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가난한 인력거꾼 김첨지의 하루를 통해 식민지 시대 조선인의 가난과 울분을 토로한 한국 초기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다. 필자는 유년시절 매우 가난하였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어쩜 이 시대에 가장 행운을 타고 난 게 아닌가 싶어 운수 좋은 날 대신에 ‘운수 좋은 나’를 몇 자 쓰고자 한다.
나는 첩첩산중 초라한 초가집에서 눈이 펑펑 쏟아지던 한 겨울, 섣달 초사흗날 밤에 태어났다. 고 식구들한테 전해 들었다. 지금은 모두 생년월일을 양력으로 쓰지만 필자가 태어날 당시에는 모두 음력을 사용하였고 당연히 생일도 음력으로 쇠었다. 어머니께 태어난 시를 물으면 자시라고 하였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혹시 밤 12시가 넘었다면 사흗날이 아니라 내 생일은 나흗날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다. 나의 인생은 출생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하였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설을 쇠었으니 백일도 안 지난 갓난아이가 한 살을 먼저 먹게 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같은 나이 친구들보다 체구는 작았지만 노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정작 내 인생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건 학교에 들어가는 해부터였다. 동네 친구들이 나만 덜렁 빼놓고는 다들 입학을 한 것이다. 나이는 여덟 살이지만 애먼 살을 먹어 아직 어리니 먼 길을 걸어 다닐 수 없다고 집에서 학교를 안 보낸 것이다. 나는 몇 날 며칠을 울고불고 난리 쳐봤지만 소용없이 아이들은 재잘대며 책보를 등에 매고 영희와 철수를 읽으며 희희낙락 댔다. 당시엔 제대로 못 먹어 키가 당최 크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던 거 같다. 그 이듬해 학교에 들어갔는데 어울려 다닐 동네 친구가 없었고 타 동네 아이들과 학교가 무서워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학교 가는 게 싫어져 적응하지 못하고 3학년 때까지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중학교 들어가면서 안 사실이지만 호적이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내 나이가 2년이나 늦게 호적에 올라있다는 걸 알고는 한숨이 나왔다. 그러니까 국민학교에 들어가려던 해의 주민등록 나이는 만 5살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터무니없는 사건인가. 호적 나이가 어려서 덕 본 건 체력장에서 만점 맞은 거 딱 하나뿐이었다. 좌우간 시골에서는 두 살이 아니라 심지어는 사오 년씩 늦게 호적에 실린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건 면사무소가 먼 까닭에 동네에서 그 해에 태어난 아이들을 모아서 이듬해 봄이 되면 글깨나 아는 사람이 가서 한꺼번에 출생신고를 하였기 때문이었고 당시까지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는 아이들도 있다 보니 키워보다가 살만하면 호적에 올리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이름이 제대로 실리면 다행이다. 어떤 친구 놈은 누나하고 생년월일이 바뀐 경우도 있었고 어떤 여자아이들은 이름이 고마나 막동이로 실린 경우도 있었다. 분명 부탁하면서 작명한 이름을 알려줬다는데 나중에 들린 소문으로는 면사무소 가다가 술 한 잔 마시고 잊어버렸다고 하였다. 문명하고는 거리가 먼 대한민국의 두메산골은 그랬다.
두메산골 깡촌에서 태어난 나는 늘 스스로를 원망하였다. 왜 이토록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을까. 왜 너른 들판이 있는 곳이 아닌 사방이 산으로 콱 막힌 곳에서 태어났을까. 그래서 나는 늘 꿈꾸었다. 어떻게 하면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반짝이는 도시로 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도시 아이들처럼 세련된 옷을 입고 폼 나게 도시 거리를 활보할 수 있을까. 그 꿈은 십수 년 뒤 고등학교를 광주로 진학하면서 이루어졌다. 그치만 1학년 때부터 그놈의 입시타령에 가슴 부풀었던 설레임은 금세 주눅이 들고 말았다.
여튼 그 뒤로 대낮 같은 불빛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않은, 그토록 꿈꿔왔던 도시생활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나에게는 중학교 졸업 타도록 호롱불 아래서 공부하였던 게 가장 큰 행운이 아니었나 싶다. 시골살이라는 게 대여섯 명 되는 식구들이 큰방에서 함께 밥 먹고 함께 잠자는데, 날이 어두워지면 호롱불 하나 밝혀놓고 엄마는 바느질을 하였고 나는 숙제라도 할라치면 심지를 키워 달라 하였는데 그런 날이면 콧구멍에 까만 시껌정이 생기기도 하였다. 언제부턴가 공부해야 한다고 호야라는 남포(램프) 등을 켜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였는데 호야는 나 같은 꼬맹이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 동네 어느 집에 초상이 났다든가 결혼식 등 대사가 있을 때나 쓰는 물건이었는데 석유를 많이 잡아먹는 고비용 점화 기구였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시절 내내 어머니께서는 아침이면 늘 숯불을 넣은 둥그렇게 생긴 다리미로 까만 교복을 칼날이 서도록 다려주셨다.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하면 짠해질 뿐이다. 나는 이렇게 전근대의 끄트머리를 누려본 마지막 세대였다.
생일이면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 장독대에 엎어져 있는 가장 작은 꼬마 시루에 생일 떡을 해주셨는데 동무들을 모두 불러 모아 나눠먹게 하였다. 그럴 때면 괜히 마음이 뿌듯해지고 얼마나 생색내고 싶었는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어른들은 친구를 동무라고 부르던 시대였다. 한 번은 개울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는데 막고 푸든가 아니면 맨손잡기 중 하나였다. 특별한 도구랄 게 없는데도 용케도 바께스에 물고기를 솔찬히 잡아왔다. 그중 또렷하게 기억되는 거 하나를 소개하면 어는 날 동네 형이 때죽나무를 꺾어서 돌멩이로 짓이기더니 그걸 칡넝쿨로 돌돌 싸매서는 개울 둠벙에 던지는 것이었다. 금세 뽀글뽀글 거품이 올라오고 물고기들이 뜨는데 참으로 신기하였다. 이와 똑같은 모습을 수십 년 뒤 어느 다큐에서 보고는 깜짝 놀랐다. 우리와 똑같은 방법으로 아마존의 원시부족이 침보나무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필자는 원시부족이나 다름없이 살았던 것이다. 겨울이면 만날 허탕 치면서도 토끼사냥을 나갔고 봄이 되면 누구랄 것 없이 영양부족으로 버짐이 피어오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얘기 같지만 불과 얼마 안 된, 개발에서 한참 뒷전에 밀린 전라도 노령산맥 따라 어드메쯤 산꼴짝 이야기다.
가난과 빈곤의 상징이었고 당시엔 그토록 싫었던 호롱불. 봄이 되면 돌아와 지지배배 새끼를 친 제비 새끼를 집을 지켜준다는 뱀이 잡아먹던 초가집. 농촌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는 게 유일한 꿈이었던 유년시절.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었던 것들이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조각조각 추억으로만 남아 있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급속하게 개발되고 광속으로 발전된 오늘, 지금은 되돌아가고픈 전근대의 기억이 내 몸과 내 머리가 오롯이 기억하고 있다는 건, 어쩜 가장 큰 행운이지도 모르겠다. 호롱불로 어둠을 밝히던 원시적인 삶에서 최첨단 스마트폰 시대까지 살아 본 어쩜 이 세상에서 가장
‘운수 좋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