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나라

by 노마 장윤석

[함석헌 에세이]

너도나라

노 마



앎과 앓음


앎은 앓음이라 했습니다. 앎은 앓음에서 비롯합니다. 언젠가 듣고서 깊이 새겨진 선생님의 이 짤막한 문장은, 내가 뭐 하려고 이 세상에 왔을까, 무슨 일을 하게 하려고 태어났을까 하는 물음에 등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앞으로의 앎이 현실에서 오는 고통에 답하려는 앎이기를, 오롯한 나를 위함이 아닌 세상의 아픔에서 비롯하고 가닿는 앎이기를 소망합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수학교사의 말을 떠올립니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앓음에서 시작한 앎은 ‘흘릴 필요가 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세상을 꿈꿉니다. 아무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고통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큰 고통 앞에 서면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잔뜩 찡그린 표정의 노숙인부터 저 지구 반대편 전쟁으로 죽어가는 아이들까지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우울하고 힘들어 죽고 싶었다고 말하는 친구의 말에도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미세먼지 수치가 최악을 가르키던 한 주였습니다. ‘절대 나가지 마세요’ 하는 경보를 뒤로 한 채 집을 나섰습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한 중년의 남성에게 시선이 머무릅니다. 일용직 노동자처럼 보이는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스크린도어에 머리를 박고 있습니다. 며칠 전, 달리는 전철에 중년의 남성이 뛰어들었다는 뉴스가 떠오릅니다. 뛰어든 사람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혹여나 그를 붙잡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싶어 종아리에 긴장시킨 채 그를 주시합니다.

영등포역에 내렸습니다. 길가의 공기가 무겁습니다. 한 노숙인이 먹다 남은 자장면 그릇을 뒤적입니다. 못 본 채 지나갑니다. 홍등가의 붉은 등과 타임스퀘어의 화려한 조명이 등을 맞대고 있습니다. 누구는 몸을 팔고, 누구는 명품을 사고, 역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저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인가요.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잠시 후면 잊겠지요. 시린 마음도 잠시 후면 가라앉겠지요. ‘매일 몇 번씩 무너져 버리는 세상 따위가 내 알 바 아니지’요.

다시, 앎은 앓음입니다. 알지 못했다면 아프지 않았습니다. 성 착취 구조의 실상을 알지 못했다면 홍등가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동산 계급사회의 실상을 알지 않았더라면 지하철을 탈 때 괴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태 위기의 실상을 알지 못했더라면, 나 죽을 때까지 멸망할 리 없는 이 지구에서 이것저것 망치고 파괴하다가 고이 떠나버렸을 것입니다. 멸종의 공포와 방관자의 죄책감, 막을 수 없다는 무력감에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앎은 때로는 ‘내 삶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만 같습니다.

상담을 받았습니다. ‘고통을 마주하는 법’을 주제로 열회 차 상담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상담사는 언제부터 세상과 타인의 고통을 스스로의 것으로 여기려 했느냐 묻습니다. 언제부터 자신의 삶의 경로와 방향을 세상과 연결지어 살게 되었냐고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 잠시 당황하다가, 머뭇거리다가 세월호를 입에 올렸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세상이 가만 두어도 잘 굴러갈 것이란 믿음은 그대로 부서졌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참담한 비극을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나는 세월호 세대라고.

철학자 김상봉에게 전화를 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학벌사회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입시를 치를 때의 이야기입니다. 자유, 개인, 선택 등 추상적인 단어를 입에 올리며 어찌 살아야 하냐 묻는 저에게 선생님은 혼자 잘 살면 무엇합니까, 헌신하는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고 되물으셨습니다. “앞으로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면, 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헌신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십시오. 세상이 마음에 안 들고, 마음으론 당신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아무 일도 못 하고 세상을 비판만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 뒤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인생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실존에 선행하는 ‘너’가 있습니다. 이상한 사명감이 생겼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홀로 청사진 한 장 품에 품고 이 사람 저 사람 붙잡으며 우리 이 길로 가자, 우리 함께 가자 다독이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이상은 저 드높은 곳을 가르키는데 역사는 세상은 따라주지 않으니 필경 답답하였을 터입니다. 한번은 이리 말씀하셨다 합니다. “사실 나 미국 간 동기의 하나는 어떻게 돼서 죽게나 됐으면, 죽었으면, 그러고 갔어요. 이건 정말이야요. 왜 그런고 하니, 비행기 사고 많습니다. 자동차 사고 많습니다. 그러니깐 이놈의 3만 피트를 날아서 태평양을 넘어가고 대서양을 넘어가고 인도양으로 올 때 그래도 오늘은 죽을 기회가 있지 않을까…. 나 자살은 안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글쎄 이 목숨이 내 목숨인가…” 선생님이 예견한 세상이 저에겐 오늘로 도래했고, 풀리지 않은 지난날의 숙제와 미중유의 과제가 존재합니다. 가야 할 길은 멀고 험한데, 실력은 미숙하고, 세상은 따라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앎은 앓음입니다. 앎은 아프지만, 진실로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알아야만 합니다.



