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주체 및 이원론·기계론적 자연관 비판

아르네 네스의 근본생태학과 김상봉의 서로주체성을 통한 대안 모색

by 노마 장윤석

Ⅰ. 들어가며


영등포를 자주 거닌다. 매일 통학을 했던 길, 어느 날 어째 허전하다 싶어 주위를 돌아보니 아름드리나무 두 그루가 밑동만 남고 사라졌다. 회색의 도시에서 미약하나마 푸르름을 유지해주던 나무 두 그루가 있던 거리에서 사람들은 이어폰을 꽂고 걷고 있었다. 풀 한 포기 없던 것처럼.

더 이상 사람들은 나무가 잘려나가는 일에 마음 쓰지도 아파하지도 않는다. 여름철 폭염에는 에어컨을 사면 되고, 미세먼지가 자욱하면 마스크와 공기청정기를 사면 되니까.

뭐가 문제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얼마 전 ‘지오멘탈리티(Geo-mentality)’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지오멘탈리티는 사람들의 마음속(무의식 수준)에 오래도록 자리하고 있는 ‘땅을 보는 마음틀’을 이른다. 땅은 자연의 한 번 굳어진 ‘마음틀’은 무의식화되어 있어 바꾸기가 쉽지 않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묻기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한 번 만들어져 자리 잡은 지오멘탈리티는 논리에 바탕을 두지 않는 까닭이다. 우리가 자연을 보는 마음틀은, 안녕한가.

마음틀은 관념과 경험의 복합적 줄다리기 속에서 만들어지겠지만, 어떤 패러다임과 이데올로기가 특히 강한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이 굳건한 틀을 형성한 것은 누구인가 시름시름 앓다가 찾아버렸다. 사회사상사 수업에서 베이컨과 데카르트를 읽다가 요놈이다 싶었다. 발뺌할 생각마라. 이들의 오만이 지금의 아수라장을 만든 것이니. 여봐라, 거기 누구 없느냐. 이들을 문책하라.



Ⅱ. 데카르트


“데카르트가 보는 자연은 하나의 기계다. 그의 작업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신의 완전함을 본받은 것임을,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명제를 통해 인간의 정신을 최종심급으로 상정했다. 자연의 법칙을 설명하는 시도는 과학의 기본을 탄탄하게 다졌으나 ‘대상화’의 한계를 생산해냈다. 자연에 대한 기계론적 시선으로 자연세계를 연구하는 관행이 그에게서 출발했지 싶다.

자연과 인간의 구분. 인간이 자연에 포함된 존재라 이해하던 지난 수천 년의 사상-문화를 역전시켜 분리해낸 그들. 얻은 건 눈에 확연히 보이는 기술과 과학문명의 발달이지만 잃은 건 미래다. 언젠가 침몰하는 지구를 떠나는 방주에서 눈물을 흘리며 방법서설을 찢을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근대적 주체란 무엇인가, 근대적 세계관·자연관이란 무엇인가. 굵직한 이 질문들을 품고 데카르트의 철학적 시도를 따라가보자.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신체, 물체, 생명 영역의 모든 것을 일단 의심했다. 모든 것이 의심되고 회의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믿음체계의 구축을 시도한다. 그렇게 제1원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가 탄생한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나는 지금 나 자산이 다른 사물들의 진리를 의심한다고 생각한다. 이 단순한 사실로부터 나는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매우 명백하고 확실하게 추론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만약 내가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내가 이제껏 생각해온 그 밖의 모든 것이 참되다고 할지라도 내가 존재한다고 믿을 만한 어떤 이유도 남지 않는다. 이로부터 나는 나의 본질 혹은 본성 전체가 단지 생각하는 것이고 나 자신은 존재하기 위해서 어떤 장소를 필요로 하거나 어떤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실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나’는 영혼이며 그것에 의해서 나는 나일 수 있다. 따라서 이 ‘나’는 신체와 완전히 구별되고 지성에 의해서 이해하려 할 때 과연 신체보다 더 알기 쉽고 신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그 자신만으로도 온전한 ‘나’로 남아있다(방법서설 39p).’


