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대한 소회
공들여 글을 썼다. ‘너도나라’라 이름 붙였다. 오래전부터 아껴오던 제목이다. 미숙한 티를 벗어낸, 이 정도면 되겠다 싶은 글에 이 제목을 붙이고 싶었다. 어디 내보이기 부끄럽지는 않겠다 싶은 글에 붙이고 싶었다. 아주아주 공들여 아끼는 글에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부끄럽다. 내보이고 싶은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부끄러워 내보이기 어렵다. 상봉쌤께도 보낼 생각이었다. 저는 이리 지냈습니다. 이런 공부를 해왔고, 이렇게 길을 걸어 나가고 싶어요. 하고 안부 차 메일을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미숙함 범벅인 이 글을 도무지 보낼 재간이 없다.
글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이다. 뿌듯한 것도 있다. 두어 달 고민 해온 끝에 이리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서 뿌듯하다. 하지만 못마땅함이 크다. 오타와 정리되지 않은 문장들, 어긋난 각주들, 미진한 사유의 흔적, 깊이 없는 헛구호들이 한숨만 푹 내쉬게 만든다.
누군가 요새 뭐하냐고 묻거든, 글을 쓰고 있다고, 지난 배움들을 총망라하는 글을 쓰고 있다고 거창한 수식어를 붙여 말했다. 그간 관심 기울이고 읽고 쓰고 귀동냥한 것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해낸 글을 쓰려했다. 내가 학자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는 이 글에서 판가름 나리라 말하기도 했었다.
너무 잘 쓰고 싶은 글이었다. 글 쓴다 핑계대고 일하지 않은 대가로 어려워진 생계유지를 위해 함석헌 에세이 공모전에서 상금을 타야만 했던 것도 있지만, 그걸 떠나서 감만 겨우 잡았던 것들을 확실하게 잡아보고 싶었다. 학자가 되고자 하는 바람과, 내가 해온 공부의 이어짐, 앞으로 잡아야 할 구도의 길 말이다. 김상봉의 서로주체성, 헨리 조지를 필두로 하는 토지공개념, 반-자본 비-근대의 생태주의, 내가 해온 이 공부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에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도서관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었다. 나는 이어진 길을 걸어왔던 것이었다.
그러니 미약하더라도 내가 이루어 온 것을 정리된 얼개와 정돈된 문장으로 나타내고 싶었다. 아주 잘.
보다시피 욕심이 많아, 얼개만 한 달을 짰다. 이 얼개에 대해서는 후회 한 점 없다. 앞으로도 나의 배움은 이 얼개를 채워가는 일일 것이다.
앎은 앓음이다
한국에서 산다는 것
빚과 빛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모든 잘못의 근본 원인은 너‧나를 갈라 생각하는 데 있다
너도나라
앓음에서 시작한 앎이, 나의 터전과 빚져있음에 바탕을 두고, 빚을 지워 빛을 잃게 하는 사회구조와 빼앗긴 들에 대해 공부하여, 봄이 오리란 믿음으로, 너‧나 분리의 근대에 대한 비판, 새 뜻으로서의 너도나라 모색. 앞으로도 이 얼개를 품고 공부해나갈 것이다. 글의 부족하고 미숙한 부분들을 차차 채워 나가려 한다. 간추린 이야기들을, 하고 싶은 말을, 면밀한 진단들을 모두 적어내면 부끄러움이 조금은 덜하겠다.
한편 글을 쓰면서 종종 울었다. 쓰기가 어려운 글이었다.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나의 고통이든 타인의 고통이든 꺼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힘을 주고 있어야 한다. 고통을 진지하지 못한 태도로 마주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세월호 이야기나, 헌신하는 삶, 빚져있는 존재에 대해 쓰면서는 내가 마음 굳게 먹어야지 이 사명감 잘 간직해 좋은 세상 만들어야지 싶어 울컥했다. 그 먹먹함에 쓰다가 그만두고를 몇 번 반복했다.
나에 앞서 너가 있다는 말. 나만 알고 나만 잘 살고가 아니라, 나 이전에 이름도 남김없이 스러져간 과거의 너와, 앞으로 나를 이어갈 너를 떠올려 살아가자는 말은, 나의 실존의 이유이자 살아갈 이유이기에, 나는 너도나라 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