한국에서 산다는 것


“한국에서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시나요. 때로는 사막에 내던져진 것 같은 느낌이 드시나요.” 가수 이랑의 물음입니다.

저는 IMF때 태어났습니다. 신자유주의와 구조조정, 고용 유연화, 안전망 붕괴와 함께 자랐습니다. 이데올로기의 힘은 강합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철학이 온 곳에 스며 있습니다. 모두가 나만 알고 나만 잘살면 되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 말합니다. ‘헬조선’은 그 결과물입니다. 삼포, 오포, 십포, 포기하는 것이 점점 늘어갑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갑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해집니다.

누군가는 그렇다면 떠나면 되지 않냐 묻습니다. 고통과 비참함이 넘쳐흐르는 이 헬조선 등져버리고 어디 괜찮은 복지국가 가서 한 삶 잘 살면 되지 않냐 말합니다. 한동안 국외로 여행 나가질 못했습니다. 모순 가득한 한국의 현실을 그냥 둔 채 떠나가는 기분이어서 그랬습니다. 어디를 가도 이민을 외치는 친구들 속에서 제 안의 사명감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제 세대에서 사명감이라는 건 참 덧없고 부질없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의 배도 빌리지 않고 솟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나요.’ 나란 사람의 구성은 가족과 사회와 정치와 국가와 환경과 과학과 시대의 맥락 속해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함께 사는 건 어렵습니다. 그러나 헤어져 사는 건 더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합니다.

민족주의 같은 건 낡은 관념이 되어버린 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민족을, 겨레를 이야기합니다. 오롯한 개인으로 아무 빚도 지지 않고 무한의 자유를 가지고 태어난 이는 없습니다. 이 나라는 ‘전봉준과 유관순과 전태일과 윤상원이 물려준 나라입니다.’ 내가 ‘나’를 말하기에 앞서 존재하는 ‘너’는 동학의 농민이기도 3.1운동의 학생이기도 평화시장의 노동자이기도 광주의 시민군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묻습니다.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루고픈 업이 있습니다. 만들고픈 세상이 있습니다. 민족 같은 거 값없는 것이 되어버린 지 오래지만, 저를 잇는 정신과 운동의 맥을 이어갑니다. 사랑도 명예도 남김없이 스러져간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빚과 빛


‘세상이 지운 빚을 갚다 내 빛을 잃고.’ 빚져있음을 모르는 이 세대는 빚이 늘어만 갑니다. 서울에서 중간의 아파트 한 채를 사려면 7년을 단 한 푼 쓰지 않고 벌어야 합니다. ‘타워팰리스보다 비싼 원룸’에서 빽빽한 지하철에 실려 다니며, 수천의 빚과 함께 대학을 졸업하는 친구들을 봅니다. 이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낙오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요.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요.’ 서울이 회색인 까닭은 사람들이 빚을 갚다가 빛을 잃어버려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빚은 어디에서 오는가요. 왜 빚을 지고 빚이 생기나요. 경제적이지 못한 사람이 빚을 지나요. 무능한 이가 빚을 지나요. 아닙니다. 빚은 시스템에서,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옵니다. 누가 빚을 지우나 보아야 합니다. 빚을 지우는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시대는 제 말씀을 가집니다. 시대의 말씀은 민중의 입에서 나옵니다(655쪽).” 구조를 보기에 앞서 지금 시대의 말씀을 묻습니다. 민중의 입에서 떠도는 말들을 떠올립니다. 부익부 빈익빈, 그들의 나라, 금수저 흙수저, 조물주 위에 건물주. 이 말씀들에 고통의 근인이 존재합니다. 사회의 부조리와 구조의 모순이 이 말씀 안에 녹아나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 불평등 담론이 시작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세계 공통의 현상이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각합니다. 날이 갈수록 상층과 하층의 격차가 벌어집니다. 우리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달성했지만 경제적 민주주의는 이루지 못했습니다. 자본과 기업의 지배권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겪는 경제적 양극화는 국가가 기업이 될 때 일어나는 필연적 결과입니다. 이 나라는 기업 국가입니다. 한편에서 공화국의 자유롭고 평등한 주권자라 하더라도, 다른 한편에서는 기업의 노동자로서 일종의 임금 노예입니다.

