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서스, 리카도, 헨리조지
맬서스는 빈곤의 원인을 자연적인 요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인구는 무척이도 빨리 증가하는데 식량은 그 속도를 쫒아오지 못하니 입은 많고 먹을 건 적어 배고프고 가난하고 비참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이에 대한 헨리 조지의 의견은 이렇다. “맬서스의 학설은 빈곤이 불가피하다고 함으로써 개혁에 대한 요구를 얼버무리고 양심의 추궁으로부터 이기심을 보호하는 효과를 갖는다. 빈자가 적선을 청할 때 부자가 편안한 마음으로 호주머니의 단추를 잠글 수 있고, 부유한 기독교인이 주일에 화려하게 장식된 예배당 좌석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면서도 바로 이웃에서 고통을 당하는 비천한 빈민에 대해서는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철학을 제공한다.”
헨리 조지는 빈곤과 비참함의 원인이 사회의 부정의에 있다고 말한다. 뭔가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거다. 그는 하나의 문제의식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의 명저「진보와 빈곤」의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왜 사회가 눈부시게 진보함에도 불구하고 빈곤은 사라지지 않는가?”. 오늘날에도 너무 유효한 문제의식이 아닌가.
빈곤의 원인을 맬서스처럼 인구에서 찾게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인구를 줄이는 것 말고는 없다. 하지만 사회의 부정의에서 원인을 찾으면 가난한 자들이 빵이 없어 굶어죽어 갈 때 으리으리한 성에서 지대를 받아먹는 지주들이 보인다. 헨리 조지는 그걸 봤다.
리카도도 보긴 봤다. 지주들의 배만 불러가는 것을 보긴 봤다. 그러나 리카도는 지대가 높은 것은 곡물가격이 높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곡물가격을 떨어뜨리고자 자유무역을 열렬히 주장했던 것이고. 의회에 출석해 자유무역만 이뤄진다면 영국은 부유하고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이라 아주 당당하게 외치는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만약 곡물가격이 높기 때문에 지대가 높은 것이 아니라 지대가 높기 때문에 곡물가격이 높은 것이라면? 리카도는 그 생각은 안 해본 것 같다.
내가 사는 집은 보증금 천에 매달 이십의 월세를 낸다. 내가 일하는 꽃집은 한 달 매출 삼백 중 절반인 백 오십을 지대로 낸다. 한 번의 노동 없이 가만히 앉아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세를 받는 지주들을 생각해본다. 물가가 비싸서 월세가 비싼걸까? 정말?
헨리조지는 ‘토지 사유제’에서 원인을 찾았다. 애초에 땅은 인간이 생산한 재화가 아니다. 그리고 땅은 낡지도 않는다. 그런 특수한 ‘재화(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를 일개 개인이 소유해도 되는 걸까?
부루마블을 떠올리면 쉽다. 서울 가진 놈이 이기는 게임. 땅 많이 갖고 있으면 무조건 이긴다. 게임은 초기화 되기라도 하지 현실에서 땅은 세습된다. 없는 자는 평생, 그리고 다음 생에도 없다. 대한민국에서 열 명 중 네 명은 단 한줌의 땅도 없다. 대한민국에서 상위 1%는 하위 10%에 비해 646배 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경제학의 목적은 무엇일까. 스미스도 맬서스도 리카도도 이에 대한 답으로 부의 증가를 말한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왜? 경제(Economics)의 어원 ‘oiko nomos’는 ‘살림’, 즉 먹고 사는 것이라는데.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수업을 듣는 것도 모두 다 먹고 살자는 것 아니던가. 좀 더 잘 먹고 잘 살자는 것 아니던가. 어떤 게 ‘잘’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진보와 빈곤’ 첫 페이지에 나오는 그의 언사를 다시금 떠올리며 우리의 초점이 어디에 닿아야 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부와 특권의 불평등한 분배에서 발생하는 죄악과 비참함을 보면서 더 나은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이를 위해 노력하려는 독자에게 바친다. 샌프란시스코 1879년 3월.”
* 유철규 교수의 <뭐니뭐니해도 문제는 경제학>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2019.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