 만들어 잘 노는 사람한테 표창장을 준다. 가난하기 그지없는 학교라서 단기 학교밖에 운영을 못하는데 1차과정을 30시간에서 시작하여 2차과정은 76시간, 3차과정은 100시간 놀이활동을 하면 학교에서 규정한 자격을 부여한다. 노는데 무슨 놈의 자격이 필요하겠는가마는 학교나 복지센터 등에서 자원봉사나 재능기부 활동을 할 수 있는 요건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요즘에는 자원봉사도 아무나 안 시킨다. 놀이가 아직 직업이 되지 못한 시대이다 보니 대부분 경력단절 여성이라든가 현직에서 은퇴하여 뭐 재미있고 가치 있는 일이 없을까 찾다가 물어물어 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자칭 놀자선생은 거의 10년 동안 2천여 명의 제자들을 배출하였지만 ‘놀이배’가 여전히 고프다. 가진 건 없지만 꿈은 원대한 탓이다. 일제시대에는 독립군이 필요하였지만 불행한 이 시대에는 '놀이독립군'이 필요하단 생각에서다. 세계에서 놀이 결핍이 가장 심각한 우리 아이들은 행복도 조사에서 거의 꼴찌 수준이다. 자살률은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불행이 내일도 계속되는 걸 보고만 있다면 대한민국은 통째로 불행해질 것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공부와 일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먹고살만한데도 놀 줄을 몰라 여전히 불행한 그들을 치유하고 행복의 문을 함께 열어갈 ‘놀이전사’가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만들고자 하는 꿈은 일명 '날라리양성학교'다. 철저히 실패한 인생이지만 이걸 만든다면 아마 ‘성공인생’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날라리양성학교는 놀이정신을 구현할 호모루덴스를 교육, 양성하고자 한다. 작년에 유행했었던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불매운동은 한다’는 말을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놀이운동은 한다'로 바꿔 긍정마인드로 세상을 즐겁게 바꾸어 나가는 놀이전사를 길러내는 거 괜찮지 아니한가.      



우리는 먼저 날라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날라리는 공부하기 싫어하고 놀기만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이고 비하적인 이미지로 덧씌워져 있는데 날라리는 태평소, 호적, 새납의 다른 이름이다. 악기에서 나는 소리를 흉내 낸 말인 ‘날라리’는 마치 꽹과리나 북, 장구, 징소리와 비교하여 소리가 크고 눈에 띄게 까부는 사람을 말한다. 어느 학교에나 날라리가 있기 마련인데 이들은 평소에는 기를 못 펴고 살지만 운동회나 소풍을 가게 되면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파닥파닥 살아난다. 날라리 덕분에 운동회가 더 활기차고 소풍이 훨씬 즐거워진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날라리야말로 호모루덴스라는 게 입증되는 셈이다. 대체로 놀이와 연관된 명칭들은 부정적인 인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건달과 한량도 마찬가지다.      


건달이란 인도의 간다르바(Gandharva,乾達婆)신, 즉 고기도 술도 안 먹고 향만 먹고 산다는 음악의 신에서 온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슬만 먹고산다는 하얀 ‘수염도사’보다 몇 끗 위라 할 수 있겠다. 서양에서 들어온 뮤즈는 대우받는데 동양의 건달은 대우받지 못하여 빈주먹(白手)으로 방황하다 오늘날 백수건달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한량이란 말은 무관, 요즘으로 치면 직업군인이나 경찰이 되기 위해 무예를 연마하는 사람들인데 숭문천무(崇文賤武) 세상으로 바뀐 조선시대가 되면서 빈둥거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는데 잘 나가던 시절엔 무협지에 나온 바로 그 호반이다. 우리 춤에 한량무라고 있는데 아주 호방하고 멋있는 춤이다. 당시 유한계급에 속한 한량은 풍악이나 즐기면서 건들건들 놀았기에 부정적인 뜻으로 바뀌었다. 한량(武)과 대비되는 명칭은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文)인데  아마 누가에게나 고상하고 품격 있게 들릴 것이다.        


   

부정적이었던 날라리, 건달, 한량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서태지의 탄생으로부터다. 한 때는 힙합문화가 유행하면서 속옷이 보이는 '똥싼 바지'를 입고 다니는 청소년들을 보고 어른들은 세상이 망쪼들었다며 혀를 차기도 했지만 세상이 망하기는커녕 그것이 밑천이 되어 한류를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찧고 까불며 놀던 아이들은 세계비보이대회를 휩쓸어버리고 칠성파 BTS는 지구별 청소년들을 방탄부대(방탄소년단 아미)로 만들고 있다. 


21세기가 되고서야 날라리란 말이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이미 1960년대에 망나니로 비난받던 히피문화가 휩쓸기도 하였다. 미국의 날라리, 건달, 한량들은 기성의 사회통념이나 제도와 가치관을 부정하면서 반사회적이고 반체제적이기까지 하였으니 우리보다 한술 더 뜬 것이다. 미국 날라리들은 노랑, 빨강, 파랑 원색의 의상을 입고 덥수룩한 장발 머리에 꽃을 꽂고 샌프란시스코에 몰려들었다. 미국의 한량인 지식인이나 교수들은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평화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선동하였다. 프레디 머큐리가 존경했던 존 레넌은 필자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몽상가라고 말할지 몰라도 나 혼자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닌걸요. 언젠가 당신이 우리 생각에 동참하길 바래요. 그리고 세상은 하나가 되는 거예요.”      



대한민국 헌법 제9조 :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날라리양성학교에서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래하고 춤추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차별화되고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는 의식화(80년대 운동권에 유행했던)를 위해 놀이인문학을 교양필수과목으로 채택하여 정신무장(?)을 시키고 몸속에서 잠자고 있는 끼를 발휘할 수 있도록 날라리, 건달, 한량들을 고무하고 찬양할 것이다. 날라리 양성사업은 생뚱하지만 재미있고 엉뚱하지만 가장 멋있는 문화한국으로 세상을 바꾸는데 일익을 담당할 것이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잘 노는 선조들의 피를 이어받아 만들어진 '문화헌법'인 헌법정신을 구현하는 애국사업이기도 하다.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 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제대로 된 혁명』에서 로렌스가 한 말이다.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 내적 즐거움과 흥미가 동시에 수반되어야 놀이가 가능하듯 세상을 바꾸겠다는 혁명도 그런 관점에서 보았던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이 했던 말은 더 유명해졌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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