그들의 나라. 버스 요금을 모르는 그들이 성채를 짓고 살아갑니다. 스카이캐슬의 담장은 드높기만 합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 바벨탑의 깔끔한 대리석 바닥은 피땀으로 얼룩져 있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청와대 만찬에 초대받은 이재용은 말합니다. “이제 실적 나오는 거지요.” 그 실적을 위해 스러져간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삼성을 생각합니다.

금수저 흙수저. 한국은 계급사회입니다. 날 때부터 출발선이 다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평등‧공정‧정의는 형식적으로 껍데기만 존재합니다. 누구는 입시코디네이터를 고용해 스카이 대학에 가지만, 누구는 가족을 부양하면서 자신의 삶도 챙겨야 합니다. 계급사회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는 헛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 한국은 계급사회 중에서도 ‘부동산 계급사회’입니다. 열 명 중 네 명은 단 한 줌의 땅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데, 맨 위의 한 명은 전체 땅의 6할을 독점합니다. 이 격차는 한국의 극심한 불평등과 왜곡된 경제구조를 설명해줍니다. 불로소득이 발생해 성실한 노동과 정당한 소득이 천대받고, 부동산 불패 신화가 만들어져 사람들은 돈이 모이면 그 돈을 부동산에 바칩니다. 기업은 생산에 투자하지 않고 땅 투기를 합니다. 투기를 뒷받침하는 법과 제도, 정부의 주택 정책, 부동산학자와 언론의 이데올로기를 요인으로 꼽을 수 있지만, ‘내 땅 내 집 마음대로 한다’는 극단적인 부동산관, 사유재산 제일주의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본질입니다. 부동산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이 ‘관(館)’을 ‘지오-멘탈리티(Geo-mentality)’라 부릅니다. 이 ‘마음틀’은 사람들의 마음속 무의식 수준에 오래도록 자리하고 있어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도 하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묻기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한 번 만들어져 자리 잡은 지오-멘탈리티는 논리에 바탕을 두지 않습니다.

부동산 계급사회의 주범은 땅을 사고 파는 ‘재화’로 보는 시선입니다. ‘집’이 아니라 ‘부동산’으로,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으로 여기는 지오-멘탈리티가 문제의 본질입니다.

이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옛날 사람의 생각은 동서양을 말할 것 없이 그렇지 않았다. 깊은 윤리관 위에 서있었다. 그들은 엄격하고 고상한 윤리적 질서 밑에 우주 만물을 통일하고, 인간 스스로가 책임을 지고 그 중심에 서는 것이었다(710쪽).”

1854년 인디언 추장 시애틀은 땅을 팔라는 미국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간디도 말합니다. “땅은 우리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만 단 한 사람의 탐욕도 만족시켜 줄 수 없습니다.”

칼 폴라니(Kal Polanyi)는 토지는 노동·화폐와 마찬가지로 판매를 위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상품으로 거래되는 시장경제의 원리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 말했습니다. 적어도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 하늘과 땅, 인간은 더불어 함께 공존해왔고, 소수가 독점적으로 소유하거나 사고파는 대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재산권‧소유권은 오만하기 그지없습니다. 땅을 소유할 수 있다니요. 산을 가질 수 있다니요. 본인이 만든 것도 아니면서. 우리는 모두 왔다가 돌아가는 ‘빌려쓰는 존재’일 뿐입니다. 자연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 그 바탕이 있습니까. 토지에 내 것이라고 가격표를 붙이는 것은 누구의 소행입니까.

땅 뿐만 아닙니다. 주식회사의 지배구조를 보면 사태는 더욱 심각합니다. 기업을 소유할 수 있다는 관념이 공고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재벌일가의 오너들은 한진사태에서 보듯이 기업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릅니다. 하지만 주식회사의 주인은 없습니다. 주식회사의 법인격은 그 자체로 한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경영자는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지휘자를 선택하듯이 노동자들이 뽑으면 됩니다. 삼성의 주인은 이건희나 그 일가가 아닌, 법인격 ‘삼성’이고, 그곳에 실제로 있는 노동자와 주주들입니다.