근대는 여기서 시작된다. 인간 존재의 기반이 사유의 터전인 정신에 자리하자, 신은 설 자리를 잃는다. 진리는 더 이상 위가 아닌 아래에서 나온다. 근대는 19세기 산업혁명과 20세기 과학을 통해 눈부신 문명을 이룩한다. 오늘날 인간은 두려운 것이 없다.

하지만 근대의 비극도 여기서 시작된다. 신체의 영역을 회의와 의심의 영역으로 던져주고 정신의 영역을 극도로 강조하는 것은 인간 존재가 우월하다는 사고로 이어진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동물들을 ‘자동기계’라 불렀다. 근대적·데카르트적 인간중심주의의 탄생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올바른 추론이 성립한다.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함 이외의 어떤 것도 절대로 나의 본질에 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본질은 실제로 오직 생각함이다. 내가 나에게 매우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신체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은 참된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편으로 단순히 생각하고 연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인 나 자신에 대한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단순히 연장을 가지고 있고 사유하지 않는 것인 신체에 대한 판명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생각하는 나는) 실제로 나의 신체와 분리될 수 있고 신체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 확실하다(다섯 번째성찰 59p).’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를 분명하고 극단적으로 구분한다. 데카르트적 심신이원론은 정신이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논증하는데서 드러난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생각하는 것과 연장되는 나뉘며, 이는 인간(정신적 존재)과 자연(연장, 사물적·물체적 실체)사이에 확고한 구분선을 긋는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신체 정신의 이분이기도, 인간과 자연의 이분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신’은 정신에 자리하고, 존재의 근거는 사유다. 생각이 연장에 앞선다. 사유하는 인간이 놓여져있는 자연보다 앞선다. 데카르트적 인간중심주의는 이렇게 완성된다.

데카르트의 논증방식을 살펴보자. 데카르트의 논증방식은 ‘서양인들이 사물과 사건을 각 부분으로 분해하고 이들을 논리적 순서로 배열하는 분석적 사고를 하도록 하는 전통을 만들었고, 그 결과 물질적 자연에서는 영혼과 같은 정신적인 것이 완전히 배제되었다.’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방법론을 사용했다.


1.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분명하고 명확히 제시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

2.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만큼 많은 부분들로 문제를 쪼개는 것

3. 이해하기 간단하고 쉬운 사물부터 시작해서 점차적으로 가장 복잡한 것까지 올라가는 것

4. 어떤 부분도 빠지지 않도록 일반적으로 완벽하게 검토하는 것.


네 가지 논리적 규칙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논증 규칙이 자연을 지배하는 힘의 열쇠라고 데카르트는 생각했다. 이에서 드러나는 강박적 완전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부분들로 문제를 쪼개며’ 원자 한 단위 한 단위까지 인간이 안다는 확신은 ‘힘’으로 이어진다. 도구적 방법론이 권력을 낳는다. 복잡한 우주는 구조화된 질서로 재편되고 질서는 권력과 밀접하다.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데카르트 이후 서구 철학은 근본적으로 권력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으로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질서와 권력은 모두 자연에 대한 기계론적 시각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적 세계관을 기계론적 세계관이라 부른다. 기계는 살아있지 않다. 따라서 세계·자연은 ‘죽어있는 것’이 된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세계를 주체인 인간과 객체인 자연으로 나눴다면, 데카르트의 기계론은 그 자연을 고전과학적 분석방법·논증절차을 거쳐 볼트와 너트 부속으로 전락시킨다. 이제 자연은 물질 내지 자원으로만 간주된다. ‘이는 새롭게 등장하는 근대적 세계관의 핵심이자, 산업혁명의 근간이 된다. 근대 기계학의 이러한 사유 방식은 이후 근대의 패러다임을 따르는 과학 및 철학의 기반이 된다.’

