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시대, 신군사주의와 젠더, 불안의 감정동학(김엘리)’을 읽고
본 논문에서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아 변화한 군사주의를 신(新)군사주의로 표현한다. 한국 사회에서 군사주의는 준전시체제에 전쟁공포와 좌익불안감을 조성하며 큰 존재감을 과시해왔지만 문민정부와 2000년대를 맞이하면서 그 성격에 변화가 생겼다. 이전의 군사주의가 군부독재 치하에서 반-민주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해왔다면 지금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크게 훼손하지 않고 자기계발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안에서 작동한다. 단순히 폭력과 억압의 형태 안에서 자기희생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이익을 확장하는 지점과 만나 ‘새롭게’ 꽃단장 했다는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군사적 성장주의가 삼풍백화점·성수대교와 같이 ‘붕괴’하고 IMF구조조정을 맞은 점, 국제적으로는 탈냉전 시대가 도래하며 군사주의가 구시대의 유물로 전모한 점을 신군사주의가 등장한 배경으로 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통치원리가 온 곳에서 보편이 되어, 사회적인 것이 시장·경쟁원리에 맡겨지고, 개인이 자기경영의 주체로 상정되어 기업가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제 개인은 시장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불안정한 고용과 열악한 복지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려 가중된 불안감을 낳는다.
한편 국가 기능의 쇠퇴와 개인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국가주의·집단주의의 특성을 가지는 군사주의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시장경쟁을 활성화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국가를 필요로 하고, 국가는 군사주의를 강화함으로써 이에 부응한다. 안전사회가 안보국가로 치환되고 개인의 안전은 국가안보로 대체된다. 더하여 군사주의는 우익보수주의자들의 사유체계이자 통치기술이 되어 위기의식을 조장한다.
젠더질서의 변화도 신군사주의를 말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전통적인 성역할에서 벗어나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소환하고 기존의 남성성을 변화시켰다. 소비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자기관리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자기계발의 강박이 엄연히 자리한 형국에, 전통적인 남성성에는 균열이 생기고, 이에 기반해 작동되던 군사주의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군사주의가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결을 따라 움직이는 동시에 특정 집단의 타자화 담론을 기반삼아 안보국가로 작동하는 모습은 신군사주의가 구시대의 요소와 현시대의 특성을 함께 지님을 보여준다. 저자는 본 글의 말미에서 감정의 정치학을 말하며 이 시대의 불안이 어떻게 이용되는지, ‘안보’의 이름으로 이용되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서는 서두의 문장이 답이 되리라 본다. ‘우리가 말하는 안보는 생명, 부의 재분배, 그리고 인권이, 지속가능한 환경을 의미합니다.’
불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자면, 이 시대는 불안의 시대라 불려도 과언이 아닐 성 싶다. 곳곳에 불안이 널려있고 도처에서 불안감이 피어난다. 저자는 불안감을 ‘위험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감정으로 개인적인 심리현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공유된 집단감정’이라 정의하고 있다. 말처럼, 지금의 불안을 개인적인 현상으로 보기에는 너무 많고 너무 잦다.
불안은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속성’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이 우리 주위를 배회하는 한 불안은 불가피하다. 자본주의가 인간소외를 빚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을 시장으로 보내버리는 신자유주의가 패권을 차지함으로써 개인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경쟁에서 앞지르고 노동시장에서 선택받는 것으로 바꾸어버렸다. 즉 상시 불안에 떨며 스펙을 체크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럼으로 이 시대의 불안은 ‘개인적’이라 이름 붙일 수 없다.
무한경쟁 속에서의 불안감이 병영캠프의 유사 공동체성 소비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는 부분에서는 조금 슬펐다. 대가족·마을공동체의 해체 이후 그 빈자리에 대한 그리움은 분명하다. 개인이 홀로 설 수 있다 해도 인간은 혼자 사는 동물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 허전함을 군대로, 병영캠프로 채우다니 슬프지 않을 수가 없다.
자유주의 이념에 따라 개인이 독립되며 자기계발의 주체가 된 것 까지는 좋다. 애국심·충성심·마초성 등 구시대적 굴레들을 꽤 많이 끊어냈다. 하지만 이전의 구속을 잘라냈다고 해서 ‘주체’라 이름붙일 수 있을까. 인간답게 자라날 토양이 부재한 곳에서는 주체가 있어봤자 허울뿐인 주체다.