재산권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정의, 분배 원칙은 무너집니다. 김종철은 자본주의 금융, 주식회사, 그리고 대의제를 통해 자산가들이 재산권은 행사하지만, 책임은 회피하려는 것을 제도화한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라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우리에게 빚을 지우고 있습니다. 빚을 갚다 빛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인간 사회의 경제적 부조리에 대해 고찰했습니다. 그 부조리는 인간계를 넘어 생태계로 향합니다. 사람 경제는 지구 생태 안에 자리하는 까닭입니다. 경제와 생태는 밀접합니다. 경제학(Economics)과 생태학(Ecology)의 어원이 그리스어 ‘Oiko-nomia/nomos’로 같은 것이 그 하나의 예입니다. 양자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상호-영향의 성격을 띱니다.

애석하게도 자본주의 체제 역시 경제와 생태에 닮은꼴의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K. Marx)의 분석처럼 자본은 인간과 자연을 동시 소외 시키고, 양자를 착취함으로써 그 체제를 유지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불평등도 성장 논리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마치 진정한 풍요로움인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유례없는 전지구적 생태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성장을 해온 자본주의 산업문명, 즉 근대문명의 존립 방식이 총체적으로 빚어낸 재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명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예언이 애석하게도 적중했습니다.

“세계와 인생의 근본에 윤리적인 의미를 부인하고 생물의 행렬에 참여하여 생존 경쟁의 문명의 달음질을 한 결과는 오늘의 세계적 어지러움과 고민에 이르렀다. 지금의 세계사의 모양은 세계혁명의 발효다. 인류는 또 한 번 생각을 근본적으로 달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지 않는 한 세계구원의 길은 없다(711쪽).”

2018년 IPCC에서는 이례적으로 특별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지구온난화 1.5℃에 대한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근시일내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1.5℃ 이하로 제한하지 못할 경우 사태는 심각해집니다.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2040년 전후 지구평균 온도가 1.5℃ 상승합니다. 무감각한 숫자를 넘어서면 이 변화가 초래할 국면에 대해서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2015년 파리기후협정의 목표치가 2.0℃였으니, 이는 3년 만에 안일한 목표치였음이 확고해진 것입니다. 문제는 IPCC의 예측과 제안조차 사태를 과소평가하고 있을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호주 국립기후복원센터에서 발표한「실존적인 기후 관련 안보 위기 – 시나리오적 접근」에 의하면 2030년에 지구는 이미 1.6℃ 상승에 도달합니다. 갈림길에 도달하기까지 IPCC는 20년, 호주 국립기후복원센터는 10년 남았다고 예측하는 것입니다. 돌이킬 수 있는 임계점이 지나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적게는 10년, 많게는 20년 남아있습니다.

생태계는 상호연결에 기반하고 있어, 어느 한 곳의 위기는 전체가 어지러움을 말합니다. 육식주의, 자연재해, 플라스틱, 핵발전소, 미세먼지, 기후위기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구주도의 물질문명은 이미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입니다. 근대문명 그 자체를 근원적으로 묻는 작업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미증유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입니다.

당장 내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는 안일한 태도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없음이 문제를 키워 여기까지 끌고 왔습니다. 미증유의 위기를 인식했더라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했더라도, 파국을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아니 듭니다. 길 아닌 곳을 달려와 절벽에 직면한 자동차의 핸들을 돌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미래세대에게는 현재가 없습니다.

녹색당에서 주관하는 기후위기 선포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활동가가 자기소개를 하다가 갑작스레 울음을 터트립니다. 말을 끝맺지 못하고 한참을 꺼이꺼이 울다가, 나중에서야 말을 잇습니다. “요새 우울함이 너무 심해져서요. 다가올 미래는 훤히 보이는데,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라도 해보려는데, 도저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자살을 선택했다는 미국의 한 환경운동가를 떠올립니다.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도 야스퍼거 증후군 강박 장애와 선택적 함구증을 진단받습니다. 인간은 낙관이 불가능하다 생각하면, 그 무력감에 존재의 빚을 꺼뜨립니다. 온 곳을 둘러봐도 절망밖에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나와 문명에 미래가 없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이 속에서 희망을 발견해 낼 수 있는가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요.