‘과학적 방법론의 특징은, 자연환경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여 더 많이 착취하게 해주는 지식을 창출하기 위해 자연환경을 도구적으로 취급할 필요를 갖는다는 점이다.’ 생명의 신비와 경외 같은 것은 낡은 것이 되어버림에 따라 자연의 착취에서 죄책감은 일어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는 것에서 마음쓸 필요 없듯이. 그렇게 동물실험과 산림개발이 정당화된다.

데카르트의 기계적 자연관이 근대의 패러다임이 미친 영향을 보기 위해서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논리를 보면 된다. 기계학적 방법론은 신고전파의 한계분석에 그대로 적용되었고, 이 ‘지식’은 철저하게 환경을 도구적으로 ‘계산’한다. 자연환경은 인간에게 도구적인 가치만을 가지고 있으며 경제적인 형태로만 계산된다. 착취는 ‘합리성’,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자행된다. 희소한 자원(자연이 아니라) 내에서 최대한 많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 신고전파 ‘경제학’의 정의다. 이 사유방식 속에서는 성찰과 죄책감은 자리할 곳이 없다. 나무가 잘려나가면 비용 및 수익이 발생할 뿐이다.


‘세계의 기계화가 데카르트와 홉스의 후세들에게 제기한 문제는 ‘자연의 죽음(death of nature)’이라는 문제였다. 물질과 운동, 진공, 힘만으로 설명되는 세계는 죽어있는 우주에서 생명체의 운동을 설명해야 하는 풀리지 않는 핵심 과제를 남겨놓는다. (중략) 기계론은 예전의 유기체적 자연 묘사에서 핵심적인 것들이었던 공간적 위계, 가치, 목적, 조화, 질, 그리고 형태라는 개념들을 없애버렸다.’


‘자연의 죽음’이전 세상 사람들은 범신론적·유기체적 자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생기론과 신비주의적 사고관도 가득했다. 굳이 어려운 말 쓸 것 없이, 이들은 자연이 살아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마음틀로 가지고 있었다.

‘동서양의 고대 문화와 북미 인디언들은 대지를 살아 있고 활동적이며 인간의 활동에 응답하는 어머니로 보았다. 그리스와 르네상스기 유럽인들은 우주를 육체와 영혼과 정신을 가진 살아 있는 유기체로, 그리고 대지를 숨 쉬고 순환하며 생식하고 배설하는, 만물을 기르는 어머니로 개념화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과 대지와의 관계는, 댐을 짓고 나무를 베고 광산 갱도를 파내기 전에 위무를 행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나-너 윤리(I-thou ethics)에 근거했다.’


‘유기체적 전체로서 살아있는 자연 세계’를 ‘생명 없는 차가운 거대 기계’로 인식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오늘날 전지구적 위기를 초래한다.



Ⅲ. 생태학적 대안모색


1) 인류세와 에코모더니스트

인류세 담론이 화두다. 인간의 힘이 지구 시스템 전체의 기능을 교란할 정도로 강해졌다. 이제는 인간이 자연적 조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인류세는 네덜란드 대기 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처음 주창한 개념으로, 인류를 뜻하는 ‘안트로포스(anthropos)’와 시대 ‘세(-cene, ep-och)’가 합쳐져 이뤄진 말이다. 이는 지난 1만 년 동안 안정적이었던 ‘홀로세(holocene)’가 저물고 지질학적으로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를 새롭게 써야 한다는 과학자들의 문제의식이다.

보수적인 전문 분야 중에서도 가장 전통에 묶인 학자들이라 할 수 있는 층서학자(지질학자)들이 인류세를 새로운 지질시대로 도입하려 한다는 것, 지구 시스템 과학자들이 인간이 지구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을 우려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지구가 인류의 수용한계를 넘어섰고, 더 이상 ‘세테루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 의 가정은 통하지 않는다. 자연을 불변의 변수로 상정하고 하던 모든 계산은 그 유효성을 잃었다.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은 더 이상 몇몇 사람들의 경고가 아닌,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탄 툰베리의 말과 같이 ‘집에 불이 난 상황’이다. 툰베리의 말을 더 들어보자.