가만보면 낙오자에 대한 두려움·불안감은 정말 만연하다.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 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굴러 떨어지고, 굴러 떨어져도 아무도 손 내밀지 않는다는 것을 자기도 모르는 새 터득했다. 실제로 공교육에서 배웠다. 내면에 경쟁원리가 가득찬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타인을 오롯이 보지 못한다. 경쟁자일 뿐이다. 여기에 군사주의까지 가미하면 아주 파국이다. ‘믿을 건 오직 나뿐이야’ + ‘적과 아군’ 조합이랄까. 타자를 따스한 시선으로 보려야 볼 수가 없다. 타자에 대한 적대적인 시선을 가진 채, 낙오자의 불안을 안은 채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의 병영체험을 문제화하는 지점은 타자와의 상호연결성을 자각해야하는 윤리적 요청에 있다. 이를테면, 종이 한 장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햇빛과 비라는 자연세계의 선물을 받으며 세계 각 지역의 사람들이 개입했을 그 노동의 –때로는 노동의 착취로 이루어졌을- 수고로움이 담긴 종이 생산과 유통 과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소비과정에 내가 어떻게 연루돼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 성찰 같은 것이다. 수잔 손택(Susan Sontag)이 말한 ‘내가 타인의 고통에 연루돼 있을 수 있다’는 숙고야말로 타자와의 연결성을 감지하는 시작점이다. 더 밀고 나간다면, 주체의 구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서로 연결돼 있고, 개인은 서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삶의 조건이자 취약성이다. 따라서 자기계발이란 바짝 군기를 넣어 자기를 극복함에서 오는 게 아니라, 몸을 움직여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사람들의 경험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며 자신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말하자면, 적과 아의 이분화된 거리를 경쟁과 전쟁으로 정복하여 아의 공간으로 타자를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별적 개인들의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광장으로 변화시키는 행위에서 자기를 새롭게 구성한다.”
이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어째서 반-군사주의가 생태주의 사상과 맞닿는지가 명료하게 드러낸 것 같다. 결국은 주체의 문제다. 타자와의 관계맺음이 상호연결성에 발 딛지 않고 상호배타성 –적자생존, 이기주의, 무한경쟁- 에 발 딛는다면 그것은 주체가 아니다. 설령 주체라 부를지라도 불완전한, 독단적인 홀로-주체다. 저자의 말처럼 자기계발의 동기가 상호연결성을 자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희망사항이지 싶지만) 다만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개인화·파편화는 우리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을 더욱 잃어버리게끔 한다는 점에서 우려된다. 고립된 ‘나’만이 남아, 내가 제일 소중하고 귀하고, 딱 여기까지일 뿐이니. 내가 귀한 만큼 옆 사람도 옆옆 사람도 귀하다는 데 까지는 나가지 않는다.
경쟁에 치이고 생존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성찰과 숙고는 자리할 곳 없다. 타인의 고통은 경쟁자의 줄어듦 혹은 바쁜 와중에 보인 ‘귀찮은 것’으로 전락한다. 고통에 우리 사회가 더 섬세해 질 필요를 느낀다.
어쩌면 불안은 주체의 극단적인 모순 속에서 피어나는지도 모른다. 타자와의 연결과 관계 속에 자리해야 할 사람을 무한 경쟁에 던져놓고 ‘믿을 수 있는 건 내 자신’뿐 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불안은 당연한 게 아니겠는가. 인간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존재라면 구조적인 불안은 결국 형이상학적인 불안에서 기원한다. 삶이 덧없음에 항시 위협받는, 그런 존재의 불안 말이다.
다시 분명히 해 둘 것은 주체의 구성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어쩌면 조금 순진하고 너른 시각으로 볼 때 군사주의는 죽었다 깨도 독단적 주체의 틀을 못 벗어날 수도 있겠다. 기본적으로 타자를 적으로 구성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는 군사주의가 제 아무리 신자유주의니 탈냉전이니 시대의 조류에 형태를 변형해봤자 그놈이 그놈 아니겠는가. 자기만 주체라고 재는 적이라고, 파괴하고, 물리치고, 소멸해야 한다면 그게 주체인가.
군사주의의 해체는 나르시스적이고 독단적인 주체성 개념을 해체할 때 비로소 가능한지도 모른다.
* 2019.5.23
* 김엘리 교수의 <군대와 사회> 수업과제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