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단지 전구가 켜지지 않는 10,000가지 이유를 안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한 에디슨은 위대한 발명가로 성공을 거두었다.
“실패가 두려워서 아무 시도도 하지 않는다면 실패한 것이 없어도 삶 자체가 실패다.” 조안 K 롤랑은 해리포터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자신이 겪은 실패는 성공에 대한 중압감에서 벗어나게 해 준 귀중한 경험’이라고 말했던 스티브 잡스도 대성공을 이루었다. “나는 인생에서 거듭 실패를 계속해 왔다. 이것이 정확히 내가 성공한 이유다.”라고 한 미국의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도 마찬가지다.
이를 볼 때 내 인생은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완벽한 실패 자체다. 성공할 확률도 그다지 없다. 그래서 실패한 내 인생에 대해 변명이나 늘어놓으려고 한다. 필자에게도 어렸을 때는 성공한 경우가 꽤나 많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이 10% 안에 들기도 했었으며 친구들과 놀면서 승리의 쾌감을 맛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틀려도 돼, 망해도 돼, 놀려고 하는 건데 뭐가 문제야, 실패에 대해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재밌게 놀자는데 그까짓 규칙이 바뀌면 어때 순서가 뒤죽박죽이면 어때. 재미만 있으면 되었으며 두려움 없이 놀 수 있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성장하고 학년이 높아지면서 이 세상은 성공과 실패라는 것으로 구분 지어졌으며 실패한 경우 어떤 때는 그에 대한 벌칙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더 이상 세상을 논다는 개념으로 살아서는 안 될 성싶었다.
실패로 점철된 내 인생에 대해 조금 부연을 하자면 필자는 대학에 들어가서 가난 때문에 생긴 태생적인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왜냐면 명문대가 아닐지언정 대학이라면 그래도 선택받은 계층에 속한다는 느낌이 있었으며 학생운동을 하면서는 어떤 부나 지위 따위에 연연하는 거 자체가 찌질해 보였기 때문이다.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뒤엎어야 한다는 혁명가 기질은 필자에게 열등감 대신에 자부심과 긍지를 안겨주기까지 하였다. 산전수전 겪으며 천신 만고 끝에 사회에 나오니 문제가 달라졌다. 딱히 특별한 재주가 없는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그럼에도 마음속에 담아둔 청춘시절 그 꿈만은 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 일이나 할 수 없었다.
필자는 다큐 감독이 되기 위해 카메라를 어깨에 매 보기도 하였고 학창 시절 꿈이었던 문학도가 되어볼까 하여 뒤늦게 펜을 잡아보기도 하였지만 카메라는 어깨가 아팠고 연필은 가벼운 대신에 머리가 아팠다. 필자가 이런 변명을 하고 있는 동안 운동권은 사분오열되어 갔고 그중 성공한 경우로 평가받는 사람들은 시민운동이나 정치권으로 들어간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빚만 잔뜩 지고 난 후 망연자실한 필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빚질 능력도 없었기에 무망 한 거 같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찾아보았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데 ‘어차피 실패했는데 밑질 것 없잖아?’라는 심정과 허황된 망상으로 선택한 게 필자의 현재 직업이다. 다른 친구들 공부할 때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며 놀아봤기에 놀이에 대해서는 나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이가 직업으로 되기에는 요원한 세상이기에 아직은 아니 앞으로도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일 거라는 것이다.
필자처럼 실패한 인생들은 성공한 사람들을 찾아보고 그런 사례를 책으로 만든 소위 자기 계발서들을 많이 보는 거 같았다. 실패하고자 작정하고 있는 건 아닌데 필자는 그런 책들을 한 권도 보지 않았다. 왜냐면 스토리가 뻔할 거 같고 어지간히 독한 맘먹고 덤벼들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의 성공을 위해 나같이 실패한 사람이 책 한 권 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더 솔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튼 그렇게까지 아등바등 살고 싶지는 않다. 정녕 대충 살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은가.
거꾸로 실패에 대해 찾아보아도 꽤 많은 사례들이 나온다. 심지어는 국가 차원에서 실패를 찬양하는 나라도 있다. 우리와는 아주 먼 거리에 있는 아이슬란드는 ‘실패는 비난할 일이 아니라 권장사항’이라며 “행복은 실패”라는 얼토당토않는 말을 한다. 실패를 찬양하는 아이슬란드는 일 년 내내 축제가 이어진다는 게 가장 맘에 들었다. 내키는 대로 노래하고 멋대로 글을 쓰고 맘대로 그림을 그리는 자유분방함은 필자가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엉터리 작품도 많다는데 그러면 좀 어때, 그들이 재미있고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닌가. 국민의 10명 중 6명이 음악가이고 10명 중 1명이 작가이기에 인구 대비 저술가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필자가 장난 삼아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는데 덜커덩 되어서 이거 엉터리 아냐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이슬란드는 아마 더 심한 모양이다. 좌우지간 개발새발 필자 같은 사람도 작가라는데 일단은 작가 층을 넓히는데 일조한 거 같아 반갑고 즐거운 일이다.