“지금은 정중하게 말하거나 우리가 말할 수 있고 없고 한 것에 대해 집중할 때가 아니다. 이제는 분명히 말해야 할 때다. 기후위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껏 직면한 가장 크고 복잡한 도전이다. (중략) 나는 당신들의 희망을 바라지 않는다. 당신들이 희망적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당신이 공포에 질렸으면 한다. 내가 매일 느끼는 이 공포를 당신들이 느꼈으면 한다(그레타 툰베리, 2019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연설)”

하지만 이 인류세를 잘못 해석한 과학 지식에 기초해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프로메테우스 같은 자들이 있다. 데카르트의 수제자가 틀림없을, 에코모더니스트(ecomodernist, 인간중심주의자)은 인류세를 개탄하거나 두려워할 게 아니라 ‘축복’해야 할 사건으로 바라본다. 인류세는 인간의 오만이 낳은 위험성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아니라 자연을 개조하고 제어하는 인류의 능력에 대한 표시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은 인류의 합리적 이성과 고도 과학에 의해 생태위기를 제어할 수 있고, 인간이 생성한 파괴의 문제는 인간 진보의 부산물이기에 과학기술을 통해 극복하면 된다고 여긴다. 이를테면 크뤼천은 지구온난화의 해결책으로, 유황산화물 에어로졸을 대기 상층에 살포해 태양광을 차단하고 지구를 냉각하는 지구공학적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 저렴하고 국부수술식 해법은 기후나 생태계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어떤 다른 형태의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무모하다. 물론 여기서 그보다 더 큰 위험은 인간 과학기술에 대한 데카르트적 과신과 오만에 있다.

인류세는 인간중심주의와 근대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이 초래한 유례없는 ‘위기’다. 에코모더니스트들의 무모하고 무근한 낙관주의는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가졌던 오만함에서 한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

에코모더니스트의 사고방식은 자연을 ‘죽어있는 것’으로 상정하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다. 에코모더니스트가 발 딛고 있는 데카르트적 전통(인간중심주의와 이원론적 세계관)은 아직도 과학 계 내에서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생각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그 근거없는 낙관주의(더글러스 러미스는 이를 타이타닉 낙관주의라 불렀다)가 초래한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걸 보면 그들의 스승 데카르트가 그렇게도 강조했던 ‘성찰’성이 부족한 것 같다. 데카르트적 인간중심주의가 그 한계를 드러냈음에도 새로운 근원적 모색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크나큰 한계일 따름이다.


2) 아르네 네스(Arne Naess)와 근본생태주의

자연과학계에서 ‘인류세’라는 뒤늦은 진단이 나오기 전에 위기를 자각했던 선구자들이 있다. 그 분들 중 하나로, 아르네 네스(Arne Naess)와 그의 근본생태학(Deep Ecology)을 소개한다.

네스는 위기를 표면적으로만 접근하는 환경주의자들을 – 이를테면, 방금 이야기한 에코모더니스트 – 날카롭게 비판하며, 근본부터 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네스는 인간중심주의적 사유에 생태위기의 근원이 있다고 보고 개인저이고 사회적인 관행의 변화를 넘어 생태중심적인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만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흥미롭게도 네스는 스피노자에서 자신의 사상적 계보를 찾는다.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데카르트와 동시대의, 이단아로 알려진 철학자다. 네스가 스피노자 철학에서 주목하는 것은 세 가지다. 형이상학적 일원론, 범신론, 그리고 자연에서 덕의 힘과 민주성이다.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입장은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 야기했던 인간중심적 사유에 종말을 고하고 인간의 우월한 지위를 박탈한다. 범신론적 입장은 신이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사물의 내재적 원인이고, 그래서 자연과 다름 아니라는 사유로 이어져 자연에 있는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체에 대한 경이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이론은 모든 생명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 생명권 평등주의로 나아가는 단초를 놓는다. 이 이론들은 데카르트가 제시하지 못했던 생물학적, 유기체적 세계관을 제시한다.