모든 잘못의 근본 원인은 너‧나를 갈라 생각하는데 있다


누군가는 역사는 진보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 눈에는 한 점 진보하지 않았습니다. 미약한 정치적 진보에 가려진 전 지구적 위기와 멸종의 임박은 우리는 진보하고 있다고 착각할 뿐이라는 걸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때로는 한 번의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살았던 세상을 동경합니다. 암흑의 시기라던 중세에서는 Dis-ability(장애)라는 낱말조차 없었고, 우리의 선조들은 길 가다 혹여나 밟을지 모르는 벌레를 생각해 느슨한 짚으로 신발을 엮었더랍니다. 적어도, 그때의 산과 바다와 강에서는 악취가 나지 않았습니다.

근대가 밉습니다. 앞서 본 생태와 경제의 지평에서의 위기는 근대의 존립 방식이 빚어낸 재앙입니다.

“근세 사람의 세계는 결코 윤리적인 질서의 세계가 아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꼭 같은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만족시키고자 애쓰는 것뿐이다. 뜻대로 되면 행복이요 아니 되면 불행이지, 거기 무슨 잘이니 잘못이니 죄니 악이니 있을 것이 없다. 근본에 있어서 근세 사람의 생활의 바닥을 이루는 생각은 이것이다(710쪽).”

근대에는 윤리가 없습니다. 뜻과 믿음과 영성 같은 것들은 먹지도 입지도 팔지도 못하니 값없는 것, 비루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공리주의 계산기가 쾌락과 효용의 잣대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답을 대신합니다.

이것은 수의 폭압입니다. 셈해질 수 없는 것들은 취급되지 않습니다. 신고전학파로 대표되는 근대‧주류 경제학이 특히 그렇습니다. 여기에서는 자연이 ‘자원’으로 등장합니다. 화석연료의 무한한 사용이 가져올 환경‧기후 붕괴 등 물질대사의 균열을 고려하지 않고 번지르르한 수학 모델을 세워놓습니다. 주류 경기변동론에서 경제공황은 없습니다. 그래프에서는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안정된 모형만 그려집니다. 핵발전소 또한 그 변칙성과 위험성이 수식에 잡히지 않습니다. 경제논리의 핵심인 비용-편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은 제주 비자림로 벌목사태처럼 5분 빨리 가자고 고목 수천그루를 베어냅니다. 4대강 사업도 같은 분석 절차를 거쳐 진행됩니다. 뚜렷하게 나오는 비용과, 번지르르하게 예상되는 편익은 실제의 삶과 가치를 계산하지 못합니다.

이 시대의 공학을 바라봅니다. 문제설정 자체가 잘못되어있습니다. 공학은 문제의 인과를 밝혀 원인을 통제함으로써 개선된 현실을 만들어가는 것이 목적인데, 아예 잘못 짚었습니다. 문제를 잘못 짚고서 이어가는 사유는 필연적으로 괴기한 해법을 가져옵니다. 미세먼지가 심해지자 헬리콥터를 띄워 물을 뿌리고, 4대강이 녹조로 몸살을 앓자 로봇 물고기를 풀어놓습니다. 지구온난화의 대비책으로 대기 중 에어로졸 살포와, 로켓에 태양반사판 싣고 쏘아올리자 제안합니다. 정형외과 수술처럼 국소부위 시술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식의 사유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뿐입니다.

“인류는 또 한 번 생각을 근본적으로 달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지 않는 한 세계구원의 길은 없다(711쪽).”

전환이 필요합니다. 혁명이 필요합니다. 근대문명에서 생태‧생명문명으로의 근본적인 전환이, 편협한 근대 사고관으로부터 혁명이 필요합니다.

먼저 겉으로의 혁명을 말합니다. 앞서 이야기 한 부조리들을 해결할 열쇠입니다. 첫째, 토지공개념에 사상의 뿌리를 두고 세계적 사유화‧민영화에 맞서 공공성이 짙은 자연과 토지, 기업을 공공화해야 합니다. 둘째, 기업지배구조를 재벌해체와 노동자경영권을 통해 개편해야 합니다. 셋째, 기후위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탄소제로 사회로 이행해야 합니다. 그 외 서울대 폐지 및 학벌사회 해체, 기본소득 도입의 검토, 비례대표제‧선거권 하향 등 정치제도의 변혁을 혁명의 설계도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모든 혁명은 시기상조이기에 그 신중을 기해야합니다. “혁명은 어쩔 수 없이 있기는 하겠지만 마땅히 할 것은 아니다. 혁명은 겉을 바로잡기 급해 속을 돌아보지 않고, 남의 죄를 추궁하기에만 열심이어서 그 짐이 전체의 것임을 알아 그 짐을 같이 지려는 생각을 도무지 하지 않기 쉽다(668쪽)”