대한민국은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나라 같다. 설사 실패를 허용한다 해도 한번 실패하면 ‘이생망’이 되기 때문에 실패하면 안 된다. 대한민국에서 실패하려면 성공을 담보한 실패 라야 한다. 《행복의 지도》를 쓴 에릭 와이너가 얘기하였듯이 아이슬란드와 달리 다른 나라에서 실패해도 좋다는 건 결말이 성공이었을 때다. 그때의 실패는 성공을 더 멋지게 장식해주는 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신춘문예 30년 동안 실패. 결혼 10년 만에 파경. 71일간의 아이슬란드 히치하이킹 여행기 원고를 32곳에서 퇴짜 맞고 33번째 출판사에서 출간한 강은경의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도 이런 실패들이 그의 성공을 더 빛나게 만들고 있잖은가. 물론 강은경 작가를 성공한 작가라고 말할 판단 기준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름 석 자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면 성공한 인생으로 보기 때문에 하는 얘기다.
일본에서 유명한 ‘실패학 강의’나 혼다의 ‘올해의 실패왕’, 삼성 에버랜드의 ‘실패파티’도 모두 성공을 염두에 두고 비용을 투자하는 것이다. 미국의 사무엘 웨스트가 기획한 실패박물관(Museum of Failure)도 매한가지다. 이런 건 오로지 성공만을 쫓아야 한다는 강박감을 해소해주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한다는 측면에서 일단 환영할만하다. 톨스토이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각의 이유가 있다"고 하였듯이 어느 사회에서나 성공스토리는 기승전 성공으로 거의 비슷비슷하다. 실패한 것들에는 우리가 모르는 너무나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을 수 있다. 실패스토리까지 들어줘야 할 사회적 비용이나 여유가 없기 때문이겠지만 성공과 실패라는 구분선으로 따져본다면 국민 대다수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데 필자도 해당되기에 변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미국 미시간 주의 <실패한 상품 박물관>에는 13만여 개의 상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신제품의 90%가 실패한 것이라고 한다. 고작 10%의 성공한 제품들이 회사를 먹여 살리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 10%에 주목하고 싶다. 우리 사회에서도 대략 수치로 따지면 국민의 10% 정도는 성공한 인생이고 나머지 90% 정도는 실패한 인생이거나 10%에 진입하기 위한 ‘노력인생’이지 않겠나 싶다. 그 10%는 ‘강남 똘똘한 한 채’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정도는 되어야 ‘성공인생’으로 보지 아닐까 한다. 앞서 얘기한 운동권 사람들도 대략 10%는 소위 강남권에 진입하였다. 재산이나 수입으로 따져서 자존심 상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작가, 예술인들의 상황을 보면 더욱 암담해진다. 5년 전인 2015년 국세청 통계자료에 의하면 배우 1만 5천여 명 중 수입 상위 10%의 배우들은 연 평균 3억 6천여만 원을 벌었는데 이 금액은 배우 전체 수입의 86%에 해당된다. 상위 10%를 제외한 나머지 90%의 배우들은 연 평균 7백만 원이니 월수입으로 계산하면 58만 원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만사 제쳐놓고 실패를 딛고 어떻게든 성공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토록 극심한 불평등 구조에서는 도무지 실패를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는 게 현실이다. 아이슬란드가 실패를 용인할 수 있는 건 쫄딱 망해도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는 사회복지 시스템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담 우리 모두 10%에 들기 위해 오늘부터 무진 노력이라도 하면 가능할까?
필자는 결코 모두 다 성공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개미는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면 되고 베짱이는 베짱이답게 열심히 노래하는 그런 세상이길 바란다. 개미가 허리가 휘도록 일할 때 베짱이가 놀았다고 하여 굶어 죽었다거나 멸종되었다는 소식이 아직까지 없는 거 보면 아마 여기에 해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 홋카이도 대학 사카가미 교수는 흥미로운 ‘개미이론’을 내놨는데 그렇게 부지런하다는 개미들의 하루 근로 시간은 고작해야 6시간 정도이며, 또 모든 개미가 하루 6시간씩 일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먹이를 얻기 위해 진짜로 일하는 개미는 오직 20%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전체 개미 식구 중 50% 이상은 하루 종일 빈둥대며 놀기만 하며, 나머지 20%도 그저 분주히 ‘왔다갔다’만 할 뿐이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20%에 해당되는 일하는 개미만을 따로 뽑아 새로운 집단을 구성해 보아도 역시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치열한 전투 등으로 일하는 개미들이 죽게 되면, 그동안 놀던 개미 중 일부가 그 20% 자리를 자발적으로 채운다는 사실이다. 갑자기 동료들이 줄어들자 위기의식을 느낀 개미들이 자신들의 존속을 위하여 일꾼으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노는 걸 직업으로 하는 필자도 이런 상황이 온다면 기꺼이 열심히 일할 각오가 되어 있다. 평생 일만 하는 줄 알았던 개미세상이야말로 진정한 호모루덴스 아니 앤트루덴스 사회 아닌가.
게으르고 나태하고 대충 살아가는 실패한 내 인생을 변명하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솔직히 인간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말 그대로 성공한 10%에 모두를 몰아주는 그런 게임이 아니라 나머지 90%도 최소한 굶어 죽지 않는 시스템이라면 우리 사회가 좀 더 즐거워지고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모두의 인생은 소중하다. 어차피 모두가 성공할 수 없는 시스템이라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멋지게 실패했는지, 얼마나 다르게 실패했는지를 통해 각각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드러내도록 하면 어떨까. 이 시대의 가장 절실한 키워드는 ‘나다움'이 아닐까 생각된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는 BTS가 "당신의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라고 요청하지만 선뜻 나설 수가 없다. 나의 이름과 나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변명이라도 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필요하다. 혹시 우리는 너무 쓸데없이 부지런하고 너무 쓸데없이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게으를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실패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회는 과연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