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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수 Oct 03. 2023

외할머니의 장례식

외할머니가 9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한 병실에 12명이나 노인들이 다닥 다닥 붙어있어 고려장(혹은 시체 안치소)를 연상시키는 요양원에 거의10년간 계시다가 차츰 기억을 잃고, 또 말을 잃고, 또 숨을 잃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에는 큰 애석함이 없다. 너무 오래 요양원에 계셨고, 코로나 시기 3년간은 요양원에 뵈러 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 했다. 할머니가 급격히 안좋아진 것은 그나마 띄엄 띄엄 보던 가족들이 아예 나타나지 않고 부터이다. 할머니의 인지상태로는 코로나가 무엇인지 몰랐을 거고, 아마 그렇게 외롭게 있다가, 살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코로나가 방문 금지가 해제되고 첫번째 설날과 추석을 지내고 할머니는 숨을 거두었다. 



할머니는 근 100년을 살아내며 한국의 근현대사를 겪어 내었지만, 정작 가족이 분열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인생은 그에게 모질기만 했다. 그래서 그도 모질었다. 할머니는 성질이 불같았고 자식들을 혼내고 때렸고 손자, 손녀도 그렇게 키웠다. 할머니 인생에는 3명의 남자가 있었으나 하나같이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이었다. 진주에 부유한 동네 유지의 첫째딸로 태어났으나 정신대를 끌려가지 않으려고 동네의 중학생과 결혼했고 첫날밤도 못치르고 그 꼬마 신랑은 전쟁에 끌려갔고 죽었다. 그 사이 625가 터져서 세간살이만 챙겨 그 머슴 부리던 큰 집을 버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전포동 피난민 촌인 달동네에서 폐병환자 강씨를 만나 첫째를 낳았으나 강씨는 금방 죽고 만다. 다행히 강씨가 세를 내 줄 수 있는 작은 집을 남겨주어 세를 내며 살고 있었는데, 그 동네 남자들이 과부인 할머니 집에 그렇게 기웃거리고 처들어갔다고 한다. 이렇게 위협받고 살바엔 복덕방 이씨 와 사는게 낫겠다 싶어 결혼했으나, 총각행세를 한 이씨는 알고보니 울산에 8남매를 키우는 본처가 있는 기혼자였다. 할머니는 그의 둘째부인으로 엄마와 셋째 외삼촌을 낳았는데, 엄마는 서자인 자신의 삶을 늘 비관적으로 바라 보았고, 그게 엄마의 길고 긴 우울증의 시작이다. 이씨에게 강씨의 집까지 뺏기고 할머니는 집 한 칸 얻어 전포동에서 분식집을 하며 근근히 성이 다른 자식 세명을 키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자 내가 든 생각은, 보고싶지 않은 사람들을 또 억지로 봐야하겠구나 하는 짜증과 우울함이었다. 외가는 거의 풍비박산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콩가루 집안이다. 없는 살림에 아버지가 다른 세 남매를 키웠던 할머니는 늘 화가 나 있었고, 자식들에게 살갑지 않았다. 첫째는 첫째대로, 둘째인 엄마는 엄마대로, 셋째인 작은 외삼촌은 작은 외삼촌 대로 자신만의 이유로 할머니를 멀리 했다. 할머니와 같이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요양원 들어가기 전 작은 외삼촌 집에 몇년 살았는데, 얼마나 그 일이 지긋지긋했던지 그 집의 사촌 여동생 둘이 모두 이민을 떠났고 지금은 한국에 없다. 물론 장례식에도 안온다.지금 그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첫째 큰외삼촌도 아예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다. 나를 찾을 생각하지말라고 연락을 끊어버렸다. 할머니가 대학생까지 키웠던 큰외삼촌댁내 사촌 오빠, 언니도 물론 소식이 없다.



나는 이 모든 인물을 보는 것이 버겁지만 그 중 큰외삼촌댁의 사촌오빠를 볼까봐 두려웠다. 그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일때 나를 성추행했다. 나는 이 일을 식구와 친척,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가족중 누구도 신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엄마한테 말해도,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평생 묻고 갈려고 했는데, 내가 20대 중반일때, 셋째 외숙모가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은 이민을 간 그 두 딸래미들도 그에게 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당했냐고 물어봤다. 걔들도 그때 말했던 걸 보면, 다들 비슷한 처지 였던 것 같다. 나는 엄마에게 성추행 당한 사실을 고백했지만, 혹시나가 역시나 처럼 엄마는 무심하고 무력했다. 



하여튼 그 사촌오빠가 장례식장에 나타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머리속으로 여러가지 상상을 했다. 1) '너 옛날에 나 성추행했지?' 다짜고짜 소리지르기: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될 가능성 이 높다. 2) 그의 가족(특히 자식)들에게 '너희 아버지가 성추행범이라는 거 모르지?' 라고 말하기 : 애들이 무슨 죄인가. 3) 밥먹고 있는 그의 뒤통수를 맥주병으로 치기 : 나는 경찰서에 끌려가고 징계를 받겠지.



