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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lnoc Oct 24. 2018

한국 전쟁 고아들의 이야기, 영화<폴란드로 간 아이들>

사랑이라는 마음이 지금의 인류를 있게 했다고

폴란드로 간 아이들 (The Children Gone to Poland, 2018)

브런치 무비패스 #10

감독 추상미

주연 추상미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포스터

영화를 보기 전 포스터와 제목만 보고는 휴머니즘을 주제로 한 외국영화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배우 추상미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한국 전쟁 고아 1500명이 비밀스럽게 폴란드로 보내진다

영화의 감독이자 주연인 추상미 배우는 한국 전쟁 중 북한 고아 1500명이 폴란드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아이들이 머물던 폴란드를 찾아가 지나간 이야기를 조금씩 더듬어본다. 추상미와 함께 탈북한 소녀인 '송이'가 동행한다.


그 곳에서 추상미는 당시 아이들의 보육을 담당했던 교사들과 한국 아이들과 어울렸던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을 만난다. 벌써 60년이 지난 이야기. 하지만 의아할 정도로 그들은 한국 아이들에 대한 애잔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며 슬픔에 끊임없이 눈시울을 붉힌다. 수 없이 돌봐온 아이들 중 하나로 생각할 수 있었을텐데 그들이 그리도 특별한 감정과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는 그 이유를 조금씩 짚어간다.


폴란드는 2차세계 대전을 혹독하게 겪은 공산주의 국가이며 4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우슈비츠가 위치한 곳이라고 한다. 추상미는 영화의 초반 아이들과 폴란드 선생님을 "상처의 연대"라는 공감으로 연결시킨다. 길에서 죽임을 당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던 시절, 그들이 느꼈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갈망을 겪지 않은 이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같은 일을 겪지 않고는 그 아픔을 깊이 느끼기 어려운 법. 아마 폴란드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느꼈을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어린 나이부터 공포라는 감정에 사로잡혀 살아온 아이들에게 무한한 공감과 안타까움을 가지게 되었을 것 같다. 멀쩡한 침대를 두고도 혹시나 떨어질 폭탄이 두려워 침대 밑으로 숨는 아이들을 교사들은 씻기고, 먹이고, 가르친다. 아이들도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조금씩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고 교사들을 믿고 그들과 함께 어울린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자신들을 '마마' '파파'로 부르도록하여 부모를 잃은 그들의 부모가 된다.


북한은 전후 국가 재건을 위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길게는 8년을 폴란드에 살았던 아이들을 송환하도록 명령내린다. 북으로 송환된 아이들은 고된 노역을 견뎌야 했다. 그러한 사실들은 아이들이 폴란드에 보낸 편지에 보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편지를 통해 끊임없이 돌아오고 싶다고 외치는 아이들. 편지의 내용을 들켜 아이들이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폴란드 선생님들. 그리고 들려오는 북한 아이들의 죽음에 관한 소식들. 폴란드 교사들은 어쩌면 끝나도 끝나지 않는 전쟁과 사람의 몸과 마음을 도구로 삼는 이데올로기의 폭력에 고통받는 아이들을 떠올리며 수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의 고통에 눈물짓는다.


통일로 인한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이 있는가

영화는 탈북하여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다양한 청년의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준다. "꽃제비"라 불리는 노숙생활을 했던 아이, 부모를 가진 이가 참 부러웠다고 말하는 아이, 얼은 강물을 뛰어 목숨을 걸고 탈북을 감행한 아이, 탈북의 트라우마로 손을 떨게된 아이.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을 묵묵히 이야기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듣고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차갑고 잔인한 세상이다.


자신이 가진 상처가 배우라는 직업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냐는 감독의 질문에 탈북한 소녀 송이는 이렇게 말한다.

상처가 도움이 될 수 있나요?


어쩌면 상처가 아물어 더 단단해진다는 말은 그 상처가 깊지 않았을 때 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깊은 상처는 살아가는데 짐이고 대체 아물지 않는 고통을 줄 뿐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가진 상처의 깊이도 무척이나 다른데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오랫동안 살아온 이들의 상처를 서로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상처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있을까.


영화속의 탈북 소년 소녀들은 남한의 아이들은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잘 먹고 풍요롭게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도 이 사회, 이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각자 극복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며 경쟁사회, 불경기, 혐오사회, 구직난 등의 사회문화적 변화에 따른 불안 속에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니어 보일지라도 우리는 각자 해결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만약에 통일이 된다면 남북은 서로가 가진 고통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소통하려는 준비는 되어있을까. 구성원 개개인이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채 통일이 되어 서로 만나게 되면 우리는 그 전 보다 더 대립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탈북한 이들의 이야기를 조금 씩 들려주며 이들과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사랑이라는 마음이 지금의 인류를 있게 했다고

평범한 마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일에 그 일이 일어난 이유를 "사랑"이라고 붙여본다면 대부분 말이 되는 것 같다. 북으로 떠난 아이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짓는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폴란드 보육교사들의 마음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모두 똑같아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수 많은 기생충을 안고 있는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했던 그 마음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선생님이 아닌 '엄마', '아빠'라고 부르도록 하자고 한 마음으로 이야기 했었던 그들의 마음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나는 사람이 가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인류가 잘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서 발달되어온 진화의 일부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가족을 돌보는 것에서 나아가 아무 연관 없는 사람을 돌보게 하기도 하며 대신 목숨을 바치게 하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때론 '정의감' '사명감' '희생정신' '모성애' 라는 말로 대체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 단어가 무엇이든 사랑이라는 마음은 지금의 인류를 있게 했다. 인간은 잔인하고 폭력적이지만 그만큼 사랑의 감정도 크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가 지구상에 이렇게 살아가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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