따라서 근본생태학은 지난 300년간 서양을 지배한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서양 과학을 지배했던 기계론적 세계관에 도전해 모든 존재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인간과 환경을 분리하지 않는 전체론적 세계관을 형성한다(Capra, 1980 : 재인용).

간혹 근본생태학을 ‘팬티 벗고 자연으로 돌아가라’식의 원시주의 사고로 보는 시각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근본생태학은 낡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해 가장 최신의 담론들을 흡수하고 있다. 이를테면 현대물리학의 양자내부의 세계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물리학의 시초는 기계적·수학적 탐색이었지만 과학의 진보가 발견한 세계는 절대 기계적이지 않다는 점에 유의하라. 아래를 보자.

근본 생태론의 실재관은 생태학이 논하는 생태계로서의 지국에 대한 논의, 그리고 현대물리학이 설명하는 양자내부의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생태학에서는 지구를 구조와 기능으로 나누어 접근하는데, 구조에서는 생태계의 일곱 개 성층구조가 시스템적 비위계적 성층구조 구성에 영향을 주고, 기능에서는 유기물들의 유동과정인 먹이사슬 구조와 화학물질들의 유동과정인 지질학적 순환과정은 순환적 역동성과 관계성으로서의 세계관에 영향을 준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세계는 견고한 물질들로 가득 메워진 고체덩어리 입자가 아니라 관계들로 구성된 방대한 공간으로 나타났다. 즉 새로운 세계관의 토대가 되는 새로운 실재관은 관계망으로 짜인 그물과 같은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분석의 기본단위는 더 이상 분할 가능한 고립적 입자들이 아니고, 분할할 수 없는 관계이다. 또한 이 세계는 분할 불가능한 최소의 단위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역동적 통일체로 나타난다.


이 세계에서 시간, 공간은 분리된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며, 특정 관찰자가 자연현상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의 주관적 역할로 환원된다. 이런 실재에 대한 설명방식은 기존의 인과론적 설명패턴이 아닌 상호관계의 확률패턴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고, 질문유형도 어떤 것 그 자체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다른 것과의 관계에 대한 물음으로 바뀌었다. 시간과 공간은 4차원 지도를 동시에 구성하며, 특정 방향이 없어지고 전후가 없어지며 원인과 결과의 직선 개념이 없어졌다(Capra, 1980 : 3장 : 재인용)


패러다임의 전환을 목도에 두고 있다. 캘리곳(Barid Callicott)도 양자역학의 탈기계론적 자연관에 기대어, 오늘날에는 가치를 매기는 주체와 가치중립적인 대상, 또는 자아와 세계 사이의 이분법이 폐기되었다고 역설한다. 이렇게 자연은 ‘유기적 전체로서 살아있는 것’이었고,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세계관이 본 ‘생명 없는 차가운 거대 기계’는 자연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3) 아르네 네스(Arne Naess)의 주체

데카르트의 기계론과 이원론, 인간중심주의 핵심에는 그의 협소한 주체 개념이 있다. 데카르트는 철저하게 ‘나’와 ‘너’를 구분했다. 인간중심주의는 타자에 대한 배제를 필연적으로 낳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주체 개념은 닫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외부 세계와 타자를 의심하고 회의했지, 연결되어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네스에게는 타자 또한 자기다. “우리는 타자에게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타자의 자기실현이 방해를 받으면 우리 자신의 자기실현도 방해를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살 뿐 아니라 타자도 살 수 있도록 해야(Live and let Live)한다.” 네스의 ‘자기’는 온 인류를 넘어 모든 자연적 존재(동식물과 지구 전체)로까지 확대되며, 이 모든 존재를 나를 존중하듯이 대하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자기실현’이다.’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자면, 네스에게 ‘자기(wider Self)’는 산스크리트어 ‘아트만(Atman)’에 가까운 개념으로서 나 자신뿐 아니라 타인과 인간 이외의 생명체가 포함되어 있는 ‘궁극적인 혹은 보편적인 자기(supreme or universal Self)’이다(Naess, 1995b, 22 : 재인용).