그럼으로, 속의 혁명 즉 인간혁명을 말합니다. 진정한 혁명은 ‘누구를, 어느 일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명을 바로잡는 일, 말씀 곧 정신, 역사를 짓는 전체 그것을 바로잡는 일’인 까닭입니다. 우리 안에 스며든 근대성부터, 주위를 배회하는 신자유주의 망령, 물질적 욕망을 혁명합시다. 나아가 그간의 공석의 자리에 새 뜻을 세웁시다. 역사를 이어가는 주체로서 지나온 길을 톺아보고 나아갈 길을 내다보아 새 뜻을 허리춤에 비끌어매고 길을 걸어갑시다.



너도나라


“우리의 근본 잘못은 우리가 스스로 역사의 책임자 노릇을 하려 하지 않고 서서 기다리려 한 데 있다. 모든 잘못의 근본 원인은 너‧나를 갈라 생각하는 데 있다. 나라는 너‧나 생각이 없고, 너도 ‘나’라 하는 데 있다. 모든 것을 ‘나’라 하는 것이 나라요, 나라하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너‧나 봄을 떠나지 못한 사람은 인생 구원을 말할 자격이 없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정도 이상을 모르는 마음은 사회 경륜을 의논할 수가 없다. 그놈이 그놈이라 하지 말고, 이놈도 그놈도 나다 하게 되어야 한다(666쪽).”

너도 나라 했습니다. 너‧나 윤리를 말합니다. 모든 잘못의 근본 원인이 너‧나를 갈라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이 생각에서 근대가 비롯했고, 모든 문제의 바탕에 이 너‧나 분리가 자리합니다.

학벌사회를 살아가는 교실의 학생들은 옆의 ‘너’들을 견제하기 바쁘고 ‘나’를 닦달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경쟁 원리를 내면화하는 와중에 너‧나는 철저하고 뚜렷하게 갈라집니다. 기업 국가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도 ‘너’는 경쟁의 대상일 뿐입니다. 한시도 쉬지 못하고 착취되는 가운데 ‘너’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나’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비극이 일어납니다.

비단 같은 시대에만 한정된 일은 아닙니다. 먼저 태어난 ‘너’에 대한 생각 없이 ‘나’만 입에 오르며 역사성과 겨레성은 사라져 갑니다. ‘너’를 위한 정치는 없고 따라서 정치의 공공성은 몰락합니다. 나의 이름만을 내걸고 촛불을 들 때, 도래할 ‘너’를 위해 삶을 던진 이름들은 기억되지 않습니다.

미래의 ‘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핵발전소의 비용이 저렴하다며 발전소를 증축할 때 십만 년의 고준위 폐기물을 떠넘겨 받을 ‘너’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음 세상을 살아갈 ‘너’를 향한 세대 윤리는 그 가운데 자리 할 곳이 없습니다. 어제도 내일도 없이 오늘만 살아가는 사람들은 당장의, 오늘의 소용에 혈안이 되어 지혜를 잃습니다. 다시 강조컨대, 모든 잘못의 근본 원인이 너‧나를 갈라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홀로 살아갈 수 없음에도, 생각도 홀로 하고, 선택도 홀로 하고, 인생도 혼자 산다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갑니다. 모두 빚져 있는, 은혜 입은 존재입니다. 자기 의지로 자아를 형성하고, 자기 의지로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나요. 단독자로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어느 누구의 배도 빌리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 숨도 쉬지 않는 이가 어디 있나요.

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 내가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온 곳에 빚져있다는 자각이 인간혁명의 기본 바탕입니다. 근대가 너와 나를 가르며 태동했다면, 근대의 폐해를 극복하는 방법은 너도 나라 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조금이나마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흐르는 물에 씨를 뿌리는 어리석은 수고를 해온 ‘너’를, 해나갈 ‘너’를 믿겠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리라 믿겠습니다. 우리는 같은 별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을 얻는 까닭입니다.

나는 ‘너’를 통해 내가 되고, 우리는 ‘만남’을 통해 우리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 ‘너’도 ‘나’라 합시다.



* 함석헌 에세이 공모전에 2019년 9월 15일 공모한 글입니다.

* 각주는 실리지 않아 생략했습니다. (666쪽)으로 되어 있는 인용문은 함석헌 선생님의 '인간혁명(한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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