이런 상상, 저런 상상 하는 와중에 첫째 외삼촌이 안온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나 힘들게 살고 있으니까,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도 업보인지. 아무튼 한시름은 덜었다. 



상주는 첫째를 제외하고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와 내 남동생, 그리고 작은 외삼촌과 외숙모 , 총 6명이다. 모두 사이가 좋지 않다. 나와 내 동생은 서로 말을 안하고 지낸지 5년이 넘었고, 외삼촌과 외숙모도 이혼을 하니 마니 늘 불화가 많았으며, 우리 엄마 아빠는 말할것도 없다. 나는 아빠와도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낸다. 외삼촌과 엄마도 오랜 할머니 요양 시기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으며, 엄마와 외숙모도 말 안한지 몇년되었다. 이 사람들이 장례식을 이유로 다같이 모였다. 



크고작은 불화가 생겼다. 외삼촌을 조금이라도 비용을 아끼려고 도우미를 쓰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나와 내 동생이 도우미 노릇을 해야한다. 음식을 마트에서 사와야 한다. 15년동안 보관료 35만원을 내는 납골당(시에서 운영해서 저렴한 것 같다.) 비용을 내기 싫어서 화장 후 외할머니 친정이 있는 진주 선산에 (문중 몰래) 뿌리기로 했다. 아빠는 외삼촌 뒤에서 시에서 운영하는 장례식장을 '천민 빈소'라고 흉을 봤다. 외삼촌은 무슨 의도인지 상주 리스트에 외할아버지의 첫째부인 자식 8남매를 상주로 올려서 아빠와 싸웠다. 아빠가 싸운 이유는 '자신의 장모가 첩(둘째부인)이라는 것을 자기 친구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없으며 자신의 얼굴이 서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여러가지 불화중에서 가장 추한 싸움이었다. 결국 아빠가 이겨서 상주는 엄마와 외삼촌 만 올라가게 되었다. 



이 싸움 과정에서 나는 무력하기만 했다. 어릴때 처럼 유체이탈을 한다. 내가 외국 정착을 셋째 외삼촌 딸들 처럼 성공했었더라면. 아쉬움과 후회가 진하게 든다. 이 자리를 간절하게 떠나고만 싶다. 아니, 이 사람들을 아예 보지 못하도록, 다른 나라에 정착했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일주일에 한번씩 받는 줌 코칭상담이 있었다. 장례식장에 대어진 내 차에 앉아서 줌을 켜고 코칭 상담사에게 내 짜증을 쏟아냈다. 참고로 코칭 상담은 과거 트라우마나 원가족에 관한 치료 상담이 아니라, 미래 커리어에 좀 더 집중하는 상담이다. 진로때문에 고민하던 나는 오늘 있었던 장례식에서 느꼈던 혐오의 감정을 쏟아냈고 그러다가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한 이유를 말했다. 지긋지긋한 한국을 떠버리고 싶어서 외국어 (영어)를 선택했고, 부모와 가장 빠르게 이별하기 위해서 교직을 선택했다. 



상담사는 내가 직업을 선택할 때 진정 무엇을 하길 원하는 가를 생각하지 않고 회피가 주 목적으로 직업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런데 진정 원하는 것을 하는 한국인은 얼마나 많은지? 아무튼 다음 진로 선택에 있어서 회피보다는 원해서 하는 이유가 더 커야한다고 한다. 



두가지 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했다. 학교 상담 전공 대학원과 영화 수업이다. 상담사 말로는 둘다 내면을 탐색하는 작업들이라고 한다. 좋은 상담사나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외부와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내면과도 잘 소통해야한다고 한다. 내 특성을 잘 인지하고 인정해야한다고 했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나의 특성 중 하나가 나의 예민성이다. 내 예민함은 항상 부정되어왔고, 필요없는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약 상담이나 예술을 하려면 그 특성은 매우 중요한 무기가 될 것이다. 



또한 나의 창의성도 중요한 특성이다. 나는 교직에 있으면서 수업을 할때 제일 보람차다. 왜냐하면 수업에서 내 창의성을 발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창의적인 결과물을 내는 평가를 할때 너무 신난다.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 그 외는 다 내 영혼이 훼손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생기부를 쓰는 일은 거짓된 글을 작성해서 내 영혼을 훼손한다. 진정성 없는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지 잘 모를거다. 내 교육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학부모와 관리자를 만날때도 화가 난다. 수업과 관련없는 행정업무도 나를 화나게 한다. 



상담사와 나의 강점을 적어오는 것을 다음 과제로 정하고 다음주에 만나기로 했다. 이번이 3/6회기 이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이것이 어떤 과정의 빌드업이라는 것을 알기때문에, 나는 이 과정을 성실히 수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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