네스의 ‘자기’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전제하고 있지 않다. 네스의 ‘자기’는 확장되어 모든 자연적 존재에 가 닿는다. 데카르트 이후 이어져오던 이원론의 전통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데카르트처럼 머릿속에서 자기의 뫼비우스 안에 뱅글뱅글 돌던 홀로적, 나르시스적 주체의 악순환을 끊어버린다. 네스는 좁은 자기를 벗어나 더 큰 자기인 ‘보편적인 자기’를 향하고, 이 큰 자기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 형태를 망라’한다(Naess, 1995c, 80 : 재인용).


“나는 우주와 함께 내가 자라고 있다고 느낍니다. 나는 우주와 내가 하나라고 봅니다. 우주가 크면 클수록 나도 커집니다. 어떤 사람은 우주는 너무나 거대하고 우리는 너무나 조그맣다는 것을 깨달으면 겁이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우주만큼 클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을 온 존재와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네스는 존재의 구분을 지양함으로서 세계와의 확장 통로를 개척한다. 다음 장에서는 네스의 이론을 김상봉의 ‘서로주체’ 개념을 통해 확장해보려 한다. 서로주체는 네스의 생태적 자아 확장을 뒷받침하는 주체 개념이자 지금까지 논의해온 이야기를 정리하는 마침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Ⅳ. 서로주체성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자아의 존재를 철학의 제일 원리로, 세계 인식을 위한 출발점로 삼았다. 자아의 존재를 추적해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당당했다. 그 어떤 것도 요구하거나 필요로 함이 없이 오직 자신과의 묵언의 대화, 냉철한 성찰을 통해서만 이루어냈다. 선입견과 감각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아가 자신을 관조하는 길에는 그 어떤 장애도 없었다.

데카르트의 주체는 철저하게 자기 고립적이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외치기까지 그는 골방 속에서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고 자기에만 집중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사유는 철저히 홀로 이루어졌다. 아마 데카르트와 네스의 가장 큰 차이를 찾는다면, 데카르트는 골방에서 자기에 주목한 나르시스트였고, 네스는 벌레 한 마리의 죽음에서도 슬픔을 느끼는 에콜로지스트 였다는 점이지 않을까.

데카르트의 홀로-사유에 대해 김상봉은 다음과 같이 썼다.


“자아가 오직 자기 자신 속에서 자기를 정립하고 형성할 수 있다면, 아니 여기서 칸트나 셸링이 말하듯이 단순히 정신적 존재로서 자아뿐만 아니라 모든 실재성 자체를 자기 속에서 스스로 정립하는 것이라면, 그런 자아에게 타자가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자유 속에는 타자적 주체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김상봉은 서양 철학의 전개에 대해 ‘나르시스의 꿈’이라 이름 붙였다. 서양정신은 자아를 오직 자기 안에서 정립하려 시도했고, 모든 답을 스스로에서만 찾으려 시도했다.

타자적 주체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타자와의 상호연결성을 자각하지 못한 주체개념이 지금까지 서양 중심의 역사에서 ‘보편’의 위치를 차지해왔다는 것은 유감을 넘어 경악이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세계관. 신고전파의 편협한 모델, 자본주의의 패악, 에코모더니스트의 한계까지, 타자에게 냉혹한 시선을 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통된다.

김상봉은 서양정신 자기 안에서 찾아낸 답을 자기에게만 적용한 것이 아닌, 세계인식으로까지 확장하였고, 이 광범위한 보편성의 확장 속에서 ‘제국주의’와 ‘자본’의 횡포가 드러났다고 말한다. 패권을 쥐고 있는 제국의 나라들의 역사를 돌이킬 때 그들에게서는 자신의 우월성과 능동성에 대한 자신만만함·오만함이 가득했다. 전지구적 환경위기를 누가 초래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라.


