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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수 May 26. 2022

여행기 1


내가 여행에 대한 꿈을 꾸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아마도 초등학교때 처음으로 내 방을 만들어준 엄마가 내 방 벽에 세계지도를 붙여주고 난 뒤부터 일 것이다. 재밌게도 엄마는 내 방엔 세계지도를, 내 남동생 방에는 한국 지도를 붙여주었는데 그게 우리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아순시온, 지부티 같은 도시의 이름을 혀로 요리조리 굴려보았다. 교과서 중 가장 좋아한 것도 사회과 부도였다. 매년 초 새교과서 꾸러미를 받으면 사회과 부도부터 펼쳐놓고 인구와 종교, 문화와 전쟁 역사를 남김없이 싹싹 읽곤 했다.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세계사를 단연 가장 좋아했고 잘했다. 내가 영어를 전공하고자 한 이유도 세계를 여행하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하고싶은 욕망이 컸기 때문이다. 영어를 전공하고 난 뒤에도 교사가 되기로 선택한 이유 또한 방학이라는 긴 시간에 충분히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23살에 교사가 되었고 그 후 한 해도 빠짐없어 겨울방학마다 외국을 여행했다.



네팔가기전 태국 경유...공항에서 노숙






내가 처음 여행한 곳은 네팔과 태국이었다. 겨울방학은 한 달 정도였고, 아직 여행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라 한달 안에 네팔과 인도 그리고 태국을 찍고 오는 대장정을 계획했다. 2007년에는 경유(스탑오버)제도가 훨씬 유연해서 경유지를 인도로, 태국으로 고를 수도 있고 시간도 유연하게 잡을 수 있었다. 그 당시 나보다 더 여행에 빠삭했던 대학원생 친구와 왕복 비행기표 하나, 첫날 스마트폰도 없이 이메일로 숙소 하나를 잡고 무작정 길을 떠났다. 공중에서 산과 물을 넘어 도착한 카트만두의 첫 숙소에는 내가 태어났을 시절 덮던 밍크 담요가 침대 위에 하나씩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것 외에 난방이 되지 않는 그 방은 하룻밤에 한화 3천원짜리 방이었다. 24살 신규 교사와 대학원생은 카트만두에서 사원을 가고 시장을 가고 히말라야 산행객들이 모이는 힙스터 클럽에 가고 거기서 현지인들 집에 초대받아 지금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숙박들을 감행했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대마초를 피고 가난한 남자와 미래를 약속하며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어떤 인도 남자와 셋이서 포카라라는 곳을 같이 여행했는데 그 때 마침 국가비상사태가 터졌다. 국왕을 살해한 쿠테타가 터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육로가 모두 막히고 공항도 폐쇄가 되었다.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차를 모두 세워 게릴라가 강도짓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갈 나라가 두 나라나 남았다. 카트만두로 가는 야간 버스에 겨우 탑승할 수 있었다. 마침 딱 두자리만 남는다 하여 어떻게든 자리를 확보했다. 그 버스는 밤 11시에 출발하여 새벽 6시에 도착하는 야간 불법 버스로 다마스만한 크기에 10명의 사람이 욱여들어가(마치 티코에 얼마나 많이 사람이 더 들어가는가 하는 티비 쇼를 생각나게 했다.) 히말라야를 가로지르는 국도를 달린다. 그 여행의 압권은 헤드라이트를 끄고 달리는 것이다. 갑자기 달려드는 도적떼 때문이란다. 그런데 8000미터 고도의 히말라야 1차선 국도에는 가드레일이 없다. 운전사가 조금만 실수하면 우리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24살의 나는 태연하게 코를 골다가 동이 틀 때 즘에 내려 친구집에 가서 골아 떨어졌다. 그리고 안전하게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네팔에 일주일동안 여행하기로 계획했으나 너무 재밌어서 3주를 눌러앉았다. 인도로 가는 계획은 취소했다. 마지막 일주일을 불태우기 위해 태국으로 갔다.




미래를 약속했던 프러빈. 이날 나에게 잘 보이려고 젤을 잔뜩 뿌리고 나왔다.


인도인네 집


춥고 더러웠던 네팔의 거리들과 달리 태국은 덥고 깨끗했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여행객들이 있었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더 자주 보였다. 방콕은 국제적인 미래도시 같았다. 재료가 단순하고 비위생적이었던 네팔의 음식들에 비해 태국 음식들은 정말 다채롭고 맛있었다. 매일 매일이 축제였다. 대학원생 친구가 계획했던 스쿠버다이빙을 하기 위해 코끼리섬이라는 곳에 갔고 거기서 낮에는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고 밤에는 남자들을 만나고 밤새 해변에서 춤을 추다가 도둑을 만나 그 놈을 잡기위해 뛰고 그러다가 노상에서 눈을 떴다. 하루하루가 그저 자유였다. 태국에서 일주일은 너무 짧았고 그 후 나는 오늘날까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태국병을 앓고 있다. 개학을 하루 앞두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자유를 포기하고 집에 간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느꼈다.



매일매일이 이런 생활...어떻게 이걸 놔두고 그 추운 한국으로...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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