“서양 정신이 타자적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서양적 자유의 이념 자체가 타자적 주체를 배제한 자기관계를 그 본질로 삼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자연을 ‘죽어있는 것’으로 사유한 까닭은 모든 실재성을 자기 속에서 정립하려 들었던 나르시스적 과정에 있다. 타자적 주체가 들어설 자리를 남겨두지 않은 사유는 필연적으로 폐쇄적이고, 공존 불가능성을 함유하고 있다. 마치 지금의 지구와 인간의 관계처럼 말이다.


“서양적 자유의 이념은 마지막에는 모든 타자, 모든 아닌-나의 배제로 나아간다. (중략) 생각하면 서양 정신이 보여주는 타자에 대한 공포는 바로 이 수동성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나와 동등한 타자가 나 밖에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그에 의해 언제라도 예속되고 수동적으로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의한다”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사용하며, 외부적 모든 것을 의심하는 과정을 보고 있자면 인간이 지닌 수동성의 면모에 대한 공포가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새로운 주체의 개념을 모색할 단서가 주어진다. 김상봉은 홀로의 사유에서 나와 ‘내’가 ‘너’를 통해서 형성된다는 상호연결의 사유를 말하며, ‘서로주체’ 개념을 내보인다. 서로주체의 핵심은 ‘자기상실’이다. 타자적 정신에서 자기를 잃을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내가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걸 자각한다는 의미다. 인간에게 있는 수동적 면모를 주체에서 극구로 배제시키는 것이 아닌, 포함해서 정립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빚져 있는 존재다. 수동적인 면이 다분한 존재 아닌가. 자기의지로 자아를 형성하고, 자기의지로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단독자로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어느 누구의 배도 빌리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숨쉬지 않는 이상. 내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상호윤리의 자각 없이 나 홀로를 전제하고 펼쳐가는 논리체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데카르트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수동성이 실은 인간의 본질이라면, 데카르트가 보지 못했던 자연과 우주의 역동적이고 유기체적인 움직임이 실은 세상의 본질이라면,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그레타 툰베리가 절박한 목소리로 사라져가는 생물들과 오염되어가는 바다에 대해 호소할 때 그것은 각자의 홀로주체에서 벗어나 서로주체로 나아가자는 바람이었을지다.


‘그런 것(빚)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Ⅴ. 맺음말


“사람들의 병영체험을 문제화하는 지점은 타자와의 상호연결성을 자각해야하는 윤리적 요청에 있다. 이를테면, 종이 한 장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햇빛과 비라는 자연세계의 선물을 받으며 세계 각 지역의 사람들이 개입했을 그 노동의 –때로는 노동의 착취로 이루어졌을- 수고로움이 담긴 종이 생산과 유통 과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소비과정에 내가 어떻게 연루돼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 성찰 같은 것이다. 수잔 손택(Susan Sontag)이 말한 ‘내가 타인의 고통에 연루돼 있을 수 있다’는 숙고야말로 타자와의 연결성을 감지하는 시작점이다. 더 밀고 나간다면, 주체의 구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서로 연결돼 있고, 개인은 서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삶의 조건이자 취약성이다.

결국은 주체의 문제다. 타자와의 관계 맺음이 상호연결성에 발 딛지 않고 상호배타성 –적자생존, 이기주의, 무한경쟁- 에 발 딛는다면 그것은 주체가 아니다. 설령 주체라 부를지라도 불완전한, 독단적인 홀로-주체다. 고립된 ‘나’만이 남아, 내가 제일 소중하고 귀하고, 딱 여기까지일 뿐이니. 내가 귀한 만큼 옆 사람도 옆옆 사람도 귀하다는 데 까지는 나가지 않는다.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그래서 서로-주체다. 우리는 살아있음으로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고 지구와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섬세한 접근만이, 그리고 나와 세계가 연결되어있다는 자각만이 우리가 직면한 인류세의 위기를 풀어낼 단초를 주지 않을까. 우리는 데카르트의 홀로주체를 버리고 서로주체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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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6.21 쓴 글입니다.

* 김진업 교수의 <사회사상사> 기말레포트로 제출한 글입니다.

* 각주는 한글문서에서 복사되지 않아 그냥 게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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